< Verse 16. 파급효과 >
허태진 피디의 피디 룸은 888 크루의 대기실에서 별로 멀지 않았다. 스태프를 따라 도착한 3층의 가장 큰 회의실에서 허태진 피디가 상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현이 들어오자 허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반겼다.
“잘 지내셨어요? 바쁘신데 오라고 한 건 아니죠?”
“아닙니다. 그냥 놀면서 대기 중이었는데요, 뭐.”
“공연 준비는 벌써 끝나셨나보네요. 아, 보내주신 앨범은 정말 잘 들었습니다.”
“좋게 들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잠시 동안 덕담을 주고받던 허태진이 본론을 꺼냈다. 그가 하려는 말은 크로우칭 라이터의 라이브 클립에 대한 이야기였다.
“혹시 크로우칭 라이터의 공연용 반주가 준비되어 있나요?”
질문으로 운을 뗀 허태진 피디의 이야기가 꽤 길게 이어졌다. 결론적으로는 크로우칭 라이터의 라이브 영상을 찍고 싶다는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상현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네? 어째서요? 좋은 기회 아닌가요?”
“크루원들의 공연 시간을 뺏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크로우칭 라이터를 한다면 저희 크루원들의 공연 시간이 그만큼 줄게 되니까요.”
상현의 말에 허태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현은 정말로 성공에 대한 욕심이나 명예욕이 없는 건가? 보통 이런 기회가 오면 피디가 시켰다는 말로 크루원들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나?’
대학을 졸업하고부터 10년 넘게 쇼 비즈니스계에 몸담았던 허태진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문제될 것은 없었다.
허태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크로우칭 라이터의 공연 시간은 888 크루의 공연 시간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음, 그냥 공연에 반영되지 않는 ‘자기소개 랩’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888 크루 소개를 위해서 지금까지 영상이랑 인터뷰를 따가셨지 않나요? 그런데 왜 갑자기 크로우칭 라이터를……?”
“이게 다 트리플 에잇이 너무 잘나가는 탓이죠.”
허태진이 본래 888 크루를 통해 그리려던 그림과, 888 크루가 유명해진 탓에 새로 그려야하는 그림에 관해 설명했다.
혹시나 이미지 메이킹이라는 말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까싶어서, 인지도가 가장 떨어지는 888 크루를 부각시키기 위한 긍정적인 장치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상현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저희가 유명해진 탓에 기획하셨던 그림이 바꿨다는 거죠?”
“맞습니다.”
“피디님은 저희가 코드네임이나 바운스 라임, 스타즈 레코드만큼 유명하다고 보시는 건가요? 아무리 오피셜 부틀렉 반응이 좋다고는 하지만 아직 발매한지 한 달이 채 안됐는데요?
“음, 물론 888 크루가 ‘연예인’인 코드네임이나 바운스 라임보다 유명한 건 아닙니다. 데뷔한지 6년이 넘은 스타즈 레코드와 비교해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힙합 더 바이브 2가 타깃으로 삼는 시청 계층을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시청 계층?”
“네, 힙합 더 바이브 2는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음악콘텐츠를 좋아하는 10-30 계층을 타깃으로 설정한 방송입니다. 전 국민을 상대로 따지자면 당연히 888 크루가 코드네임에 비해 인지도가 한참 부족하죠. 하지만 힙합 팬들과 음악을 좋아하는 10대부터 30대의 사람들로만 한정하면, 888 크루의 인지도가 다른 팀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왔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생각해보던 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888 크루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는 그냥 크로우칭 라이터를 하면 되나요?”
“아닙니다. 크로우칭 라이터는 다른 참가자들의 촬영이 끝나고 추가로 촬영할 예정입니다. 단독무대로요.”
“오늘 촬영이 저녁 12시쯤에 끝난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도대체 무슨 촬영을 하길래 8시간이나 걸리는지 모르겠지만.”
상현의 질문에 허태진이 웃으며 답했다.
“12시도 빨리 끝날 때의 시간입니다. 아마 한두 시간 정도는 딜레이 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럼 말씀하신 크로우칭 라이터의 촬영 시간이 없지 않나요?”
“급작스러운 요청이라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혹시 내일 촬영 하실 수 있나요? 일요일이니까 오전에 촬영을 시작하면 3시가 되기 전에 끝낼 수 있습니다.”
상현은 내일이라는 허태진 피디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쪽 대본을 받으면서 한치 앞도 모른 채로 촬영한다는 드라마 배우들의 기분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일요일에 촬영을 하자고? 아무런 컨셉이나 준비도 없이?
“컨셉이나 무대 구성은 허태진 피디님이 결정하시는 건가요?”
“음, 뭐 생각하시는 바가 있나요? 저는 드러머와 피아노 연주자만 배치할 생각이었습니다. 악기보다는 랩 퍼포먼스 중심이니까요.”
허태진 피디의 말에 상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크로우칭 라이터를 더 널리 알릴 좋은 기회긴 했다.
크로우칭 라이터가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것은 한국 최초의 100마디 랩이라는 희소성과, 극대화한 워드 플레이(Word Play)를 통해 랩이 아닌 가사만 봐도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랩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오피셜 부틀렉에 내리는 평가를 봐도 이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랩을 싫어하는 대중들은 ‘Eight, Eight, Eight Remix’정도만 클럽 노래 같아서 신난다고 말을 하지, 나머지 트랙이 좋다는 말은 잘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이들도 크로우칭 라이터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왜냐하면 크로우칭 라이터는 대부분의 가사가 한국어 말장난으로 이루어져서 듣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상현은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이건 잘 하기만하면 무조건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허태진 피디가 크로우칭 라이터를 좋게 들었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다만 기분이 좀 나빠서 선뜻 오케이가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흔히 대중들은 랩을 ‘쉬운 음악’으로 생각하곤 했다. 노래와 다르게 소리를 내는 방법이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상현은 당연하게도 랩 뮤지션으로서 이러한 인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허태진 피디의 하루 만에 공연 준비를 해달라는 제안이, 랩을 쉽게 보기 때문인 것 같아서 썩 좋게 보이지 않는 이유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슈퍼스타 K 같이 노래를 다루는 프로그램에서도 하루 만에 경연 곡을 준비하는 일이 흔했다. 어쩌면 방송계에서는 별다른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하겠습니다. 대신 준형이를 하이프맨(Hype Man)으로 쓸 수 있을까요?”
“네? 하이프맨이 뭔가요?”
“음…… 사운드를 도와주는 백업 래퍼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하이프맨은 백업 랩과 애드립을 담당하여, 공연장의 분위기를 띄우는 백업 래퍼를 칭하는 단어였다. 호흡 조절과 악센트가 필요한 부분마다 더블링을 쳐주고, 마디 사이사이에 추임새를 넣어 호응 유도를 하는 등, 공연의 원활한 흐름과 여백을 책임지는 게 하이프맨의 주된 역할이었다.
하이프맨은 한국에서는 낯선 단어지만 미국에서는 아주 중요한 포지션이었다. 현재 날고 기는 대부분의 래퍼들도 하이퍼맨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경우가 많았다.
뉴욕의 왕 제이지(JAY Z)는 제즈오(Jaz-O)와 빅 대디 케인(Big Daddy Kane)의 하이프맨으로, 스쿨보이 큐(Schoolboy Q)는 컨트롤 비트로 유명해진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의 하이프맨으로 씬에 발을 들였다.
한국에서는 도끼가 조PD의 하이프맨으로, 비프리가 리오 케이코아(Leo Kekoa)의 하이프맨으로 커리어를 시작했었다.
그리고 상현이 무대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준형이었다.
가끔씩 공연을 하다보면 연습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숨이 차는 부분들이 있었다. 준형은 그럴 때마다 상현의 호흡이 달리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 채고 준비하지 않은, 하지만 너무나 적절한 더블링을 쳐주곤 했다.
하이프맨에 대한 설명을 들은 허태진 피디가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했던 그림은 이상현 씨가 혼자서 랩을 하는 그림입니다만, 어쩔 수 없죠. 준비기간이 너무 짧으니까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크로우칭 라이터의 영상을 제가 사용해도 괜찮나요?”
“뮤직비디오로 만드시게요?”
“뮤직비디오는 아니고 라이브 클립으로 한 번 만들어보려고요.”
“어려울 것 없죠. 다만 힙합 더 바이브 버전이라는 표시는 해주셔야합니다.”
“물론이죠.”
그렇게 크로우칭 라이터의 라이브 촬영을 수락한 상현은, 잠시 동안 허태진 피디와 무대 구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럼 더 원하시는 사항은 없는 건가요?”
“네. 이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어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저는 대기실로 가봐야겠네요. 촬영 때 뵙겠습니다.”
허태진의 피디에게 인사한 상현이 회의실에서 나왔다. 대기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공짜로 초고화질 영상 클립이 생기네?’
바로 어제 오매불망 기다리던 유투브가 드디어 서비스를 시작했다. 상현은 크로우칭 라이터 라이브 클립을 유투브에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
힙합 더 바이브 2의 첫 촬영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888 크루는 거기 왼쪽에 앉아주시고요! 그 옆으로 스타즈, 바운스, 코드네임 순으로 앉겠습니다!”
스태프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무대 배치를 확인했고, 조명팀은 뭔가를 열심히 조작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6대의 카메라가 출연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기 시작했다.
888 크루 멤버들은 신기한 눈으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방송국 풍경을 즐겼다.
“888 크루 메인 카메라는 3번 카메라에요! 피디님의 물음에 답하실 때는 3번 카메라 보시면 됩니다. 3번 카메라 감독님 손 한 번만 들어주세요!”
다큐멘터리와 음악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는 스타즈 레코드나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일상인 바운스 라임, 코드네임과 달리 888 크루원들은 모든 게 신기했다.
그 모습을 본 코드네임의 루키와 우성이 비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이미 마이크 세팅이 끝났기에 입 밖으로 어떤 말을 꺼내진 않았다.
각 팀의 공연 영상과 인터뷰 영상을 보는 것으로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각자 편한 장소에서 편한 마음으로 한 인터뷰를 20명의 뮤지션들이 함께 보는 것은 미묘한 기 싸움이 일어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음…… 888 크루는 포텐이 있는 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 그 포텐이 터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더라고요. 신선한 맛은 있지만 커리어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사운드적인 면이나, 팀원들의 트랙 내 조화가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바운스 라임의 여성 래퍼 에디션이 888 크루를 평가하는 인터뷰가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나왔다. 888 크루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였지만, 인혁이나 준형은 자신도 모르게 ‘오오오!’를 외쳤다.
왜냐하면 안무실에서 인터뷰를 하는 바운스 라임의 여성 래퍼 에디션이 몸에 쫙 달라붙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 쪽팔려! 가만히 좀 있어!”
오민지가 작게 으르렁거리며 박인혁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 모습을 본 준형이 잽싸게 양팔로 옆구리를 가렸다.
‘뭐야?’
에디션은 888 크루의 행동을 보면서 약간 기분이 나빠졌다. 마치 자신의 발언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카메라가 자신을 줌인하는 것이 느껴져서 재빨리 표정관리를 했지만 시선이 힐끔힐끔 888 크루에게 향했다.
바운스 라임의 공연 영상, 스타즈 레코드의 인터뷰, 코드네임의 음악 방송 영상 등이 이어지고, 마침내 888 크루의 인터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들이 뭐라고 씨부렸지?’
코드네임의 루키가 화면에 집중했다. 루키뿐만 아니라 888 크루가 아닌 12명의 뮤지션들의 시선이 인터뷰가 나오는 스크린에 쏠렸다.
사실 코드네임이나 바운스 라임, 스타즈 레코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스타즈 레코드 같은 경우는 페이를 받고 소속사에서 랩을 가르친 적도 있었고, 활동한 기간이 너무 길어서 오버그라운드 뮤지션들도 꽤나 여러 번 접해본 팀이었다.
그러나 888 크루는 정보가 별로 없었다.
물론 퍽 더 쇼 비즈, 클럽 호미 공연, 무등 경기장 공연, 부틀렉 0.5, 오피셜 부틀렉 트리플 에잇 등등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있었지만 1년이 채 되지 않은 커리어이기 때문에 그들의 전부를 알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건 친분이 있는 스타즈 레코드 멤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클럽 호미의 성공적인 공연, 2연타로 터진 부틀렉, 몇 번의 개인적인 대화만으로 888 크루의 전부를 알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커다란 스크린에 상현의 얼굴이 나타났다.
< Verse 16. 파급효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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