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09화 (109/309)

< Verse 16. 파급효과 >

“뭘 봐!”

“니가 먼저 봤지 내가 먼저 봤냐?”

“이, 이건 매니저가 허태진 피디한테 주라고……!”

“누, 누가 뭐래?”

“지금 네 표정이…….”

“아니, 허 피디님은 내가 개인적으로 앨범을 드렸는데 니가 말도 안 되는…….”

“알게 뭐야! 매니저가 주라면 주는 거지!”

“언제부터 그렇게 매니저 말을 잘 들었다고…….”

이상현의 중얼거림에 드레드가 인상을 확 썼다.

“야! 그리고 너 88년생 아니냐?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것이 얻다대고 반말이야?”

“너는 우리 크루 형들에게 존댓말 썼냐? 그 형들 다 82년생들인데? 그리고 너 내 나이 어떻게 알아?”

“니 동생이 남들 보라고 힙합엘이에 올려놓고서 왜 지랄이야?”

“888 크루의 실체……?”

“그래! 그……거…….”

“…….”

“…….”

복도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상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드레드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너 무슨 음지 속의 팬클럽이냐? 어둠의 팔사모야? 사인해줘?”

“진짜 뒤지고 싶냐? 미친 새끼야? 그리고 이거 사인반이거든? 니 새끼가 사인 안 해줘도……!”

“…….”

“…….”

또 한 번 침묵이 흘렀다.

드레드는 말을 할수록 손해라는 것을 느끼고 쿵쾅거리며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이상현은 여전히 이상한 시선으로 드레드를 쳐다봤다.

“뭐야 저 새끼? 변태야?”

사인반은 총 50개가 풀렸고, 그 중 티셔츠를 받기 위해 인증샷을 올린 사람이 47명이었다. 혹시 남은 세 명 중 한 명이……?

상현은 잠시 몸을 부르르 떨다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커피를 뽑았다. 아마 회사차원에서 힙합 더 바이브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산 앨범 중에 사인반이 섞여있었겠지.

“아오, 씨! 내가 왜 당황했지?”

그 사이 드레드는 쿵쾅거리며 허태진 피디의 방으로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허태진 피디에게 앨범을 건네주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요? 저는 코드네임 매니저 분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네? 매니저 형이 분명…….”

“뭔가 오해가 있으셨던 게 아닐까요? 아니면 다른 조연출이나 피디를 저로 착각하셨거나.”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드레드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인사하고는 허태진 피디의 방에서 나왔다. 순간 열이 확 뻗쳤다.

‘이러면 씨발 진짜 내가 888 크루 앨범을 사서 보관하고 있던 게 되잖아?’

한참 열이 받아있던 드레드는 잠시 오피셜 부틀렉을 보다가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마도 매니저가 개인적으로 산 앨범인데 자신의 눈치를 보다가 상황이 꼬인 것 같았다. 그가 또 이런 쪽으로는 눈치가 빨랐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앨범을 내가 가지면 매니저가 땀 좀 싸겠지? 사인반이라고 생각하고 좋아했을 텐데 말이야.’

드레드는 매니저한테 이 앨범을 보여주면서 약을 올릴 생각을 하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돌려줄 듯 말 듯 하면서 약 올리면 매니저 표정이 볼만 하겠는데? 이건 내가 꼭 가지고 있어야겠다.

그렇게 어둠의 팔사모가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

힙합 더 바이브 2는 총 4라운드로 한 개의 에피소드를 구성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또한 에피소드가 바뀔 때마다 4팀의 출연진이 전부 바뀌는 포맷이었다.

Episode 1의 출연진은 코드네임, 스타즈 레코드, 바운스 라임, 888 크루.

방송 시간은 1시간 20분으로 최종확정이 났고, 각 팀의 공연 시간은 매 라운드마다 조금씩 달라졌지만 10분에서 15분 사이였다.

라운드 규칙은 간단했다.

1 라운드 : 자유 주제로 공연. 각 팀당 12분 30초. 탈락 팀 없음. 1등 팀이 2라운드 대진과 순서를 결정함.

2 라운드 : 상대방이 추첨한 주제로 공연. 각 팀당 12분 30초. 1팀 탈락. 남은 팀은 3팀.

3 라운드 : 디스 배틀. 각 팀당 15분 공연. 1팀 탈락. 남은 팀은 2팀.

4 라운드 : 힙합을 주제로 공연. 각 팀당 17분. 우승팀은 최종상금 200만원 획득과 왕중왕전 출연 기회 부여.

힙합 더 바이브 2는 총 4주간 방송될 예정이었고, 녹화는 6주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다.

오늘 888 크루 멤버 8명이 서울로 총 출동한 이유가 1차 녹화를 위해서였다.

“배가 형!”

대기실에서 멍 때리고 있던 준형이 창밖으로 지나가는 배상욱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좀 일찍 도착해서 할 일이 없었는데, 드디어 스타즈 레코드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다른 형들은요?”

“두 명은 주차하고 있고, 두 명은 화장실 갔어.”

“오빠, 안녕하세요.”

“그래 하연아. 수능은 잘 봤니?”

“네? 저 아직 수능 안 봤는데요.”

“그래? 보통 11월 초에 보지 않나? 작년 11월 5일에 나 무슨 수험생 축제 갔었는데.”

“이번이 7차 교육과정 도입 첫해라 2주정도 늦게 봐요. 11월 17일이요.”

“아아, 얼마 안 남았네. 열심히 준비해서 잘 봐야지. 어차피 찍고 나오겠지만? 상현이는 어디 갔어?”

“목마르다고 커피 뽑으러갔어요.”

배가는 ‘저 공부 잘하거든요!’라고 소리치는 하연을 무시하고 888 크루 대기실의 쇼파에 주저앉았다. 자기들끼리 뭔가 쑥덕거리던 888 크루의 나머지 멤버들도 뒤늦게 배가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배가는 오랜만에 만나는 888 크루 멤버들에게 반가움과 동시에 묘한 라이벌 의식을 느꼈다.

이번 888 크루의 트리플 에잇은 한국 힙합 씬의 래퍼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아니, 영감이라는 표현은 너무 작은 표현 같았고 그가 힙합엘이 게시판에 댓글 달았던 것처럼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

그는 진심으로 2집 앨범 스타즈는 한국 힙합의 ‘연결권’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 888 크루의 앨범은 ‘신간’이다.

문득 처음 퍽 더 쇼 비즈를 듣고 거기에 반해서 호미 공연에 상현이를 섭외할 때가 생각났다. 자신만 단독 섭외하려고 하니까 상현이가 했던 말.

‘저희 크루 멤버들 진짜 잘해요. 지금 스포트라잇이 저한테만 쏠리고 있어서 미안해 죽겠는데, 조만간 한국 힙합 씬에 제대로 보여줄 날이 올 거예요.’

그리고 상현의 말처럼 888 크루는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오피셜 부틀렉으로 말이다.

스타즈 레코드의 2집 앨범 스타즈가 1만 2천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것은 언더그라운드의 수요를 정확히 공략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888 크루는 탈 언더그라운드였다. 뮤지션들의 정체성은 의심할 나위 없이 언더그라운드지만 음악의 파급효과는 언더그라운드를 벗어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배가는 이번 힙합 더 바이브 2에서 반드시 이기고 싶었다. 결승전에서 888 크루와 맞붙어서 우승하고 싶었다.

원래 패기 넘치는 신인을 꼬꾸라트리고 더 성장할 여지를 주는 것이 베테랑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그때 상현이 대기실로 들어오면서 배가를 발견했다. 상현이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한걸음에 다가왔다.

“형.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어.”

“커피 좀 드세요.”

“내가 너희들 거 뺏어먹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여유 있게 뽑아왔어요.”

한참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배가의 문자를 받은 스타즈 레코드의 나머지 멤버들도 888 크루의 대기실로 들어왔다.

상현과 888 크루 멤버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얼마 전 인디 키드 피처링 때 만났던 우연우를 제외하면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었다.

스타즈 레코드는 워낙 인맥이 넓어서 객원 멤버와 피쳐링이 많은 팀이었지만, 정확히 말하면 총 5명으로 이루어진 팀이었다.

리더 배상욱(배가). 프로듀서 겸 래퍼 우연우. 래퍼 염현필(Feelnight). 래퍼 오명진(Jack'O). 보컬 김유화.

888 크루의 대기실은 곧 13명의 뮤지션들이 나누는 음악 이야기로 인해서 시장 통처럼 변했다.

“아, 맞다. 하연아. 나 너가 했던 말이 뭔지 알았다.”

“네? 뭐요?”

우연우가 말했다.

“너가 저번에 녹음할 때 그랬잖아. 크로우칭 라이터 들으면 화가 난다고. 아, 나도 그거 듣고 개 빡침.”

“왜요?”

“크로우칭 라이터를 들으니까 내가 밤새 가이드 떠 논 트랙이 너무 짧은 거 같은 거야. 그래서 비트를 좀 손봐서 32마디로 늘렸더니 이번에는 너무 긴 거 같은 거야. 다시 16마디로 줄이니까 뭔가 심심한 거 같고…….”

“상현아, 그거 캐니버스 듣고 생각한 아이디어야?”

“네, 당연하죠. 100 Bars 나올 때 미국에서도 좀 화제가 되지 않았었나요? 저는 힙합 팬들은 거의 알 줄 알았는데, 제가 전 세계 최초로 100마디 랩을 했다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캐니버스가 한국에서는 별로 유명한 래퍼가 아니잖아.”

그때 조용히 듣고 있던 오명진이 물었다.

“근데 그거 뭐야? 단체곡 리믹스. 스탠다드가 누구야? LA한인 타운 사람이야? 한국인이야?”

“아니에요. 덴마크 사람인데 지금 LA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원래 단체곡 비트도 스탠다드가 만들어준 거였어요.”

“너희가 컨셉을 요구한 거야? 트랩으로 해달라고?”

“어…… 단체곡은 저희가 요구했어요. 그런 트랩의 느낌을 낼 거라고. 근데 이번 리믹스는 진짜 갑자기 어느 날 보내온 거예요.”

“내가 한 달쯤 전에 LA에 놀러갔다가 NPQ 잡지를 봤거든? 거기서 스탠다드의 노래가 꽤 높은 순위에 있더라고. 제목이 Eight, Eight, Eight Remix라서 그냥 신기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한국으로 오니까 이 노래가 나와서 놀랐어.”

“NPQ가 뭐에요?”

“미국은 주 하나가 거의 우리나라만 하단 말이야. 뭐 좀 작은 곳도 있지만. 아무튼 그래서 주마다 각 주를 대표하는 빌보드 같은 잡지가 있어.”

한국 사람들 중에는 빌보드를 음악 통계청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는데, 빌보드는 잡지이름이었다.

1894년 미국 뉴욕에서 창간한 빌보드지는 1950년대 중반부터 대중음악의 인기 순위를 집계하여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빌보드 순위는 공신력을 인정받아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 대중음악의 흐름을 알려주는 지표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빌보드 순위는 그 넓은 미국에서 35개의 차트 밖에 다룰 수가 없었다. 때문에 각 주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언더그라운드의 노래들이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때문에 각 주의 권위 있는 잡지사들이 지역 내 빌보드 같은 역할을 하기 시작했는데, LA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 잡지사가 NPQ였다.

“근데 LA 크기가 얼마죠?”

“그야 LA시만 말하느냐, 아니면 메트로폴리탄을 말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LA시만 따지면 그렇게 안 커. 광주보다 좀 더 클 걸?”

“근데 어떻게 빌보드 같은 순위를 매겨요? 앨범 수가 그렇게 많나? 그리고 판매량이 차이가 나나?”

“너네 그거 잘 모르구나? LA는 힙합뿐만 아니라 특히 언더그라운드 씬이 발전한 곳이야. LA에서 대박나면 앨범 20만장 이상씩 팔리기도 해. 물론 다른 주에서도 대박나면 그만큼 팔리지만.”

“20만장이요?”

“그래, 만약에 LA에서 탑을 먹은 다음 캘리포니아 주를 집어 삼켰다고 생각하면 100만장도 가능할 걸? 투팍 몰라? 캘리포니아 러브.”

오명진이 캘리포니아 러브의 도입부를 흥얼거리자 박인혁이 갑자기 뮤직비디오에서 나왔던 닥터 드레의 춤을 따라 추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행동에 사람들의 웃음이 빵 터졌다.

상현도 같이 웃으면서 스탠다드와의 전화 통화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저번에 스탠다드와 했던 통화 중에서 ‘무슨 순위가 급상승 중’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본래 스탠다드의 비트 페이 때문에 전화한 것이어서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야, 아무튼 진짜 리믹스 비트 죽이더라.”

“어어, 덥스텝을 섞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Eight, Eight, Eight 리믹스에 가장 큰 감명을 받았던 우연우가 대꾸했다.

“근데 왜 우리랑 콜라보 할 때는 그런 비트 안 썼어? 아껴놓은 거야? 우리가 못 미더워?”

“네? 아니에요. 형들이랑 한 비트도 스탠다드 비트인데요?”

“스탠다드 이 시키가 사람 차별하는 거네?”

배가가 투덜거렸다. 한동안 오피셜 부틀렉과 2집 스타즈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때 888 크루 대기실 문이 열리며 스태프 한 명이 들어와 말했다.

“이상현 씨. 잠시 허태진 피디님이 뵙자고 하시는데요.”

“네? 저만요?”

상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기실에서 나와서 스태프의 뒤를 따랐다.

< Verse 16. 파급효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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