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16. 파급효과 >
(중략)
……888 크루가 가져올 변화는 거대해 보인다.
그렇다면 언더그라운드 음악으로 오버그라운드를 평정한 뮤지션은 언더그라운드인가? 오버그라운드인가?
물론 자로 잰 듯이 나눌 수는 없다. 언더그라운드에서 탄생했으니 언더그라운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고, 오버그라운드를 공략했으니 오버그라운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힙합 문화에 있어서 ‘언더그라운드’라는 단어는 참 이상한 어감을 품고 있는 단어이다. 언더그라운드는 본래 ‘지하의’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이다. 그러나 예술계에서는 메인스트림의 화려한 맛(자본)을 쫓기보다는 밑바닥에서 본인들의 전위적인 예술행위를 영위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언더그라운드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특히 강한 예술 중 하나가 지금 언급하는 힙합 문화이다.
언더그라운드는 개러지(Garage : 차고) 아트와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깊이 파고들면 그 의미가 다르다.
개러지는 차고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처럼 차고에서 하는 예술(보통은 음악)을 뜻한다. 개러지 록(Garage Rock)이 특히 유명한 장르이다.
개러지 컬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면, 음악을 할 만한 좋은 환경과 능력을 갖추지 않아도 충분히 멋진 음악을 할 수 있다는 디아이와이(DIY : Do it Yourself) 정신을 담은 장르란 뜻이다. 그러니까 개러지 문화는 그 문화가 주류로 올라가도 DIY 정신을 계승했다면 여전히 개러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언더그라운드는 문화는 좀 다르다.
Under Ground
Over Ground = Main Stream
‘언더(Under) / 오버(Over) = 메인(Main)’으로 대비되는 단어의 어감만 봐도 알 수 있다. 본래 의미는 그렇지 않았지만, 현대 음악에 있어 언더그라운드는 오버그라운드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성장했다.
힙합 문화에 있어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은 오버그라운드 뮤지션들이 다룰 수 없는 주제와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오버그라운드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말이다. 그들이 다룰 수 있는 이야기는 기득권에 대한 비판이 될 수도 있고, 정치 풍자가 될 수도 있고, 혹은 남녀 사이의 성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한다.
언더그라운드가 그들의 음악성을 증명하는 최고의 방법이자 목표가 탈(脫) 언더그라운드라는 점이다. 여전히 언더그라운드적인 방식으로 음악활동을 영위하지만, 그것을 향유하는 계층이 언더그라운드 팬층을 넘어서 오버그라운드까지 확장되는 것. 이것이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에게 있어 그들의 음악성을 증명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언더그라운드 방식을 고집하면서 내놓은 음악이 오버그라운드 팬층까지 홀려버린다면, 그 누구도 음악성에 불만을 제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얼터너티브라는 장르를 주류로 올려버린 너바나(Nirvana)처럼.
그러니 참으로 아이러니 않은가?
언더그라운드 정신을 계승하면서 언더그라운드에서 음악을 하지만, 최종 목표가 오버그라운드라는 것이 말이다.
언더그라운드 팬층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언더그라운드가 오버그라운드 팬들을 흡수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화는 언제나 큰 쪽이 작은 쪽을 흡수하기 때문에, ‘오버그라운드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을 삼켰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논쟁은 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 전 세계를 주름잡았던 하드록의 성공과 쇠퇴에서 이미 지겹도록 다뤄졌던 주제이다. 때문에 소모적인 논쟁의 기승전결을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필자가 이 진부하고 지겨운 이야기를 또다시 장황하게 가져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888 크루를 필두로 힙합이 주류 문화로 올라오고 있는 ‘이 시점에서만’ 다룰 수 있는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언더그라운드 음악으로 오버그라운드를 평정한다면 그 뮤지션은 언더그라운드인가? 오버그라운드인가?
정답은 이미 정해져있다. 록 문화에서는 록 스피릿(Rock Spirit)이라고 부르고, 힙합 문화에서는 비 더 언더그라운드(Be The Underground)라고 부르는 순수성을 고집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888 크루는 그들의 오피셜 부틀렉(앞서 말했지만 오피셜 부틀렉이란 단어는 참 재미있다)을 통해 주류문화에 편입되었다. 단순히 6500장이란 앨범 판매 수치만 놓고 봐도 그들을 완전히 언더그라운드라고 부를 수는 없다.
게다가 앨범 판매량의 상승곡선은 아직도 시들지 않았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888 크루의 음악에 ‘자본’이 개입되었다는 말과 같다.
오피셜 부틀렉은 누가 뭐래도 박수칠 수밖에 없는 앨범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없다는 것이지만, 그들 스스로 부틀렉이란 이름을 붙인 것을 생각하면 옥에 티는 될 수 있어도 옥이 아닌 것은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888 크루의 다음 앨범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만약 888 크루가 다음 앨범에서 ‘비 더 언더그라운드’ 정신을 지키면서도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다면?
어쩌면 우리는 전무후무한 뮤지션의 탄생과 동시대를 사는 행운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중음악 평론가 임영호
***
‘어우, 이 양반 부담 주는 거 대단한데?’
상현은 서울로 가는 버스에서 대중음악 평론가 임영호의 평론을 읽었다. 스마트 폰이 있었다면 핸드폰으로 읽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게 없어서 집을 나오면서 프린터로 출력해온 것이었다.
무려 글자 크기 14포인트로 A4 12장이 나오는 긴 평론이었다.
‘흠…….’
임영호는 아주 유명한 대중음악 평론가였다. 서울대학교 교수와 한국대중음악연구회 소장이라는 직함을 제하더라도, TV에도 자주 출연한 유명한 양반이었다. 888 크루는 이제 힙합 평론가가 아닌, 임영호 같은 평론가들까지 평론하는 팀이 된 것이었다.
명성이 거짓이 아닌 듯 평론도 날카로웠다. 상현이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것들은 문장으로 정리한 느낌도 들었다.
특히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그들의 음악성을 증명하는 최종 목표가 ‘탈 언더그라운드’라는 문장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상현의 생각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준형이 말을 걸었다.
“재밌냐?”
“이걸 재밌어서 보겠냐? 우리 이야기를 했으니 궁금함에 보는 거지.”
상현의 버스좌석 옆자리에서 자고 있던 준형이 눈을 반쯤 뜨고 하품을 했다.
“나도 그거 대충 읽어봤는데, 뭔 소린지 잘 모르겠더라. 아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막연하게 알겠는데 우리가 그렇게 거창한 의미를 두고 앨범을 만든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특히 부틀렉 0.5를 두고 한 이야기는 동감하기 힘들었어. 오피셜 부틀렉의 상업성을 정확히 절반으로 나눈 게 부틀렉 0.5라고 했던가? 아주 재미있는 장치라고? 근데 우린 그런 의미로 이름을 붙인 게 아니잖아. 그냥 이미 공개했던 곡들을 모아놓은 거지.”
“커트 코베인이 처음부터 하드록의 엉덩이를 걷어차려고 앨범을 냈겠냐? 비틀즈가 브리티쉬 인베이드를 의도하고 앨범을 냈겠어? 다 그런 거지 뭐.”
“그런가? 하긴 뭐, 우리야 우리 음악만 하면 되지. 남들을 신경 쓸게 뭐가 있겠어.”
하품 섞인 준형의 반문에 상현은 묘하게 긴장되는 시선으로 준형을 살폈다.
임영호 평론가의 말처럼 이제 888 크루에는 자본이 개입되었다. 그것도 적지 않은 돈이다. 왜냐하면 현재 앨범 판매량은 약 7500장정도로 집계됐기 때문이었다.
판매 속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반응은 뜨거웠다. 상현은 올해가 가기 전에 만장을 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힙합 더 바이브의 인기에 따라서 그 이상이 가능할지도.’
오피셜 부틀렉 판매 시 인건비를 고려하지 않으면 888 크루에게는 한 장당 대충 7300원의 수익이 생긴다.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앨범 판매를 통해 지금까지 얻은 수익이 54,750,000원이라는 말이다.
약 오천 오백만 원정도.
물론 서버 관리비와 증설비, 주문 접수와 출하를 담당하는 알바생의 페이, 앨범보관 장소 대여료, 커버를 디자인한 우민호와 김환에게 지급해야 할 디자인 페이, 티셔츠 제작비, 비트메이커 페이, 세금 등등 제해야할 것도 많았다.
그러나 상현의 계산에 의하면 이런저런 것을 제하고도 삼천 만 원 이상이 남았다.
삼천만원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아니, 888 크루의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주 큰돈이었다.
‘어떻게 될까?’
이런 상황에서 준형은, 그리고 888 크루 멤버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다음 앨범은 더 잘 팔리게 만들고 싶을까? 아니면 무조건 음악적으로 성장하고 싶을까?
물론 정답은 상현도 몰랐다. 그는 정답을 알고 크루원들을 관망하며 잘난 체 하는 게 아니었다. 기대감과 걱정으로 함께 888 크루의 미래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서울로 올라가는 이유인 ‘힙합 더 바이브’는 888 크루의 음악에 있어서 진정한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었다.
아직 완전히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자본 다음으로 느끼게 되는 명예, 혹은 인기.
그러한 일들을 겪고 나면 과연 888 크루는 어떤 음악을 하고 있을까?
***
“아, 이걸 어쩌지.”
힙합 더 바이브 2의 총 책임자인 허태진 피디는 회의실을 왔다 갔다 하며 뭔가를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다.
현재 힙합 더 바이브 2는 케이엠넷으로 개편된 방송국에서 야심차게 밀어주려는 프로그램이었다.
힙합 더 바이브 1을 화끈하게 말아먹을 당시만 해도 힙합은 비주류 문화라서 성공하기 힘들다던 동기, 선배들도 태도가 싹 바뀌었다.
‘야, 그거 정말 잘되겠던데? 원래 음악 콘텐츠랑 자극적인 콘텐츠가 잘 먹히잖아. 랩으로 컴피티션을 하다니 신선하네.’
‘그럴까요?’
‘어어, 너가 어련히 잘 하겠지만 더 크게 그림 그려보려면 경력 있는 PD들이 한 둘쯤 더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는 888 크루가 있었다.
888 크루는 음원 사이트에 음원을 배포하지 않았다. 때문에 차트 순위에 그들의 이름이 없긴 했지만, 이달에 발매된 앨범 중 판매량은 독보적인 1위였다.
벌써 방송계 일각에서는 888 크루가 대형기획사 소속이고, 음원 서비스를 시작했다면 마케팅을 등에 업고 지상파 음방에 1위 자리도 노려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또한 얼마 전부터 지상파 방송국에서 888 크루에게 음악방송 출연제의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 이러면 편집 방향이 너무 틀려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허태진이 고민하는 이유가 888 크루의 유명세에 있었다.
본래 허태진은 첫 라운드 경연에서 만들어낼 888 크루의 이미지를 정해놓았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나만 알고 싶은 팀’이었다.
대중은 아주 묘한 습성이 있다. 주류를 응원하는듯하면서도 매력적인 비주류에 큰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그 비주류가 멋진 모습을 보여줄수록 소유욕을 느낀다.
예를 들어 아주 메이저한 팀이 있다면, 그 팀은 당연히 시청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때문에 ‘아주 메이저한 팀’과 ‘어중간히 메이저한 팀’이 붙는다면 당연히 아주 메이저한 팀이 이긴다.
그런데 만약 아주 메이저한 팀과 처음보지만 ‘엄청나게 매력적인’ 팀이 붙는다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예측할 수가 없고 시청자들의 큰 관심을 유발하게 된다.
여기서 최고의 시나리오는 비주류의 팀이 점차 성장하는 것이다. 골리앗에 도전하는 다윗처럼 거인을 꼬꾸라트릴 채비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청자는 ‘내가 비주류인 저들을 응원했기 때문에’ 팀이 성장하는 기분이 든다. 그 뒤로는 다마고치 밥을 주듯이 비주류 팀이 속한 콘텐츠를 클릭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처음 허태진 피디가 888 크루를 섭외할 때도 888 크루는 제법 유명했다. 하지만 그러한 유명세는 TV에 나오는 스타즈 레코드나 바운스 라임과는 감히 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당시 888 크루는 유명해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벌써 너무 유명해졌단 말이야.’
오피셜 부틀렉이 나오고 나서 많은 게 달라졌다.
수년째 이어진 철밥통 고정 포맷으로 귀찮은 걸 극히 싫어하는, 아니 할 줄 모르는 것 같은 ‘공중파 음악방송 피디’들의 행동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음원등록을 부탁해가며 888 크루를 출연시키려 하고 있었다.
< Verse 16. 파급효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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