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15. 흐름 >
-쾅!
드레드가 책상을 부술 듯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김병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영상을 같이 봤기 때문이었다.
“이런 씨발!”
편집실 문을 걷어차듯이 열고 나간 드레드가 복도 한 편으로 사라졌다.
드레드는 화가 나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왜 기를 쓰고 888 크루의 인터뷰를 보려고 했는지, 이상현의 인터뷰를 보면서 깨달았다.
“염병할!”
그건 888 크루가 싫기 때문이다.
대기실에서 싸운 것도 엿 같고, 무등 경기장에서 망신을 당한 것도 엿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88 크루의 음악이 뇌리에 남았기 때문이다.
드레드는 무등 경기장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벤에서 3시간 동안 888 크루의 공연에 대해 생각했다.
와이커밍, 론리로드, 광주 업.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무대가 자꾸 떠올랐다.
그래서 드레드는 888 크루가 코드네임에 적개심을 불태우길 바랬다. 그는 무의식중에 888 크루와 동등한 입장에 선 ‘적’이 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현은 그러한 드레드의 무의식을 철저히 부숴버렸고, 스스로의 마음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드레드는 한참동안 방송국 앞에서 애꿎은 담배만 잘근잘근 씹었다. 한 모금을 빨면 담배가 부러지고, 또 한 모금을 빨면 또 담배가 부러졌다.
그렇게 여섯 번째 담배를 물었을 때 코드네임 전용 벤이 드레드의 앞으로 미끄러졌다.
“늦게 왔네? 피곤하겠다. 빨리 타.”
주차장에서 대기하던 코드네임의 매니저가 정문에 서있는 드레드를 발견하고 차를 몰아온 것이었다.
드레드는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앉았다. 매니저가 말했다.
“내일 모처럼 오전 스케쥴 없는 거 알지? 대신 오후 4시에 음방 있으니까 점심 먹고 천천히 미용실로와.”
“알았어. 창문 좀 열어봐.”
매니저가 창문을 열고 드레드가 담배를 물었다. 매니저가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 말고 노래 없어?”
“노래? 잠깐만.”
매니저가 능숙하게 한 손으로 카오디오 앞의 앨범 CD를 뒤적거렸다. 그때 앨범들 사이로 낯익은 숫자가 드레드의 눈에 들어왔다.
“잠깐만.”
드레드가 손을 뻗어 하늘색 앨범 커버의 씨디를 꺼냈다. 씨디에는 888이란 숫자가 새겨져있었다.
888 Crew Official Bootleg - Triple Eight.
“이거 뭐야.”
“어? 아, 방송국 갔다가 음향 팀에 잔여분 노래 씨디 좀 달라고 하니까 사이에 껴있더라고.”
“이 새끼들 앨범 없던데. 언제 나온 건데.”
“어제 나왔대. 난 그냥 같은 프로그램 출연하니까 정보가 될까 해서 가져왔지. 이리 줘. 내가 숙소에 도착해서 버릴게.”
그러나 드레드는 잠시 동안 씨디를 보다가 케이스를 열었다. 케이스 안에는 888 크루 멤버들의 사인이 들어간 종이와 트랙 리스트가 있었다.
‘뭐야. 이거 직접 사인한 거네?’
복사해서 출력한 게 아니라 손으로 직접한 것이었다.
매니저가 초조한 마음으로 드레드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드레드는 매니저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어제 나왔다면서 왜 방송국에 있지?”
“그, 글쎄? 힙합 더 바이브에 출연하니까 인사차 피디들에게 돌린 거 아닐까?”
“틀어봐.”
“어?”
“한 번 틀어보라고.”
매니저가 어버버 거리자 드레드가 인상을 팍 쓰며 직접 카오디오에 씨디를 넣었다. 곧 1번 트랙인 와이커밍이 흘러나왔다. 드레드는 이미 들었던 노래라 넘겨버리려다가 멈췄다. 공연 때 했던 것보다 비트가 심플했기 때문이었다.
“이거 반주가 좀 다른데?”
“라이브 할 때는 백 밴드가 있으니까 사운드를 좀 풍성하게 잡고, 앨범에서는 심플한 사운드를 추구하는 모양이더라고.”
“그래?”
“응. 그리고 라이브 때는 일렉 사운드로 출력시켰던 베이스 소리가 앨범에는 스탠다드하게 들어가더라. 대신 일렉 기타를 트윈으로 잡았어.”
신나서 떠들던 매니저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888 크루를 칭찬하는 뉘앙스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드레드는 별 말이 없었다.
곧 1번 트랙이 끝나고 2번 트랙인 론리 로드가 나왔다. 드레드는 무등 경기장 공연 순서와 똑같은 트랙 순서를 듣고 ‘이게 얘네 필살기네’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3번 트랙은 광주 업인가.’
마침내 2번 트랙 론리 로드가 끝나고 3번 트랙이 나왔다. 그러나 3번 트랙의 비트는 광주 업 비트가 아니었다.
비트만 바뀐 건가 했는데 앨범 속지에 있는 트랙 리스트를 보니 ‘Crouching Writer’라는 뜻 모를 제목이 보였다.
힙합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드레드였지만, 그래도 3년간 활동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기본은 있었다. 프로듀서들에게 욕을 먹어가면서 배운 힙합 지식도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드레드의 상식 상, 이런 비트가 앨범에 수록될 수는 없었다.
“뭐야 이거?”
비트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드럼과 피아노만 있었다.
드럼도 강렬하기보다는 박자를 맞추는 정도였고, 피아노도 똑같은 패턴의 코드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건 러프하다고 말할 게 아니라, 무성의한 수준이다.
그때 짧은 간주가 끝나고 랩이 시작되었다.
링 위에 올랐지, 리릭시스트 옥타곤
여전히 난 가사에 미친 오타쿠
어머니처럼 가사만 생각해
내가 해야 될 일들은 매일 같애
드레드는 점차 상현의 랩에 몰입했다. 그건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무성의한 드럼과 심플한 피아노.
그 위를 덮는 비트보다 너무 크게 믹싱된 이상현의 목소리.
이건 반찬도 없고, 국도 없이 달랑 밥만 내놓은 트랙이었다. 그런데 사람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드레드는 그리고 그 힘이 가사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노래를 듣다보면 ‘상념’이 끼어들 틈이 생긴다. 아무리 좋아하는 노래를 듣더라도 중간 중간 노래와는 무관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 ‘크로우칭 라이터’라는 곡은 상념을 컨트롤 한다. 처음 10초만 이 노래에 집중하면,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가사가 전달하는 내용이 끝없이 듣는 이의 머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처럼 가사만 생각해.
드레드는 이 부분을 듣고 ‘무슨 소리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바로 가사가 집안일과 리릭(Lyric : 노래 가사)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레드는 계속 이상현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자신도 모르게 가사를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재미있는 표현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서울 용산구에 안살아도 숙명과 가까워
이거 들으면 홍콩가고 돈 써 : 마카오
서울 용산구에는 숙명 여대가 있다.
보통 뿅가는 걸 홍콩 간다고 하고, 홍콩 마카오에는 카지노가 있다.
여름에 상해버린 반찬처럼 ‘음, 식상해.’
욕 대신 랩을 뱉는 병에 걸려, 틱 장애
끝없이 이어지던 랩이 마침내 끝이 났다.
드레드는 정신없이 랩을 이해하다가, 긴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했다.
“형, 이거 몇 분짜리 트랙이에요.”
“오 분이 넘는 걸로 아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어. 그거 백 마디 랩이래.”
“백 마디? 백 마디라고? 백 마디 동안 랩만 한다고?”
“지금 인터넷에서 난리도 아니야. 실시간 검색어에서 내려오질 않고 있더라.”
한국 사람들은 최초나 신기록 같은 감투에 크게 열광하는 성향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100마디 랩.
한국 기네스 등재 가능성.
이러한 문구를 본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궁금함에 크로우칭 라이터를 듣게 되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랩에 관심이 없거나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이들까지 크로우칭 라이터에는 빠져 든다.
오, 랩이 이런 재미가 있었네? 라는 감탄사와 함께 말이다.
드레드는 노래를 멈췄다.
‘권투선수는 체조선수와 영역을 다툴 수가 없어요.’
이상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걸 느꼈다.
드레드가 매니저에게 말했다.
“매니저 형. 숙소 말고 회사로 가요.”
“어? 회사? 이 밤에?”
“아, 가자면 그냥 좀 가요.”
드레드가 짜증을 내자 매니저가 군말 없이 차를 돌렸다. 다행히 유턴을 좀 하면 금방 영동대교로 진입할 수 있는 위치였다.
드레드는 카오디오에서 앨범을 꺼냈다. 한참동안 앨범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드레드가 앨범을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매니저가 다급히 말했다.
“참! 그 씨디 허 피디님이 달라고 하셨는데.”
“뭔 소리야? 방송국에서 줬다면서 왜 달라고 해요.”
“여유분으로 줄 시디는 아니었는데, 조연출이 잘못 껴서 줬나봐. 이번 힙합 더 바이브 방송에 필요하다던데?”
“그래? 그럼 내가 가져다주지 뭐.”
드레드의 말에 매니저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드레드는 모르겠지만 888 크루의 오피셜 부틀렉이 방송국에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저건 발매 2시간 만에 절판된 앨범이다.
게다가 매니저는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자필 사인을 보고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선착순 30명과 무작위로 추첨된 20명은 배송된 앨범 안에 자필 사인이 들어가 있습니다. 자필 사인이 있으신 분들은 앨범과 사인의 인증샷을 올리셔야 합니다. 인증샷과 함께 성함과 전화번호 뒷자리, 우편번호 뒷자리, 티셔츠에 새겨지길 원하는 지역번호를 남겨주시면 티셔츠 제작 후 즉시 배송해드리겠습니다.
888 X 888의 티셔츠를 받을 생각에 부풀어 있던 매니저였다. 그는 티셔츠에 새겨질 지역번호를 현 거주지인 서울 02로 할까, 아니면 고향인 제주도 064로 할까 미친 듯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고민을 드레드가 말끔히 해소해줬다.
‘드레드 이 개자식! 으아! 개새끼!’
매니저는 제주도에서 서울로 상경해 6년 동안 매니저 일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담당 가수를 욕해보긴 처음이었다.
그렇게 말없는 매니저의 절규를 태운 벤이 마침내 회사에 도착했다. 벌써 새벽 3시를 넘어 4시가 다되어가고 있었다.
피곤함보다 절망감에 찌든 매니저가 드레드에게 물었다.
“근데 회사는 왜 온 거야?”
“형은 이제 가요. 난 할 일이 있으니까.”
드레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벤에서 내렸다.
새벽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회사가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드레드가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
스타즈 레코드의 리더 배가, 배상욱은 샤워를 끝내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늘은 한국 힙합 씬이 주목하는 888 크루의 오피셜 부틀렉이 나오는 날이었다.
상현이에게 부탁하면 앨범 정도야 얻을 수 있었지만, 또 뮤지션 사이의 예의라는 것이 그런 게 아니었다.
직접 돈을 주고 앨범을 산 다음에 넌지시 앨범을 샀다는 이야기를 하면 뮤지션들 사이에서 관계가 돈독해지곤 했다.
‘뭐야?’
이미 888 크루의 도매스틱 브랜드 트리플 에잇의 홈페이지에 로그인해있던 배가는 새로 고침을 눌렀다가 화면이 하얀 화면에서 전환되지 않는 것에 의아해 했다.
아무리 새로 고침을 눌러도 도저히 메인 화면이 뜨지 않았다.
‘홈페이지에 문제가 생겼나?’
결국 홈페이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데 걸린 시간이 2시간이었다. 홈페이지 메인에는 888 크루의 사과문이 올라와 있었다.
접속자가 폭증해서 서버가 견디지 못했다는 사과문이었다. 배가는 대수롭지 않게 사과문을 읽다가 가장 마지막 문장을 보고 얼이 빠졌다.
-오피셜 부틀렉 트리플 에잇 물량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보내주신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배가가 재빨리 마우스를 움직여 888 Crew Goods 카테고리의 Album을 클릭했다.
그리고 탄식을 내뱉었다.
888 Crew Official Bootleg - Triple Eight(Sold Out)
‘이런 미친놈들.’
도대체 어떤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발매 2시간 만에 2000장을 매진시킨단 말인가.
배가는 결국 핸드폰을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상현에게 직접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배가는 그의 기대를 깨는 소리를 듣고 절망했다.
-형, 죄송해요. 너무 빨리 매진돼서 증정용으로 만들었던 앨범까지 풀었어요.
그렇게 888 크루의 오피셜 부틀렉은 거대한 흐름을 이끌어 오고 있었다.
< Verse 15. 흐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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