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99화 (99/309)

< Verse 15. 흐름 >

888 크루 멤버들은 시내의 룸 카페에서 힙합 더 바이브의 PD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광주에 카페가 별로 없어서, 조용히 이야기할 룸 카페가 시내에 밖에 없었다.

“결론이 안 나네요.”

준형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피디님이 오면 이야기를 더 들어봐요. 전화로 대충 들었지만 방송 컨셉 같은 게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하니까…….”

888 크루 멤버들은 ‘힙합 더 바이브2’의 출연이 득인가 실인가, 득이라면 얼마나 득인가, 실이라면 어떤 점에서 실인가에 대해 토론했다. 그러나 누구도 쇼 비즈니스 세계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했기에, 명확한 결론이 날 수가 없었다.

연예계에 대해 잘 모르긴 상현도 마찬가지였다. 증권가 찌라시를 통해 들었던 오만가지 루머와 소문을 팩트로 보긴 어려웠으니까.

물론 상현은 힙합과 매스미디어의 결합이 어떤 일을 불러 오는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한국 힙합 씬을 완전히 바꿔버렸던 <쇼미더머니>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다르잖아.’

쇼미더머니는 힙합이 나름의 문화적 위치를 획득한 이후인 2012년에 탄생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힙합이란 문화가 태동하는 2005년이었다.

래퍼들의 마인드도 다르고, 사회적 인식도 다르고, 래퍼의 풀도 다르다.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전부 다르다.

그래도 I'm hot. spittin' my rhyme

난 2500의 아이들이 알아보는 underground king.

이센스가 2007년 하반기에 냈던 믹스테잎 ‘Blanky Munn's Unknown Verses’의 ‘3 Mc's Part.2’란 곡에서 쓴 가사였다.

이센스의 견해가 정확한 수치적 증거는 될 수 없겠지만, 그는 한국 힙합의 양적팽창이 시작되었던 2007년의 ‘언더그라운드 래퍼’를 2500명으로 본 것이었다.

그러니 2005년인 지금 쇼미더머니를 개최한다면 그 참가자가 오백 명이나 될지 모르겠다.

‘게다가 힙합 더 바이브는 악마의 편집 같은 것도 없이 순수했단 말이지.’

쇼미더머니는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힙합 더 바이브는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은 프로그램이었다.

‘이게 과거에도 있었던 일일까? 기획 단계에서 무산이 난 것일까?’

어쩌면 방영을 했는데 화제성이 거의 없어서 상현이 몰랐던 것일 수도 있었다. 본래 이맘때는 준형을 제외한 모든 주변인들에게 선을 긋고, 미친놈처럼 공부 만했던 시절이니까.

과거에 있던 일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있었지만, 상현은 미래가 바뀌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차피 그는 불확실 속에서 살기 위해서 음악을 시작했다. 또한 888 크루의 등장과 선전 자체가 미래를 바꾸는 트리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오히려 트리거(방아쇠)가 아주 강력하길 바랬다. 한국 힙합씬의 황금기를 몇 년은 앞당길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상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캐쥬얼한 청바지에 라운드 티를 입은 허태진 피디가 카페에 도착했다. 그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888 크루 맞으시죠?”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케이엠넷 피디인 허태진이라고합니다.”

허태진이 재빨리 8개의 명함을 돌렸다.

“어우, 광주는 정말 머네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겠네요.”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허태진은 커피가 오면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했다. 그러자 888 크루는 그새를 못 참고 떠들기 시작했다. 얼마 전 발매했다는 믹스테잎 이야기가 주를 이뤘고, 공연 이야기도 간간히 나왔다.

허태진은 그런 888 크루를 조용히 관찰했다.

피디가 왔는데도 그를 의식하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역시 자신만만한 친구들이네.’

사실 허태진은 888 크루에게 서울로 올라와서 프로그램에 관한 미팅을 갖자고 말했었다. 그러자 이상현이 말했다.

‘저희가요? 피디님이 내려오시는 거 아니었나요?’

요즘 새 프로그램을 준비하느라 바쁘다고 말하니, 그럼 다음에 시간되면 미팅을 하잔다.

허태진은 이런 888 크루의 태도에서 당당함을 느꼈다. 이상현의 말투는 전혀 건방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어투였다. 보통 언더그라운드 팀들이 방송 섭외를 받으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오는 것과는 좀 달랐다.

888 크루에게 ‘힙합 더 바이브’는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었다. 그들은 목을 매지 않는다. 그냥 선택지가 하나 더 생겼으니 궁금해 할 뿐이다. 허태진은 888 크루에 대해 조사를 하면 할수록 ‘힙합 더 바이브2’에 꼭 어울리는 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나왔습니다.”

주문했던 커피가 나오고, 888 크루와 허태진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허 피디는 888 크루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그는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이상현의 통찰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간부진들 앞에서 프리젠테이션 하는 기분이 들만큼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제가 알기로 힙합 더 바이브는 시청률이 안 나와서 종영됐죠?”

“네, 맞습니다. 매니아층의 지지는 엄청났지만 실제 시청률은 극악이었죠. 심지어 본방인 화요일 10시 방송보다 재방송인 토요일 새벽 12시 방송의 시청률이 더 잘 나왔으니…… 말 다한 거죠.”

“그런데도 시즌 2를 계획하셨다는 것은 포맷의 변화가 있다는 말인가요?”

허태진 피디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상현 씨는 미국 드라마를 좋아하시나 봐요? 보통 시즌이란 말은 잘 안 쓰는데.”

“아…… 그냥 가끔 보죠.”

“아시다시피 저희 프로그램은 정보전달을 위주로 하는 프로그램이었죠. 그러다보니까 힙합 팬이 아닌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기가 힘들었고요.”

본래 힙합 더 바이브는 각 15분짜리의 4개 포맷으로 한 시간을 채우는 방송이었다.

해외 힙합 음악 소개. 국내 힙합 음악 소개.

B-Boy배틀. 랩 배틀.

새로 발매된 국내 힙합 음악이 없을 때는 음악소개 대신 공연을 편성하기도 했었다. 랩 공연만 편성한 것은 아니었다. R&B 싱어도 나왔고, DJ도 나왔고, 비보이 팀들도 나왔다.

“이번에는 시청자 타겟을 더 넓게 잡고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힙합 팬이 아닌 이들도 관심을 가질 수 있게요.”

“어떻게요?”

“우선은 힙합이란 문화를 다루기보다는 포커스를 랩 쪽으로만 잡을 생각입니다. 비보이 배틀 같은 경우는 처음에는 자극적이지만 몇 번 진행하면 퍼포먼스가 비슷비슷해보여서 사람들이 금방 질려하더군요. 비보이들이 고생은 정말 많이 하는데 말입니다.”

888 크루 멤버들은 허태진이 설명하는 ‘힙합 더 바이브 2’의 프로그램 구성에 귀를 기울였다.

힙합 더 바이브 2는 컴피티션을 메인으로 내세우는 방송이었다.

허태진 피디는 지난 2년간 힙합 더 바이브 1을 이끌며 시청률을 견인하기 위해 다양한 포맷을 실험했었다. 프리스타일 잼도 했었고, 해외 뮤지션을 초청한 적도 있었다.

그 중 가장 인기가 많고 화제를 모았던 포맷은 ‘한국어로 싸우는’ 랩 배틀이었다. 싸움구경이 재미있는 것처럼, 랩 배틀은 보는 이들에게 묘한 쾌감을 줄 수 있었다. 경직적인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기존의 랩 배틀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공감대의 결여였다.

시청자가 공감할만한 백 스토리 없이 단순히 '초청된 래퍼'들이 랩 배틀을 벌이는 포맷은, 랩을 좋아하지 않아 사전정보가 없는 이들에게는 흥밋거리가 되지 못했다. 심리적으로 응원하는 쪽이 없기 때문이었다.

‘백 스토리를 보여주면 어떨까? 음악을 만드는 과정도 보여주고, 팀들끼리 만나는 과정도 보여주고. 그러다보면 자연적으로 시청자가 응원하는 쪽이 생기지 않을까?’

허 피디는 이러한 생각으로 ‘스토리가 있는 래퍼들의 경쟁’을 힙합 더 바이브 2의 컨셉으로 잡았다.

“몇 팀이 참가하는 경쟁인가요? 너무 많으면 긴장감이 없을 텐데요?”

“네 팀이 나와서 경쟁을 하고, 4주 동안 방송됩니다. 다만 실제로 촬영을 하는 기간은 6주입니다.”

포맷은 간단했다. 4개의 팀이 섭외되어서 경쟁하는 것이었다.

1주 때는 각 팀이 공연을 해서 매력을 보여준다. 2주차에는 1팀이 탈락해 3팀이 남고, 3주차 때도 1팀이 탈락해 2팀이 남는다.

그리고 4주차 때 결승전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한 번 출연한 팀도 또 나올 수 있게 할 예정입니다. 네 번의 포맷이 돌면 우승팀이 네 팀이 나오니까, 왕중왕 전을 할 수도 있겠죠.”

“크, 왕중왕 전을 네 번하면 황제 전을 할 수도 있겠네요. 황제 전을 네 번하면 뭐지?”

“초 싸이언 전?”

준형과 인혁의 농담을 들으며 상현이 생각에 잠겼다. 이야기만 들으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완전히 성공할 것 같지도 않았다.

“공연이 10분이라고 하셨죠?”

“결승전은 15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4팀이 다나오는 1, 2주차 때는 공연시간 40분을 제외하면, 방송 시간이 20분밖에 없잖아요? 고작 20분으로 시청자들을 편가를 수 있는 백 스토리를 보여줄 수 있을까요?”

허태진은 상현의 날카로운 질문에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광주까지 먼 걸음을 한 보람이 있다.

“두 가지 방안이 있습니다. 우선은 탈락자가 없는 1주차 때는 공연 시간을 줄이고 각 팀의 매력에 대해 어필할 생각입니다. 가능하면 1시간 30분짜리 방송으로 편성하고 싶고요.”

“두 번째 방안은요?”

“시작부터 시청자들의 편을 갈라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섭외가 확정된 팀에 코드네임이 있습니다. 코드네임은 팬층도 안티팬층도 아주 확고한 팀이죠.”

코드네임이라는 말에 888 크루의 8명이 모두 눈썹을 꺾었다.

“그리고 지금 888 크루와 같이 섭외중인 언더그라운드 팀이 스타즈 레코드입니다. 스타즈 레코드는 오랫동안 한국 힙합에 헌신한 팀이죠. 고정 팬층도 많고.”

“그럼 저희한테 내리는 평가는 뭐에요?”

상미의 질문에 허태진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말했다.

“888 크루가 언더그라운드에서 인기가 많은 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죠. 게다가 화제성은 엄청난데 이미지 소비는 별로 없었고요. 또한 랩을 잘 모르는 대중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포텐셜을 가진 팀입니다. 여덟 분의 개성이 뚜렷하고 래퍼들의 랩 스타일도 전부 다릅니다. 또한 외모도 어디 가서 빠지는 외모는 아니죠.”

“스타즈 레코드와 저희 888 크루, 그리고 코드네임을 섭외 중이라면 나머지 한 팀도 대중적으로 유명한 팀이겠네요. 이 대 이로 편 가르시려는 거죠? 언더 대 오버?”

“맞습니다. ‘바운스 라임’ 팀이 최종 물망에 올랐습니다.”

바운스 라임은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3인조 혼성 힙합 그룹이었다. 코드네임 정도는 아니지만, 실력이 없다고 욕을 먹는 건 마찬가지인 팀이었다.

하지만 상현은 바운스 라임이나 코드네임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스타즈 레코드가 섭외됐다는 소리에 출연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스타즈 레코드가 좋아서? 같이 있으면 편해서? 함께 방송해보고 싶어서?

물론 그런 마음도 있다.

하지만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

스타즈 레코드는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최전방에 서있는 베테랑들이다. 몇 년 동안 정상을 지켜온 팀.

그에 반해 888 크루는 새롭게 등장한 변화의 바람이었다. 새로운 방법론과 패기로 무장한 신인들.

그러면 두 팀 중 어느 팀이 더 잘할까?

‘한 번 붙어보고 싶다.’

Hommie Vol.1때는 888 크루가 판정승을 거뒀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랩으로 이겼다기보다는 퍽 더 쇼 비즈가 가지고 있는 화제성의 승리라고 보는 게 맞았다.

‘누가 이길까?’

상현은 이러한 투쟁심이 자신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라 확신했다. 아마 ‘888 크루 섭외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스타즈 레코드 형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크루 멤버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눈치였다. 다들 눈이 번쩍번쩍 하는 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였다.

< Verse 15. 흐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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