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15. 흐름 >
정규 앨범 제작을 위한 녹음실은 대여료가 엄청나게 비싸다. 그렇기 때문에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은 충분히 가이드를 연습하고, 디렉터와 합을 맞춘 뒤에 본 녹음에 들어가곤 했다. 그래야만 녹음에 소요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은 레코딩 리허설이라고 불렸다.
부스에 들어간 상현이 랩을 시작하자, 연습실이 조용해졌다. 김웅각도, 최태일도, 하연도 가만히 상현의 랩에 집중했다.
“좋다.”
“그러니까요. 가이드보다 훨씬 더 좋네요. 이러다가 제 보컬이 완전 묻히는 거 아니에요?”
인디 키드의 보컬 최태일이 앓는 소리를 했다. 장난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진심이었다. 이상현이라는 친구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오늘 상현이 피쳐링 하는 곡은 ‘오늘이 지나면’이라는 제목을 가진 노래였다. ‘오늘이 지나면’은 보컬인 최태일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곡이었다.
최태일에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10대 때도, 20대 때도 변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30대가 되자 뭔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돈, 안정된 직장, 결혼 등등의 문제가 현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최태일은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조금씩 떠났고, 결국은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별했다. 이별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십년을 넘게 사귄 연인에게는 사랑보다 끊기 힘든 정이란 놈이 있었으니까.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늘이 지나면’은 마음은 떠났지만 정이 남아서, 혹은 연민 때문에 헤어지자는 말을 못하는 연인을 보내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상현이 할 일은 2절의 16마디를 채우는 것이었고.
‘벌써 4년 전 이야기네.’
어두운 방안에서 내일 연인에게 해줄 말을 정리하는 남자. 그것이 상현이 가사로 쓸 내용이었다.
처음 상현에게 랩 피쳐링을 제의할 때만해도 최태일은 약간의 불안감이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랩을 잘하고, 음악을 잘한다고 해도 가사의 깊이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18살의 고등학생이, 좋아하지만 현실적인 압박 때문에 연인을 보내주는 마음을 알까?'
그러나 최태일은 상현이 보내온 가이드를 듣고서 깜짝 놀랐다. 당시에 느꼈던 그의 마음을 너무나 잘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스스로가 쓴 가사 같았다.
아니, 그가 쓸 수 있는 가사보다 훨씬 좋았다.
‘천재란 존재하는구나.’
최태일은 묘한 표정으로 가이드에 열중인 상현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많이 부럽다. 가진 바 재능도 부럽지만, 그 재능이 개화한 나이가 정말 부럽다. 최태일은 스스로 ‘나 음악 잘한다’라고 확신한 나이가 33살이었기 때문이었다.
최태일은 상현의 랩을 들으며, 조용히, 오랜만에, 떠나간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
미안,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거
그만둬야 할 때가 왔어
열아홉 아직 추운 2월쯤
내가 너한테 반했고 그건 아직 유효해
널 나란 틀 안에,
가두고 싶었지만 꽤 많이 틀렸네.
좋았어, 널 생각하는 걸로
이제 포기해 내가 어렵게 내린 너와 나의 결론
물론 난 말해, 네 잘못 따위
전혀 없어 다만 1 곱하기
0과 100 곱하기 0은 같은 0이지
내 감정이 몇이든 네 속에 난 0이지
병이지 가사 쓰는 것도,
한동안 너 때문에 사랑이야기만 썼고
난 다시 원위치로
근데 속에 꽉 찬 마음병은 누가 치료, 할까
***
하연은 모니터링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상현의 목소리에 깊이 빠져들었다. 상현의 목소리는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중저음의 묵직한 목소리에서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하연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하연은 단단하면서도 날카로운 상현의 목소리가 정말 좋았다.
‘상현이는 대학에 갈 마음이 없을까?’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지만, 하연은 상현과 함께 예대에 가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했었다. 함께 수업을 듣고, 함께 과제를 하고, 함께 시험공부를 하는 시간들.
‘상미 때문에 안 되겠지? 상미가 졸업할 때까지는 광주를 떠날 마음이 없다고 했으니까.’
상미는 모든 크루원들을 좋아했지만 그 중에 유독 하연을 더 좋아했다. 집이 가까운 이유도 있었지만 그런 걸 떠나서 그냥 서로를 잘 이해했다.
하연은 그게 같은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자신도 엄마를 여의었기 때문이었다. 크루원들에게 말해야지, 말해야지하면서도 말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티비에 많이 나오면 절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를 많이 볼 수 있잖아요.’
888 크루가 처음 모였던 카페에서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지금 하연의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녀의 친아버지는 방송국 주재원이셨는데 사고로 돌아가셨고, 엄마 혼자서 자신을 키웠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아버지를 만나서 재혼을 한 것이고.
아버지는 그녀를 정말 친딸처럼 대해주셨다. 그러나 문제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였다. 아버지의 문제라기보다는 집안 어른들의 문제.
아직 마흔 밖에 되지 않은 한참 젊은 나이의 아버지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신 것이었다. 사실 아버지가 결혼을 하는 것도 문제긴 했다. 그렇게 되면 새엄마는 하연과 정말 아무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하연은 도저히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자신 때문에 정말 많은 것을 포기하셨는데, ‘대학은 가야지?’라는 부탁을 거부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또한 하연은 명예욕과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를 천덕꾸러기 취급하는 집안의 어른들에게, 자신이 아버지의 보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녀가 연예인이라는 꿈을 꾸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상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
하연은 한참동안 녹음을 하는 상현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상현의 레코딩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하연이 레코딩 리허실이 시작했다. 둘 다 단단한 발성과 안정적인 랩톤을 가지고 있었기에, 레코딩 리허설에 소요되는 시간은 채 2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와, 다른 래퍼들이 니들처럼 스무스하면 좋겠다. 그럼 진짜 편할 텐데.”
“스타즈 레코드 형들이요? 그 형들도 저희 못지않을 것 같은데요?”
“우리 크루 애들이야 잘하지. 걔들 말고 내가 디렉 알바할 때 만나는 별의 별 래퍼들.”
우연우와 상현, 하연이 잡담을 나누며 본 녹음실로 이동했다. 10월 말로 예정된 Hommie Vol.2 이야기가 가장 많았다. 888 크루는 해야될 일이 너무 많아서 Vol.2는 참석할 수가 없었고, 연말에 예정된 Vol.3에 참석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너네 곧 믹스테잎 나온다는 소문이 있던데?”
“내일 모레 1차 믹스테잎이 나올 거예요. 2차 믹스테잎은 보름 정도 뒤에 나오고요.”
“일차는 뭐고, 이차는 뭐야?”
“일차는 클럽 호미에서 했던 곡들 위주로 모았어요. 그 전에 공연했던 곡들도 포함되고. 그러니까 이미 공개한 트랙들에다가 몇 트랙을 묶어서 만든 거예요.”
“그럼 이차는 완전 브랜 뉴 트랙들이야?”
“네.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 트랙들이 많아요.”
“너 솔로 트랙도 있어?”
“있어요. Crouching Writer라고 죽이는 거 하나 있어요. 제가 이 곡으로 한국 힙합 판을 흔들 겁니다.”
상현이 시시덕거리며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나 듣는 입장에서는 완전히 농담으로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뭔데? 무슨 컨셉인데 그래?”
“안 알려 줄 건데요?”
100마디의 랩은 직접 들어야만 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크로우칭 라이터가 완성되고 888 크루원들은 상현에게 미친놈이라고 말했으니까.
“오빠, 그거 들으면 되게 화나요.”
“화가나? 왜?”
하연의 말에 우연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지금 만들어두었던 가사들을 다시 쓰고 싶어져요. 저희 원래 1차 믹스테잎 진작 공개하고, 2차 믹스테잎도 공개했어야 될 시간인데, 크루 멤버들이 크로우칭 라이터 듣고 가사 다시 쓴다고 시간이 좀 걸린 거예요.”
“아, 뭔데! 완전 궁금하다.”
상현은 절대 알려주지 않았고, 궁금함에 몸부림치던 우연우는 보름 뒤에 들을 수 있다니 참아보기로 했다.
레코딩 리허설을 끝낸 그들은 김웅각의 차를 타고 녹음실로 이동했다. 녹음실은 엄청나게 좋았다. 사운드 엔지니어도 2명이나 있었다.
“여기 콘덴서 마이크 엄청 예민해. 혹시 방귀뀔 거면 화장실 가서 꿔라. 아무리 몰래 뀐다고 해도 피시시 하는 소리가 잡히더라.”
“오빠!”
“내가 장 건강까지 신경 쓰는 프로듀서야. 대단하지 않냐? 진짜 이런 프로듀서 없다. 혹시 888에서 날 영입할 생각이라면 고민은 해보지.”
우연우의 농담과 함께 본격적인 레코딩이 시작되었다. 전문적인 스튜디오에서 하는 첫 녹음이기 때문에, 상현은 잠시 헤맸다.
“형, 비트 조금만 더 키워주실 수 있어요?”
“왜? 비트가 작아?”
“아뇨, 비트는 적절한데 스네어가 너무 들릴 듯 말듯 한데요?”
“그거 일부러 그렇게 한 거야. 기타 소리를 최대한 리얼하게 살린 거라서 드럼 사운드들은 고스트 노트 수준이야.”
“그래도 녹음할 때는 듣고 해야 될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인 우연우가 스네어 볼륨을 키웠다. 상현이 깜짝 놀랐다.
“어, 뭐야. 형 스네어 볼륨만 따로 조절할 수 있어요?”
“스네어만 되겠냐?”
“와, 씨. 뭐지? 신세계인데?”
상현이 호들갑을 떨자 가만히 듣고 있던 엔지니어 두 명이 웃음을 지었다. 인디 키드면 한국 뮤지션들 사이에서는 먹어주는 이들인데 갑자기 왜 뜨내기 고등학생 래퍼를 데려왔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웃음이 놀람으로 바뀌는 데는 상현이 제대로 16마디를 뱉는 45초면 충분했다.
결국 상현이 녹음을 끝내는데 걸린 시간은 30분이 넘지 않았다. 오히려 더블링과 백 사운드를 쌓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지, 실제 벌스의 녹음시간은 10분 남짓이었다.
“수고하셨어요.”
상현이 녹음 부스에서 나왔다. 소리가 너무 좋아서 조금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김운철 교수의 연구실에 구비된 녹음 장비도 진짜 엄청 좋은 거였는데, 여기랑 비교하면 여기가 더 낫다.
“형, 지금 여기처럼 장비 다 맞추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요?”
“이 정도면 장비를 맞추는 것보다 대여하는 게 훨씬 싸게 먹힐 겁니다.”
우연우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엉뚱한 사람에게서 나왔다. 처음부터 쇼파에 앉아있던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장비란 게 계속 진화하잖아요? 1년만 지나도 사운드가 뒤쳐진다는 생각이 드는데 개인 레코딩용 장비를 계속 업그레이드 하는 건 부담이죠. 그렇게 따지면 결국 스튜디오를 대관하는 게 더 싸게 먹히거든요.”
상현은 그냥 스태프인 줄 알았던 남자가 말을 걸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반가워요. 저는 러쉬 엔터테인먼트의 캐스팅 디렉터를 맡고 있는 이태석이라고 합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이상현이라고 합니다.”
상현은 이태석이 건네는 명함을 공손하게 받아서 지갑에 넣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뭐야?’
이태석이 잠시 당황했다. 러쉬 엔터는 규모가 거대한 회사는 아니지만, 어린 친구들에게 어필하는 가수들을 보유한 회사였다. 업계 내 평판도 좋았고, 얼마 전에는 인디 키드와 계약을 맺기도 했었다.
그런 회사의 캐스팅 디렉터가 말을 걸었으면 먼저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정상이었는데, 너무 조용하다.
‘요즘 섭외가 많이 와서 뒷짐 한 번 지겠다, 이건가? 아니면 한 번 재보고 싶었나?’
이런 친구들에게는 또 방법이 있다. 오히려 이쪽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뒷짐을 풀고 말을 걸게 되는 것이다.
이태석은 쇼파에 기대며 이상현이 하는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예쁘장하게 생긴, 신하연이라는 래퍼가 녹음실로 들어갔다. 신하연이 잠시 헤매자, 이상현이 녹음실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조언을 했다.
마침내 감을 잡은 신하연이 본격적인 녹음을 시작하자, 이번에는 우연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관심 없는 척을 하는 건가?’
제법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 친구다. 하긴, 그러니까 그런 무대와 음악을 만들 수 있었겠지. 하지만 곧 뒷짐 풀고 다가올 것이었다.
이태석은 한참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이상현이 쇼파에 앉았다. 이태석은 드디어 이상현이 뒷짐 진 손이 슬슬 저려왔다고 생각하며 대화를 이어갈 흐름을 생각했다.
아니다 다를까, 이상현이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잘하죠?”
“네? 아, 잘하네요.”
“그쵸? 신하연이라고, 저희 크루 래퍼에요. 엄청 잘해요.”
끝이었다.
‘아니, 이 자식은 손에 수갑을 찼나?’
< Verse 15. 흐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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