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95화 (95/309)

< Verse 15. 흐름 >

Verse 15. 흐름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 하지만 그 공평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 지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린 문제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888 크루는 그 누구보다 알차게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엄청난 수의 일들이 그들에게 닥쳐왔기 때문이었다.

“민호 형, 저번에 만들었던 다른 디자인 있잖아요. 회색으로 된 거.”

“어, 그거 왜?”

“그거 뉴에라로 한 번 만들어볼까 해서요.”

“뭐? 절대 안 돼! 그거 완전 가이드 버전이란 말이야. 그걸 상품으로 내놓았다가는 전국의 힙합 팬들이 날 비웃을 거야!”

익숙한 우민호의 징징거림에 상현이 ‘우민호 전용’으로 작업실에 마련된 디자인 용 컴퓨터를 가리켰다. 상현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쭉 돌려니 컴퓨터 바탕화면에 적힌 어떤 문구를 볼 수 있었다.

-그냥 좀 해요, 형

멋진 궁서체로 새겨진 글자가 우민호의 눈에 아프게 파고들었다.

우민호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격렬히 저항했다.

아직 채색도 끝나지 않았고, 레이아웃도 손봐야하고, 집어 넣어야할 이펙트도 산더미다! 지금은 디자인이라기보다는 스케치에 가까웠고, 저게 상품으로 나오면 스케치라기보다는 쓰레기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아니 싫다기보다는 좀 기다려. 내가 일주일 안으로 완성해서 줄게.”

“형, 이건 완성되지 않은 느낌이 멋있다니까요? 디자인이 꼭 말끔할 필요는 없잖아요? 이중섭의 황소 몰라요? 그렇게 터프한 터치도 멋있는 거예요!”

“아, 안 돼. 날 설득하지 마!”

한숨을 푹 내쉰 상현이 모니터 위의 벽에 붙어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종이에는 김환이 손수 적은 문장이 떡하니 붙어 있었다.

-닥치고 해!

우민호가 입을 앙 다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마다 상현은 종이를 가리켰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결국 우민호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악덕 사장!”

광주 타이거즈의 공연이 끝나고 888 크루에게 일어난 변화는 정말 많았다.

500명이 조금 넘던 싸이월드 크루 클럽의 가입자 수가 2000명까지 뛰었다거나, 길을 다니면 꽤 많은 사람들이 알아본다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보다 훨씬 중요한 변화들이 있었다.

‘우선은 트리플 에잇이지.’

얼마 전부터 판매를 시작한 도매스틱 브랜드 트리플 에잇(Triple Eight)의 ‘日日日 X 日日日’ 상품 판매량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상현은 아직 굿즈 시장이 활성화가 되기 전이라, 1년을 잡고 상품을 팔아도 천 개를 팔면 아주 잘판 것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상현의 그런 생각은 아주 보기 좋게 물 건너갔다. 물을 건너간 정도가 아니라, 대한해협을 넘어 저 멀리 지중해까지 넘어갔다.

현재 트리플 에잇에서 취급하는 상품은 총 4개. 4개의 상품은 판매를 시작하면서 각각 200개의 재고를 가지고 출발했었다. 그러나 지금 상품에 표시된 문구는 솔드 아웃(Sold Out)이었다.

갑자기 힙합 팬들의 지갑이 두둑해진 것은 아니었다.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였지만 여전히 한국 힙합 팬들의 수는 적었으니까. 이러한 품절 상태가 일어난 것은 888 크루에게 힙합과 교집합이 없는 다른 팬층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바로 야구팬들이었다.

‘한광수 선수 유니폼 팔린 걸 생각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긴 하지만.’

상현을 비롯한 888 크루 멤버들은 무등경기장에서 공연을 하며 ‘日日日 X 日日日’의 티셔츠를 입었었다. 공연이 낮인 관계로 야광으로 새겨진 062 X RAP는 보여주지 못했지만 말이다.

L&S 멤버들 역시 옷을 맞춰 입었었다.

(사진 : 작가의 말에 첨부)

바로 LNS X 888이 새겨진 티셔츠였다.

이것은 가족과도 같은 밴드 L&S를 위해서 상현이 진작부터 준비했던 것이었다.

티셔츠가 멋지게 보였는지, 경기 직후 한광수 선수가 자신의 유니폼을 들고 상현을 찾아왔다. 888 크루의 티셔츠를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상현은 기꺼운 마음으로 티셔츠를 선물했다. 그리고 며칠 뒤, 한광수 선수가 자신의 미니홈피에 ‘광수 업!’이라는 문구와 함께 888 크루의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업로드했다.

‘크, 이 사람 등발 죽이네.’

한광수의 덩치가 얼마나 컸던지 트리플 에잇의 최대 사이즈인 더블엑스라지(XXL)가 약간 작게 느껴졌다. 그래도 제법 잘 어울렸다.

이게 바로 야구팬들이 888 크루의 상품을 구매하기 시작한 경로였고, 상현이 재고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이유였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오늘은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에요.’

상현은 어느 날 저녁에 크루원들을 모아놓고 운을 뗐다. 그가 하려는 말은 돈에 관련된 것이었다.

상현은 돈에 관한 일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888 크루는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지만, 철옹성 같던 우정도 돈이 얽히면 손쉽게 깨질 수도 있으니까.

상현의 이야기를 들은 크루원들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의견을 말했다.

결과적으로는 ‘30%, 60%, 10%’가 되었다.

이 비율은 크루가 다 함께 번 돈에만 해당이 되고, 개인적인 피쳐링이나 단독 공연의 페이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우선 30퍼센트는 무조건 크루 이름으로 된 통장에 넣기로 했다. 뮤직비디오를 찍거나, 공연장을 대관하거나, 앨범을 낼 때를 대비한 비용이었다. 홈페이지 관리 비용이나 굿즈 제작비용, 크루원들의 경조사에도 쓰일 예정이었다.

60퍼센트는 사람의 수대로 나누는 것이었다. 만약 1000만원의 수익이 난다면 600만원을 7명이서 나눴다. 멤버는 8명인데 왜 7명이 되었냐면,  상미가 한사코 수익 배분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곡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공연을 하는 것도 아닌데? 받으면 안 돼.’

멤버들이 상미를 설득했지만 상미는 요지부동이었다. 대신 상미는 페이를 받을 때마다 자신에게 맛있는 것을 사줄 것을 요구했다.

나머지 10퍼센트는 상현에게 가는 돈이었다. 멤버들은 우스갯소리로 그것을 ‘에이스의 품위 유지비’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사실 10퍼센트는 작업실 유지비였다.

크루원들은 예전부터 멤버들이 돈을 각출해서 작업실 유지비를 내야한다고 주장했었다. 상현이 극구 거부했지만 말이다.

‘십 퍼센트면 너무 많지 않아요?’

상현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앞으로 888 크루가 얼마를 벌지는 모르겠지만, 일억을 벌면 천만 원이고 십억을 벌면 일억이다.

하지만 멤버들은 이구동성으로 10퍼센트도 너무 작다고 말했다. 그동안 상현이 티내지 않고 해온 크루를 위한 노력들과 혼자서 부담해온 작업실 유지비에 비하면 말이다. 또한 10퍼센트 안에는 수익배분을 극구 거부하는 상미를 위한 마음도 있었다. 상현의 수익이 곧 상미의 수익이었으니까.

888 크루 멤버들은 이제 모두 상현의 가정사를 알고 있었다. 본래부터 짐작하기도 했고, 상현이 직접 말하기도 했다. 때문에 멤버들은 항상 상미에게 많은 신경을 쏟았다. 상현이 집에 없는 날이면 꼭 멤버 중 한 명이 찾아와서 상미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상미에게는 4명의 오빠와 2명의 언니라는 대가족이 생겨있었다.

마지막으로 일어난 변화는 ‘섭외’였다.

888 크루에게 들어오는 공연 섭외가 엄청나게 많아졌다. 광주에 있는 행사란 행사는 거의 전화가 온 것 같았고, 타 지역에서도 꽤 많은 섭외가 들어오고 있었다.

물론 클럽 호미의 공연이 끝나고도 제법 많은 섭외가 들어왔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냥 찔러보는 식의 섭외가 많았다. 얘들의 가격이 얼마인지, 어느 지역까지 커버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시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 들어오는 섭외는 달랐다. 888 크루는 더 이상 ‘얘네 괜찮나? 한 번 불러볼까?’라는 포지션의 팀이 아니었다. 아마추어로 분류되는 팀도 아니었다.

Show & Prove. 보여주고 증명하라.

그들은 만이천 명이 지켜보는 무등 경기장에서 그들의 가치와 희소성을 증명했다. 덕분에 공연대행사나 무대제작업체들에게 888 크루는 대단히 매력적인 존재가 되었다.

회사가 낀 연예인들보다는 싸고, 실력은 그보다 더 믿을 수 있는 팀. A급 연예인으로 축제의 구색을 맞춘 다음 바로 손이 가는 팀.

‘이게 도대체 얼마야?’

상현은 너무 많은 공연 섭외가 들어오자, 한 번 계산을 해봤다. 섭외가 들어온 모든 공연을 한다고 가정하면 그들이 벌게 될 돈을 말이다.

계산 결과는 5000만원이 넘었다. 날짜가 중복되는 것들이 태반이라서 모든 공연을 할 순 없겠지만, 뿌듯한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간 규모의 연예 기획사 3곳에서 전화가 왔었고, 4명의 유명 가수에게서 피쳐링 제안이 왔었다. 심지어 지역 방송국에서 방송 출연 섭외가 오기도 했었다.

상현은 섭외를 모두 고사했다. 바쁘기 때문도 있었지만, ‘우리가 이렇게 몸소 섭외를 해주니 감사히 받아들여라.’라는 식의 어이없는 전화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섭외를 받으며 많은 어이없는 일을 겪었지만, 가장 어이없는 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코드네임이 888 크루를 섭외하려고 한 일이었다. 곧이어 나올 코드네임의 미니 앨범에 888 크루와의 콜라보레이션 곡을 집어넣고 싶다는 것이었다.

섭외는 코드네임의 리더인 드레드가 상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했다. 그러나 딱 들어도 옆에서 누군가 시켜서 억지로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저번 일은 미안했다.”

똥 씹은 듯한 목소리로 드레드가 말하자, 핸드폰을 통해 ‘존댓말로 똑바로 안 해?’라는 성난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기가 꺾인 드레드가 다시 말했다.

“저번 일은 저희가 실수 한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곧이어 드레드는 뭔가를 보고 읽고 있다는 티를 내며, 888 크루와 함께 작업을 하고 싶다는 장황한 멘트를 늘어놓았다. 곡의 컨셉도 설명했고, 만나서 직접 이야기하자는 말도 했다. 누가 들어도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한 목소리로 말이다.

상현은 처음에는 통쾌함을 느꼈다. 하지만 전화를 이어갈수록 통쾌함은 사라지고, 코드네임이 아주 작게 느껴졌다.

아무리 망나니처럼 굴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해도 이들은 결국 시스템 안에 속한 존재였다. 쇼 비즈니스(연예계)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 쇼 비즈니스 적인 상품성이 사라지면 버려질 존재. 그러면서도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존재.

그에 반해 888 크루는 정말 자유로운 팀이었다. 그들은 시스템에 속하기보다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팀이었고, 비 더 언더그라운드라는 가치 내에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었다. 888 크루와 코드네임은 태생부터 다른 존재였다.

문득 더 게임(The Game)의 마이 라이프(My life) 가사가 떠올랐다.

We are not the same, I am a Martian

우린 다른 인간, 난 화성인이야

상현은 굴욕감이 가득한 드레드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코드네임이 싫었고, 미주를 위협한 것을 용서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888 크루가 추구하는 이상향은, 코드네임이 흔적조차 남길 수 없는 곳이었다.

‘콜라보레이션은 거절하겠습니다. 끊겠습니다.’

상현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다시는 코드네임과 얽힐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상현의 착각이었다.

“힙합 더 바이브요?”

-네. 알고 계시죠?

“네, 당연히 알고 있죠. 그런데 그거 종영하지 않았나요?”

-이번에 KM이랑 통합되면서 정리했던 몇몇 프로그램들을 새롭게 구성하게 되었거든요. 그 중에 힙합 더 바이브도 있고요. 섭외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멤버들이랑 상의를 좀 해봐도 될까요?”

-그럼 제가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힙합 더 바이브(HipHop the Vibe)는 2000년대 초에 엠넷에서 최초로 시작했던 힙합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TV에서는 힙합을 다루는 프로그램은커녕 컨텐츠조차 전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방영이 시작되자마자 힙합 매니아들의 큰 지지를 받았었다.

게다가 힙합 더 바이브는 꽤 충실하게 언더그라운드 힙합에 대해 다루었었다. 에픽하이, 다이나믹듀오, 가리온, 리쌍 등등의 데뷔전 모습도 여기서 엿볼 수 있었다.

때문에 힙합 더 바이브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의 음악적 성취에 대한 일종의 척도가 되었다. 타블로는 인터뷰에서 힙합 더 바이브에 나가기 위해서 음악을 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상현도 과거에는 화요일 저녁 10시만 되면 티비 앞으로 달려갔었다. 본방을 챙겨보기 위해서였다.

힙합 더 바이브는 2004년에 KM과 M.NET이 통합을 하면서 종영했었다. 시청률은 저조했지만 매니아층의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힙합 팬들이 종영을 아쉬워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힙합 더 바이브가 다시 시작하려고 하고 있었다. 888 크루를 섭외하면서 말이다.

< Verse 15. 흐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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