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93화 (93/309)

< Verse 14. 비 더 언더그라운드 >

***

상현이 관객들의 환호를 들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환호에 보답하기 위해 뭔가 멘트를 치려고 했지만 숨이 너무 찼다.

장장 6분 40초에 이르는 서사구조를 가진 Lonely Road를 라이브로 부르니, 리허설 때보다 두 배는 힘든 것 같았다.

게다가 상현은 하연이나 준형의 랩 파트보다 무반주 16마디와 마지막 4마디가 더 길었다. 조금의 질투도 없이 상현을 에이스로 인정하고 분량을 양보해준 친구들 덕분이었다.

‘잘 할 수 있으려나?’

이제 남은 곡은 공연의 하이라이트인 광주 UP.

16마디의 벌스 2개와 후렴구 3번으로 구성된 광주 업은 오로지 상현의 솔로 플레이로 이루어진 곡이었다. 때문에 준형과 하연이 사운드 백업을 쳐준다고 해도 힘에 부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뒤에 있는 밴드는 광주 인디 씬에서 수년째 활동하고 있는 L&S라고 합니다. L&S를 위해 함성 한 번만 질러주세요!”

상현이 힘들어하는 것을 눈치 챈 준형이 요령껏 시간을 끌었다. 상현은 덕분에 어느 정도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상현이 마이크를 잡았다.

“혹시 저희가 부를 마지막 곡이 뭔지 아시나요?”

상현의 물음에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광수 업’이라고 소리쳤다.

“맞습니다. 한광수 선수의 응원가를 부를 예정입니다. 광수 업이란 응원가로 편곡된 본래 노래의 제목은 광주 업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광주 타이거즈 홈페이지에 뮤직비디오도 올라가 있죠.”

알아요! 라는 여성 위주의 목소리가 들리고, 응원단을 비롯한 몇몇 관객들이 광수 업을 부르기 시작했다. ‘광수 업! 광수 업! 빛 광! 칠 수! 광수 업!’이라는 응원가는 곧 돌림 노래처럼 무등 경기장으로 퍼졌다. 전광판에 멋쩍은 웃음을 짓는 한광수의 얼굴이 나오자 환호소리가 엄청나게 커졌다.

“에이, 아무리 한광수 선수가 잘 생겼다고 해도 공연 때보다 더 크게 소리 지르면 안 되죠!”

준형의 농담에 청개구리 팬들의 환호가 터졌다.

“이 노래를 부를 때는 여러분들이 다 함께 해주셔야 할 행동이 있습니다. 가지고 계신 막대풍선을 양손으로 들어주세요.”

붉은색이 광주 타이거즈의 색이었기에, 타이거즈 팬들이 치켜든 응원용 막대풍선 역시 붉었다.

“저희가 광주- 하면 여러분이 업! 하시면서 막대풍선을 머리 위에서 세게 부딪쳐주시면 됩니다. 쉽죠?”

“연습해볼게요. 광주-!”

업-!

깜짝 놀랄 만큼 큰 ‘업!’ 소리와 함께 막대풍선이 부딪치는 팡! 소리가 무등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무대에서 보니 붉은색의 막대풍선들이 흔들리는 것이 마치 붉은 파도가 넘실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붉은 파도가 만들어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경기장 중앙에 있는 상현의 마이크로 풍선 소리가 들어가서 인이어를 통해 잔향이 들릴 정도였다.

“우와, 박자감각이 다들 엄청 좋으신데요? 이 많은 인원들이 이렇게 딱 맞을 수가 있나? 자네들 혹시 랩 해볼 생각 없나?”

준형이 관객들을 향해 개그를 날렸다. 준형의 썩은 개그에 썩은 표정을 짓고 있던 하연의 얼굴이 전광판에 잡혔다. 하연은 깜짝 놀라며 방긋 웃는 낯으로 표정을 바꿨다.

“여기에 광주 타이거즈 팬들만 계신 건 아니죠? 비록 수는 조금 적지만 일당백인 인천 스카이 팬들의 목소리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인천-!”

업!

“조금 작네요. 인천!”

업-!

“광주 업이라는 노래는 제가 살고 있는 광주라는 도시에 대한 애정을 나타낸 곡이지만, 후렴구를 부를 때만큼은 각자의 도시를 외쳤으면 좋겠습니다.”

스태프들과 약속한 상현의 마지막 멘트가 끝났다.

그 순간 무대 위의 조명과 무대를 보여주던 전광판의 화면이 꺼졌다. 몇 초 뒤, 전광판에는 ‘광주 타이거즈 X 888’이라는 글자가 천천히 페이드인(Fade-in) 되기 시작했다.

888 크루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광주 업 뮤직비디오가 경기장의 전광판을 통해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본래 광주 업의 뮤직비디오는 두 가지 버전이 있었다.

하나는 우민호가 힙합 팬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만든 버전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광주 타이거즈에서 홍보용으로 만든 버전이었다.

현재 광주 타이거즈 홈페이지에는 우민호의 버전이 올라가 있었다. 때문에 ‘광주 업 Ver.타이거즈’의 뮤직비디오는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었다.

-저게 뭐야!

-뭐야! 하하하!

뮤직비디오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관객들의 웃음이 터졌다.

지지직- 하는 노이즈가 어디선가 들리자, 타이거즈 선수들이 훈련을 하다말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연기가 너무나 이상해서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보는 사람도 민망해지는 발연기가 끝난 것은, 노이즈가 끝남과 동시에 후렴구가 나오면서였다.

광주 UP! 광주 UP!

빛 광(光) 고을 주(州) 광주 UP!

문화와 예술의 도시 광주 UP!

우리가 살아가는 광주 UP!

음악이 나오자 뮤직비디오 하단에 자막이 등장했다. 타이거즈 구단의 친절한 배려였다.

귀와 눈을 이용해 음악을 듣자 관객들은 훨씬 빨리 음악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어느덧 하나둘씩 후렴구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광주 업은 한광수 응원가인 ‘광수 업’에 비해 속도가 좀 빨랐지만, 리듬과 느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덕분에 관객들에게는 전혀 모르는 노래가 아닌, 익숙한 노래처럼 들렸다.

화면의 뮤직비디오는 우민호의 뮤직비디오처럼 가사의 전개에 따라서 진행되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타이거즈 소속의 야구선수들이 나와서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한다는 것이었다.

‘광주역 도착 미녀들을 포착’에는 포수인 류연성이 변태 같은 웃음을 지으며 지나가는 여성들을 스캔했다. 여성 야구팬들이 ‘으으으’하는 야유를 보냈다. 왜냐하면 류연성의 표정이 정말로 변태 같았기 때문이었다. 연기가 아니라 진짜 변태만 지을 수 있는 표정. 참된 변태의 상.

그 장면을 본 류연성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절규했다.

덕 아웃의 선수들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영상은 세련되기보다는 재미있고 친근했다. 우민호가 제작한 뮤직비디오와 달리, 힙합적인 느낌보다는 웃음을 위한 코드가 많았다. 그것은 888 크루가 등장하는 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박인혁이 방망이를 들고 타석에 입장했다. 그러나 방망이를 휘둘러보기도 전에 누군가가 던진 공에 엉덩이를 얻어맞아야 했다. 화가 난 인혁이 벤치클리어링을 위해 마운드로 달려갔지만, 덕 아웃에 앉아있던 888 크루 멤버들은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다.

박인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투수에게 삿대질을 하며 마구 소리를 질렀다. 카메라 앵글 상, 박인혁의 모습만 보이고 상대 투수는 보이지 않았다.

관객들의 궁금한 시선이 쏠렸고, 마침내 카메라가 투수를 잡았다. 박인혁에게 혼나고 있는 상대방은, 바로 피칭머신(공을 던져주는 기계)이었다.

거기까지는 웃지 않는 관객들도 많았다. 그러나 박인혁이 곧 피칭머신과 화해를 하고 어깨동무를 하더니, 공이 튀어나오는 주둥이 부분에 뽀뽀를 하는 모습에 ‘으악!’하는 소리와 웃음이 터졌다.

“크.”

박인혁이 뿌듯하게 웃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타이거즈 선수들과 멋진 공연을 보여줬던 888 멤버들이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하자, 관객들의 집중도가 한껏 올라갔다.

물론 모든 장면이 웃음 코드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등번호를 새기지 우리는 전부 공육이(062)’라는 가사가 나올 때는, 타이거즈 선수들이 062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멋진 뒷모습을 과시하기도 했다.

마침내 1절이 끝나고, 또 한 번의 후렴구의 차례가 돌아왔다. 이번에 나오는 장면은 클럽 호미의 광주 업 공연 장면과 구시청 사거리에서 했던 광주 업 공연 장면이 적절히 믹스된 영상이었다.

제법 익숙해진 후렴구가 나오자 관객들이 막대풍선을 치며 ‘업!’을 함께 따라 불렀다. 관중들은 이미 뮤직비디오에 집중해 있었다.

광주 UP! 광주 UP!

빛 광(光) 고을 주(州) 광주 UP!

문화와 예술의 도시 광주 UP!

우리가 살아가는 광주 UP!

팡팡 하는 소리와 업! 소리가 무등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관객들은 뒤이어 나올 2절의 장면들을 궁금해 하며 뮤직비디오를 주시했다. 그러나 뮤직비디오가 갑자기 끝나버렸다.

“뭐야?”

“엥?”

관중들이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끝날 타이밍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메인 스피커를 통해 시끄러운 노이즈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지지직.

동시에 무대 위에서 불꽃이 튀었다. 관중들의 이목이 쏠렸다. 어느새 무대 위에는 888 크루의 여덟 멤버들이 올라와 있었었다.

-지지지직.

888 크루 멤버들이 메소드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 시끄러운 노이즈는 대체 어디서 들리는 거지? 대체 어디란 말이냐!’

‘이런 잔망스런 노이즈 녀석! 음파상쇄간섭 녀석과 막상막하로군!’

이라는 내면 감정을 발연기로 승화시키는 멤버들의 몸부림. 어느새 힙합 팬들에게 익숙해진 광주 업 인트로의 ‘당황한 척하기’ 퍼포먼스였다.

부드러운 직선이나 클럽 호미에 있었던 몇 안 되는 힙합 팬들이 당황한 척을 따라했다. 또는 주변 친구들에게 침을 튀기며 퍼포먼스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곧 들려올 후렴구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풍선-!”

준형이 크게 외쳤다.

준형의 목소리에 따라 광주 타이거즈 팬들의 붉은색 물결과 인천 스카이의 파란색 물결이 관객석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작을 알리는 후렴구가 출발했다.

***

뮤직비디오가 전광판으로 방송되는 시간은 1분 15초 정도였다. 애초에 광주 타이거즈가 편집한 뮤직비디오는 벌스 2가 없었다.

“힘들어?”

눈치 빠른 하연이 상현에게 다가와 물었다. 물을 마신 상현이 투덜거렸다.

“아, 이게 다 민지 누나가 너무 잘해서 그래. 뒤에 사람들이 힘들잖아!”

“나도 진짜 벌스하면서 이렇게 힘들어보긴 처음이야.”

작두를 탄 듯이 랩했던 민지의 영향을 받아 박인혁, 김환은 뒤가 없는 랩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론리 로드의 공연진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원래부터 론리 로드는 오케스트라의 장대한 서사구조를 배경삼아, 장엄한 느낌을 표현해야 하는 어려운 곡이었다. 게다가 후반부에는 기어를 한 단계 올리며 관객들을 턴업(Turn-Up)시켜야 했다.

그러한 곡에서 앞선 공연자들이 텐션을 올리니, 상현은 정말 영혼을 토해내는 느낌으로 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완전 잘했잖아!”

“우리가 못할 리가 없잖아?”

상현의 말에 하연이 피식 웃으며 땀에 젖은 상현의 앞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광주 업 할 수 있지?”

“할 수야 있지. 그런데…….”

“그런데?”

“안할 거야.”

“뭐? 안한다고?!”

상현의 난데없는 말에 하연이 놀라며 반문했다. 그러나 상현은 태연했다.

“응, 솔로곡 안할 거야.”

“그럼 공연은 어떡해? 진짜 안할 거야?”

“안 해. 그러니까 다 같이 하자.”

하연은 상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아 놀랬잖아!”

솔로곡은 안 해. 그러니까 다 같이 하자.

상현이 하려는 말이었다.

물론 상현은 광주 업의 공연을 할 수 있다. 조금 힘들겠지만 잘할 자신도 있다. 그러나 론리 로드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이 길은 좁고 외로운 길이지만 같이 가는 동료들이 있다고.

< Verse 14. 비 더 언더그라운드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