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92화 (92/309)

< Verse 14. 비 더 언더그라운드 >

뭔가를 발견한 관객들이 지칠 줄 모르는 또 한 번의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와아아아!

어느 순간 MPC-4000과 함께 등장한 우민호가 16개의 패드를 미친 듯이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영상 디렉팅과 디제잉을 넘어서, MPC까지 손대기 시작한 우민호의 등장은 888 크루에서 새로운 추진력을 더해주었다.

‘앞에서 멋있는 척 하느라 힘들었지? 한 번 미쳐봐!’

그렇게 말하는 듯한 L&S와 우민호의 서포팅에 준형과 하연이 홀린 듯 앞으로 나섰다.

론리 로드.

외로운 길이라는 의미의 퍼포먼스는 이미 앞선 벌스와 후렴구에서 보여줬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말하지 않은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그들이 걷는 론리 로드에는 어깨를 나란히 할 적이 없지만, 함께 가는 동료들은 있다는 사실이었다.

We Eight that Eight that Eight that Crew!

론리 로드를 함께 걷는 동료들을 묘사하기 위해 하연이 먼저 나섰다.

하루 24시간, 오전 10시 게임 시작.

Insert Coin 준비한 뒤 작업실로 출근함

어젯밤에 골라놨던 주제들을 굴려가

드럼소리가 들리면 우린 연습생이자 훈련관

하연의 가사는 항상 눈에 그려지는 듯한 맛이 있었다. 휴일마다 오전 10시만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출근하는 크루 멤버들.

제대로 말리지 못해서 물기 가득한 머리.

푸석푸석한 얼굴.

그러나 그들의 왼손에는 언제나 공책이 들려있었다. 어젯밤에 골라놨던 주제들을 크루원들과 다함께 굴리기 위해서.

그리고 비트가 들리기 시작하면 크루 멤버들은 모두가 연습생이고 모두가 훈련관이었다.

Yeah! 우린 게으름과는 멀어

적도 안 되는 사람들 관심 전혀 없어

내 영원한 적은 역시 Man in the Crew

시제는 Yesterday 목표는 Always been true

여성적인 보이스면서도 남성 래퍼 못지않은 단단하고 시원시원한 발성. 천상여자인 하연이지만 랩을 할 때면 묘하게 중성적인 매력을 어필한다.

그것이 그녀가 남녀를 가리지 않고 한국 힙합 팬들에게 지지를 받는 이유였다.

이경민, 쇼 비즈니스, 코드네임.

적도 안 되는 사람들.

888 크루의 관심사는 언제나 거울 속의 크루원들이었고, 목표는 Always been true. 음악에 진실성을 갖추는 것이었다.

-꺄아아아악!

-꺄아아아!

하연의 8마디 랩이 끝나자마자 여성 관객들의 환호가 터졌다. 여성 관객들은 준형이나 상현보다 하연을 더욱 지지하기 시작했다.

준형은 그 환호성이 마치 자기인 것 마냥 ‘더 크게!’라고 소리치며 하연의 8마디를 이어 받았다.

내가 나의 부품, 나는 나로 완성되지

무대 위에 서면 내 속에서 내가 아우성대지

타인의 시선 따위 상관없어지지 보통

난 공을 차는 호날두면서 동시에 부폰

상현은 맨 처음에 이 가사를 듣고 포르투갈의 호날두를 말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었다. 아직 2005년에는 호날두가 최고의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브라질의 호날두.

준형은 스스로 공을 차고, 공을 막는다는 가사를 멋지게 풀어냈다.

888, 우리가 모여 있는 작업실에서

역사를 만들어 한국힙합의 School Zone

888, 론리 로드를 직진해,

이제 네 차례야 You ready? I'm Done.

준형이 8마디를 끝내고 아임 던(I'm Done : 난 끝났다)을 외치며 마이크를 상현에게 던졌다. 상현도 마이크를 준형에게 던졌다.

둘의 마이크가 교차했고, 상현은 멋지게 마이크를 잡자마자 랩을 시작했다. 준비된 퍼포먼스였다.

상식의 밖에서 파고들어 어택.

소동을 일으키는 동료들이 곁에 여태

남아있는 고집은 점점 더 강해지니

나를 말리려는 거기 너와 너는 이거 먹어 Fuck That!

본래 OMB에서는 리허설을 보다가 깜짝 놀라며 Fuck That을 다른 가사로 교체해달라고 했었다. 그러나 신나게 랩을 하다 보니 바꾸려던 가사가 기억이 안 났다.

에이, 몰라.

그 순간 준형이 Fuuuck That! 이라고 백 사운드를 외쳤다. 그리고는 히죽히죽 웃었다.

‘이런 또라이 같은 자식.’

상현도 히죽 웃으며 랩을 이었다.

First Class, 어색해, 그냥 볼펜, 하나면 돼

독해, 그리고 Dope해, 매일 노크해, 나를 높게

올려줄 랩 곡예, 난리칠게, 내 곡에

No thanks, 필요 없네. 네 도움 따위 뽀개

내가 나를 만들어 그건 전부다 내꺼

내가 매일 꺼냈던 한 건했던 단어들도 내꺼

Lonely Road. 이 길에 꼼수 따위는 없어

다이어트 중, 게으름과 나태함 싹 다 뺄게.

상현의 랩이 끝나마자마자 방민식의 8마디의 일렉 솔로가 튀어나왔다. 그 순간, 원래 예정에 없던 준형이 모니터링 스피커 위로 뛰어올라갔다.

스태프들이 기겁하며 내려오라고 손짓했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이 곡은 론리 로드라는 곡입니다. 외로운 길. 여기 모이신 모든 분들도 목표를 위해 외로운 길을 걷고 계신 걸 알고 있습니다.”

난데없는 행사진행에 상현과 하연이 서로를 바라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준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기 계신 야구 선수분들도 아주 좁고 외로운 길을 뚫고서 대한민국 야구의 최고 축제라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신 것 아닙니까?”

-플레이오프 아니라니까!

-준 플레이오프!

“아, 몰라! 어차피 우승은 광주 타이거즈!”

-어차피 우승은 광주 타이거즈!

이러다가 공식 응원구호가 될 거 같은 관객들의 웃음기 가득한 환호성이 터졌다.

“좁은 길을 뚫고, 여러분들께 승리에 대한 집념을 보여주려고 이 자리에 모인 양 팀의 야구 선수 분들 응원합니다!”

준형의 외침에 상현과 하연, 888 크루 멤버들, L&S 멤버들의 시선이 모두 무대 밑의 박인혁에게 향했다. 이쯤 되면 박인혁의 환청이 들릴 지경이었으니까.

과연 박인혁은 입모양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크, 할리우드.

웃음이 빵 터졌다.

흥겹게 888 크루의 공연을 지켜보던 야구 선수들은 준형의 말을 듣고 묘한 감상에 빠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선배들한테 빠따 맞아가면서. 야구 방망이 부러지면 부모님의 얇은 지갑 걱정하면서. 에이스한테 포지션 뺏길까봐 전전긍긍하면서. 고3때 지명 받지 못하면 10년의 세월이 사라지고 백수가 된다는 걱정을 하면서.

수많은 걱정과 고통을 인내하며 걸었던 아주 좁고 외로운 길이 떠오른 것이었다.

‘론리 로드라…….’

그리고 그러한 길을 뚫고 올라온 프로무대. 게다가 준 플레이오프.

반드시 우승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렇게 준형은 자신도 모르게 축하 공연의 참된 의미를 수행하고 있었다. 론리 로드는 본래 계획했던 스트롱 스윙보다 더욱 야구에 어울리는 노래가 되었다. 그것도 야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힙합에 대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할리우드식 리더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준 준형이 방방 뛰며 곡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민식의 솔로 파트가 끝나고 마지막 후렴구가 다가온 것이었다.

“다같이! Came From the Lonely Road!"

케임 프롬 더 론리 로드!

“한 번 더! Came From the Lonely Road!"

케임 프롬 더 론리 로드!

전광판에 Came From the Lonley Road라는 준비된 문구가 새겨지자 관중들이 신나게 따라했다.

“더 크게! Came From The Lonely Raod-!"

케임 프롬 더 론리 로드-!

“전부다--!”

케임 프롬 더 론리 로드. 외로운 길에서부터.

***

“야, 쟤들 누구야?”

“네? 큐시트에 보면 888 크루라고…….”

“아니, 누가 이름을 몰라? 쟤네 뭐냐고?”

오경 엔터테인먼트의 방송 콘텐츠 부서 팀장의 물음에 부하 직원이 그 의도를 몰라서 절절맸다. 그러나 다행히 부하직원은 888 크루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우연히 신촌에 놀러갔다가 클럽 호미 공연을 볼 수 있었고, 그 뒤로 888 크루에게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부하직원은 나름대로 충실하게 아는 바를 팀장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888 크루라고 8명으로 구성되어있는 팀입니다, 래퍼는 두 번의 공연에 나온 6명이 전부입니다. 광주에서 힙합 음악을 하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올해 중순에 의기투합해서 만든 팀으로 알고 있습니다.”

“올해 중순? 그거 확실해?”

“네. 확실합니다.”

“그럼 다 광주에서만 활동해?”

“서울에서 공연을 한 번했습니다. 신촌 호미란 클럽에서 공연을 했었는데, 그때 공연이 엄청나서 한동안 힙합 팬들 사이에서 888 크루가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번 공연에 픽업된 이유는 쟤들이 한광수 응원가 만들어줬기 때문이지?”

“네. 맞습니다.”

“그 응원가는 그냥 순전히 지들 곡이고?”

“네. 아, 888 크루가 광주 타이거즈의 팬이여서 응원가를 무료로 제공했다고 합니다. 그 대가로 광주 타이거즈가 광주 UP 뮤직비디오를 제작해줬다고 합니다.”

“아닌데…… 이상한데?”

“네?”

팀장의 중얼거림에 부하직원이 반문했다.

“무료로 헌정했다는 건 회사나 소속사가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팀이라는 이야기잖아? 회사나 소속사가 있으면 무료로 풀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뮤직비디오까지 얻어 찍은 걸 보면?”

“어…… 제가 알기로도 그냥 본인들이 음악 만들고 홍보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저 무대는 뭐야? 저게 자본이 개입이 안된 무대라고? 그냥 아마추어들이 꽁냥꽁냥해서 만든 무대라고? 그게 말이 돼?”

“그, 글쎄요…….”

팀장의 말을 듣고 보니 또 그런 것도 같았다.

“저 음악 믹싱은 누가했는데? 어떤 미친놈들이 오케스트라 사운드에다가 저런 드럼 킷을 써? 그리고 공연 하이라이트에 비트를 잘라버리고 무반주를 시키는 프로듀서가 어디 있어?”

팀장의 열변에 부하직원이 조심히 물었다.

“저, 저는 공연이 좋았는데 혹시 별로라고 느끼…….”

“너 막귀냐? 저 공연이 어떻게 별로야?”

“그럼 왜…….”

“저건 도박이라고. 그냥 909 드럼 킷 대신 오케스트라 타악기 쓰고, 하이라이트에 비트 자를 바에 그냥 일렉 사운드 알차게 쌓았으면 됐어. 그럼 아무리 망해도 80점짜리 무대였단 말이야.”

“그럼 지금은 몇 점입니까?”

“100점이지. 그러니까 저 무대를 만든 놈은 고작 20점 올리려고 도박을 한 거야. 가만히 있어도 80점 먹는 무대인데, 도박해서 망하면 20점짜리가 될 수도 있는 멍청한 짓을 했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하이리스크 로우 리턴.”

위험성은 아주 큰데,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적은 것. 하이리스크 로우 리턴.

“왜 그런 짓을 해? 본인 가수가 비틀즈여도 저런 짓은 안하겠다.”

부하직원은 무슨 말을 해야 되는지 몰라서 그냥 열심히, 아주 격렬하게 가만히 있었다.

팀장의 혼잣말이 이어졌다.

“진짜 이상한데? 저렇게 말도 안 되는 도박수로 무대 구성한 걸 보면 프로듀서 개입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럼 진짜 저 무대를 지들이 만들었나? 그럴 수가 있나?”

오경 ENT가 악동을 넘어서 ‘개자식’들로 소문난 코드네임을 영입한 것은 노리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크게 유행할거라고 예측되는 힙합 문화에 컬쳐 리더(Culture leader)의 포지션을 잡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저런 애들 있었으면 위약금까지 줘가면서 코드네임을 데려올 필요가 없었잖아?’

고개를 까딱거리던 팀장이 부하 직원에게 손짓했다.

“너 지금 당장 저기 888 크루라는 애들 알아봐. 혹시 어디랑 계약했는지부터 체크하고, 과거에라도 회사에 소속된 적 있었는지 찾아봐. 그리고 가능하면 집안 상황까지 알아봐.”

“알겠습니다.”

부하직원이 나가고 팀장이 까끌까끌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영상을 계속 모니터링했다. 그가 보는 화면은 TV에 나오는 것처럼 해설이나 광고가 끼어있는 것이 아니라, 무대의 모든 장면을 따오는 직접라인이었다.

영상은 이제 론리 로드가 끝나고 시작하는 광주 UP을 비추고 있었다.

***

< Verse 14. 비 더 언더그라운드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