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14. 비 더 언더그라운드 >
오늘의 공연곡인 론리 로드는 그렇게 탄생한 곡이었다. 그리고 상현은 공연 직전에 있었던 코드네임과의 일을 떠올리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약에 스트롱 스윙을 공연해야 했다면 코드네임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떳떳한 공연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현은 준형이 좋았다. 친구라는 울타리를 떠나서 음악적으로도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뭘 그렇게 봐?”
“못생겨서.”
“만이천 명이 보는 앞에서 맞고 싶냐?”
상현이 웃었다. 방송과 싱크를 맞추기 위해서 기다리던 10초의 딜레이가 끝이 났다. 준형의 손짓에 드디어 론리 로드의 비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론리 로드의 원래 비트는 오케스트라 하모니를 샘플링한 뒤, 묵직한 베이스와 드럼라인으로 힙합적인 질감을 완성한 곡이었다.
그러나 L&S와 함께 하는 연주곡으로 편곡되다보니 힙합 특유의 샘플링 느낌이 약해지고, 장엄한 느낌이 배가 되었다. 덕분에 원래 비트가 라이브 버전 같았고, 라이브 버전이 음원용같이 되어버렸다.
고심하던 민식은 상현에게 이런저런 사운드를 들려준 뒤에 상현의 감각을 믿고 한 가지 요소를 바꿨다. 그것은 바로 ‘909 드럼’이었다.
909 드럼 킷은 주로 댄스 음악용으로 사용되던 것으로, 오케스트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민식은 오케스트라 타악기인 팀파니가 사용돼야 할 부분에 과감하게 909드럼 사운드를 채워 넣었다. 909 드럼 킷을 헤비하게 믹싱한 뒤, 오케스트라 하모니 샘플에 새로운 드럼 라인을 입힌 것이었다.
정통 음악을 추구하던 민식의 입장에서 이것은 아주 파격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그는 그만큼 상현의 안목을 믿었다. 상현은 여전히 화성학이나 악기에 대한 이론적 조예가 없었지만, 가지고 있는 감각은 놀랍도록 날카로웠다.
결과적으로 작곡이나 화성학 혹은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론적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우뚱 할 사운드가 완성되었다.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단단하다’는 완성형의 느낌은 받지 못할 비트.
하지만 공연은 비트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악기가 더 있었다. 세상 그 어떤 악기보다 가장 완벽하다는 악기.
바로 목소리였다.
오케스트라 하모니 사이로 미주의 키보드와 함께 바이올린 VST(가상악기)가 사운드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론리 로드. 외로운 길.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사이에 있는 비좁고 외로운 길을 표현한 미주의 키보드와 바이올린의 합주는 사람을 집중시키는 묘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관객들을 흥분시키고 열광시키지는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관현악의 정점인 오케스트라 사운드는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 순간 바이올린과 키보드 사이로 준형의 랩이 쏘아졌다.
Came from the bottom 이제 내 위치는 Lonely Road.
좁은 길 위에 서있지 모두 날 따라와 Call me Lord.
무작정 발사해, 내 영감은 벌써 또 reload.
내가 좀 빨리 왔나봐 날 부를 땐 꼭 Early Bird
준형의 랩이 909 드럼 라인과 현악기 사이를 꽉 채우기 시작했다. 빠른 랩은 아니었지만 관객들이 듣기에는 굉장한 속도감이 느껴졌다. 의도적으로 쉴 틈을 두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 호흡에 토해낸 4마디의 랩은 오케스트라 하모니와 섞이며 가사처럼 오만한 느낌을 주었다.
그 뒤를 하연이 치고 들었다.
준형의 랩이 끝나는 Early Bird와 하연의 랩이 시작하는 Early Bird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 떨어졌다.
Early Bird,
일찍 일어나는 새면서도 높게 날아 멀리 본
채로 주변을 살펴 소인국 여행 온 걸리버
랩을 뱉을 때 기분은 과외 중인 설리번
날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일걸 Re-born
하연의 랩 방식은 준형과 똑같았다. 게다가 ‘론리 롣(로드)’로 출발한 준형의 라임이 그 구조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걸 리본(Re-born)’으로 연결되었다.
준형과 하연은 같은 라임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는 플로우가 전혀 달랐다. 하지만 같은 라임 구조를 공유하기 때문에 듣기 좋은 일체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하연의 랩도 준형처럼 4마디를 한 번에 토해내는 방식.
눈치 빠른 관객 중 몇 명은 888 크루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들은 마라톤을 하고 있었다. 바통을 이어받으며 42.195km를 전력 질주하는 마라톤을.
한껏 집중되어있던 관객들의 환호가 터지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상현이 하연의 ‘걸 Re-born’을 이어받으며 새롭게 달리기 시작했다. 전개되는 라임의 구조는 같았다. 하지만 상현은 단순히 전의 것을 이어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위인이 아니었다.
하나뿐일걸 Re-born,
건들거리며 거리를 걸었던 걸리적
거리던 것들의 거짓말 거의 다 걷어내고
잘라버려 내 오른손엔 엑스칼리버
Came from the bottom 다시 내 위치는 Lonely Road.
일순간 관중들의 환호가 터졌다.
-오오오오!
-우와!
그 이유는 상현이 사용한 다음절라임 때문이었다.
다음절라임은 라임을 맞추는 랩 스킬 중의 하나였다.
보통 래퍼들은 의미 전달 체계인 단어를 이용해서 라임을 맞춘다. ‘걸리버’, ‘설리번’처럼 말이었다. 하지만 다음절 라임은 의미전달 묶음으로 라임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소리전달 묶음으로 라임을 맞추는 기술이었다.
어절 사이에서 필요한 소리를 따와서 라임을 맞추는 것.
건들거 - 리며 거 - 리를 걸- 었던 걸 - 리적 거 - 리던 것
다음절 라임은 사용하기가 쉽진 않았지만, 일단 사용한다면 듣는 이의 환호를 자아내는 라임 폭탄을 투여할 수 있었다.
다만 한국어의 특성상 어절이 잘리며 맞춰진 라임은 가사의 본뜻을 전달하기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때문에 상현은 만일 론리 로드가 자신의 솔로곡이었다면 다음절 라임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준형 - 하연으로 이어지는 마라톤에서 더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딜리버리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은근히 장엄한 바이올린과 키보드 서사 사이로 전자음들이 섞이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느끼지 못했지만 연주 속도 역시 아주 조금씩 빨라졌다.
12마디의 장엄한 랩이 끝남과 동시에 하연의 후렴구가 나왔다.
먼지 쌓인 길 위에,
어깨를 나란히 할 이의
자취를 느끼지 못해, 내 위에
아무도 없어서 노래해 날 위해
후렴구는 오케스트라 하모니에 어울리는 성가대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는 방식이었다. 하연의 보컬을 녹음해 Choir Vocal 효과를 입혔고, 그것을 백 사운드에 쌓았다. 그와 동시에 L&S의 멤버들이 풍성한 화음을 맞췄다.
From the Lonely Road-
From the Lonely Road-
관중들은 왠지 드럼 소리가 강해졌다고 느꼈다.
고스트 노트를 형성하던 베이스가 전면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바이올린 사운드가 작아졌다. 키보드가 어느새 전자 키보드로 셋을 전환했다.
점차 고조되는 느낌.
드럼소리에 맞춰 쿵쿵 뛰는 심장.
관객들은 후렴구가 끝나는 순간 자신들의 귀를 만족시켜줄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From the Lonely Road-
From the Lonely Road-
그리고 후렴구가 끝나는 순간.
관객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안타깝게도, 엄청난 몰입도를 보여주던 연주가 끊긴 것이었다. 리허설을 보지 못한 카메라 감독과 스태프들이 당황했다. 리허설을 봤던 음향팀 역시 공연에 너무 몰입했던 관계로 시나리오를 잊어버리고 당황했다.
갑자기 이루어진 무대 위의 정적.
관객들의 아쉬운 탄성.
인이어를 통해 들리는 스태프의 다급한 목소리.
그 사이로 상현의 날카로운 랩이 튀어나왔다.
내 가슴엔 여전히 꿈이 살아 숨 숴
때때로 무대 위에서 난 춤춰
더 나은 어른이 되기 위한 나의 충전
하는 에너지가 발산되는 방식의 출력
상현의 랩이 3개의 메인스피커를 쩌렁쩌렁 울리며 토해졌다. 황급히 카메라가 상현을 줌인했다.
무언가에 열중하는 사람은 저절로 빛이 난다. 그리고 남들의 시선을 주목시키는 힘을 갖게 된다.
지금의 상현이 그러하듯이.
대부분이 날 이해 못하겠지만
이제 내 선택은 랩으로만 사는 Hustle life
적당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오늘도 밤을 새며 가사들을 고치고 써
상현은 비트를 고조시키고, 고조가 최고점에 이르러서 뭔가 나타날 것 같은 순간에 비트를 끊었다. 그리고 무반주를 시작했다.
이것은 양날의 검이었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겠지만, 흐름은 끊긴 상태다. 그 흐름을 무반주 랩이라는, 오직 랩으로 구성된 장치로 채우지 못한다면, 에스컬레이터를 타던 공연이 분위기가 흐지부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현은 했다. 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있었다.
모든 관객들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강한 느낌.
그걸 쓰다보면 자연스레 뒤를 보게 돼
내가 찍어온 발자국이 박힌 길 뒤에
두 글자를 새겨 Five 그리고 Six
Got a god of things, 신의 축복에 키스
어쩌면 상현은 랩의 전달방법 중에서 무반주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오연주를 당황시켰고, 김운철 교수를 매혹시켰던 목소리의 전달로 말이다.
Boy be ambitious, 이제 소년을 벗어났어.
내 야망은 너무 커, 나태함 허물은 벗어놨어.
날 축복하든 저주하든 선택은 그들의 자유거든
From the Lonely Road. 이제 다시 비트 위로
비트 위로…… 위로… 위로.
메아리처럼 상현의 목소리가 퍼졌다.
무반주로 퍼부은 랩은 짜릿했다. 시원한 퍼포먼스에 관객들이 함성을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관객들의 입을 틀어막는 소리가 있었다.
-두두두둥 쾅!
드럼 사운드가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지금껏 녹음된 909 드럼 킷의 고스트 노트(들릴 듯 말듯 치며 그루브와 벨로시티를 형성하는 연주 기법)만 형성하던 황인수의 드럼이 불을 뿜은 것이었다.
공연 중 성장하는 믹스 업은 비단 888 크루 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888 크루를 통해, 그들의 자유로움과 발상의 전환, 참신한 시도를 느낀 L&S 멤버들에게도 강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드럼과 동시에 시작된 연주는 무반주 직전의 비트와는 달랐다. 무반주 이전의 비트가 오케스트라 하모니 중심의 사운드였다면, 지금부터 나오는 비트는 그 중심이 일렉 사운드였다.
장엄함이 사라지고, 거칠함이 자리했다.
엄숙함이 사라지고, 자유분방함이 나타났다.
클래식함이 사라지고, 세련됨이 나타났다.
오케스트라의 서사적인 느낌이 일렉 사운드의 강렬함으로 순식간에 바뀌어버렸다.
-와아아아아아!
-팔팔팔 크루!
의도된 극적인 반전에 관객들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이제는 888 크루의 공연은 준 플레이오프의 축하 공연이라기보다는, 완전히 888을 위한 무대가 되어버렸다.
상현의 무반주 랩이 의도했던 또 하나의 장치였다.
장엄한 오케스트라 하모니에 전자 사운드가 섞이다가, 마침내 폭발하는 방민식의 아이디어는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타이밍이 애매했다.
악기가 조금씩 계속 바뀌는 것은 폭발적이지 못했고, 한 번에 바뀌는 것은 연결이 매끄럽지 못했다.
그래서 상현은 무반주를 통해 비트를 끊어버린 것이었다. 정적 상태에서 랩으로 흐름을 틀어쥔 다음, 터트려버리는 전자 사운드!
클래식의 혁명인 것인가, 일렉의 혁명인 것인가 의견이 분분했던 잉위 맘스틴의 ‘일렉과 오케스트라의 콜라보레이션’.
세계 제일의 일렉 기타리스트이자 속주의 달인이 선보였던 그 시도가 무등경기장에서 새롭게 재구성되어 표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그들이 하는 음악은 힙합이라는 것이었다.
< Verse 14. 비 더 언더그라운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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