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14. 비 더 언더그라운드 >
‘내가 뭘 했지? 제대로 한 거 맞아?’
어떻게 랩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랩을 하는 중이라는 것도 인식도 하지 못했다. 작업실에 모여 잡담을 나누다가, 누군가 튼 비트에 엉터리 프리스타일을 신나게 뱉은 기분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김환과 박인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민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런 표정을 짓을 이유는 하나뿐이다. 기어코 자신이 실수를 한 것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실수했지? 혹시 비트를 무너지게 했나? 인혁이 오빠나 환이 오빠 파트를 침범한 건 아니겠지? 아니, 지금 훅 할 차례인데? 가사를 빼먹었나? 왜 후렴구를 안 부르지?
민지는 정신을 다잡고 비트를 들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도무지 비트가 들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우와아아아!
-꺄아아악!
엄청난 함성소리가 모든 것을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인혁은 정신을 놓은 듯한 오민지를 대신해 후렴구를 시작했다. 함성소리가 너무 커서 비트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인이어를 통해 스네어는 간신히 들렸다. 그 순간 센스 있는 스태프가 인이어 볼륨을 확 올렸다.
Why Come, Why For, Why Stand. Ho-!
Why Come, Why For, Why Stand. Ho-!
Why Come, Why For, Why Stand. Ho-!
888이 떴으니 전부 소리 질러!
민지는 인혁의 목소리를 듣고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허둥지둥 후렴구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뭐야? 저 바보는?’
민지의 표정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자기가 뭘 했는지도 모르고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 표정이라니.
아마도 본인이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실수는 실수지. 연습 때랑 너무 달랐잖아? 갑자기 저렇게 잘하면 반칙이지.’
실제로 인혁은 약속된 더블링의 두어 부분을 지나쳐버렸다. 민지가 너무 유려하고 단단하게 랩을 하니까 더블링이 사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장난 아닌데 이거?’
대중들이 보내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물론 공연의 시작부터 888 크루에게 호의적인 사람도 많았다. 본래부터 888 크루의 팬이거나 인터넷 기사를 보고 응원하기 시작한 사람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관심과 무관심의 경계에서 무덤덤하게 보고 있던 사람들. 그들의 시선에 호기심과 기대가 담기기 시작했다.
Why Come, Why For, Why Stand. Ho-!
Why Come, Why For, Why Stand. Ho-!
Why Come, Why For, Why Stand. Ho-!
888이 떴으니 전부 소리 질러!
Ho-!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Ho에 맞춰 두드리는 막대풍선의 소리도 커졌다.
간혹 예술가들은 대중이 무지하다고 말한다. 주관보다는 남들의 평가에 휩쓸린다고 투덜거린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예술가치고 성공한 사람이 없다.
대중들은 절대 무지하지 않다.
힙합을 모르고, 음악을 몰라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은 기가 막히게 구분해낸다.
그리고 대중들은 이제 888이라는 정체불명의 팀을 좋은 쪽으로 판단하기 시작했다.
‘그 평가를 내가 망칠 수야 없지.’
인혁이 어슬렁거리며 무대의 끝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박자를 타며 어깨를 들썩이는 모양새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동료들, 스태프들 그리고 관객들의 시선이 확 모여들었다.
-탁.
인혁이 모니터링 스피커에 오른발을 올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마이크를 쥐지 않은 왼손을 하늘로 쭉 펼치고는 이상한 막춤을 추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우와아아아!
웃음기가 잔뜩 낀 환호성이 터졌다. 근처에 있던 스태프들과 동료들도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환호를 질렀다.
이게 인혁의 매력이었다. 유년기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 일지도 모르겠지만, 인혁은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하고 싶은 일을 반드시 한다. 그게 이상하고 멋지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짜식, 잘도 추네.”
지미집 카메라 감독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카메라를 조작했다. 지미집이 뒤로 쭉 물러나더니, 박인혁을 중심으로 앵글을 잡기 시작했다. 전광판으로 인혁의 단독샷이 나왔다. 덩실덩실 막춤을 추는 모습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후렴구의 반복은 총 3번.
인혁의 벌스가 시작되기 전의 마지막 후렴구가 흘러나왔다. 인혁은 즉흥적으로 크게 소리 질렀다.
Why Come, Why For, Why Stand. Ho-!
박인혁이 떴으니 전부 소리 질러!
마침내 인혁의 벌스가 시작되었다.
***
대기실에 비치된 티비로 888 크루의 공연을 보고 있던 코드네임 멤버들이 깜짝 놀랐다. 존재감이 없어서 같은 대기실에 있었는지 조차 가물가물한 여자의 랩 때문이었다.
‘쟤 뭐야?’
처음에 코드네임 멤버들은 덜덜 떠는 모습의 여자를 보며 한껏 비웃었었다. 일렉 기타의 전주가 나오는데, 손이 떨리는 게 보인다.
“저래서 랩이나 하겠냐?”
“우리야 귀찮아서 립싱크를 하는 건데, 쟤네는 립싱크가 없으면 공연을 못하겠네.”
시끌벅적하던 대기실이 갑자기 조용해 진 것은, 오민지의 랩이 시작되고부터였다.
유려한 플로우와 단단한 라임.
시원한 발성과 완벽한 호흡조절.
백업 사운드와의 조화, 제스쳐와 시선처리.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야외 공연인 탓에 사운드 최적화가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딜리버리 역시 거의 완벽했다.
‘뭐야?’
얼마나 거지같은 공연하는지 지켜보자며 비웃던 코드네임 멤버들이 다함께 입을 다물었다.
한참 흐르던 침묵을 깬 것은 루키였다.
“뭐야, 별로 못하네.”
“그러니까. 그나마 저 여자애가 크루에서 젤 잘하나본데?”
“딱 봐도 오프닝 첫 벌스에 모든 걸 투자하는 거지. 원 벌스에 모든 힘을 쏟아낸 그들은, 이어지는 투 벌스에서 거짓말처럼 패배했다.”
우성의 농담에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그 웃음은 어딘지 모르게 작위적이었다.
원 벌스가 끝나고 아주 짧은 기타 솔로 이후에 두 번째 후렴구가 나왔다.
자기도 모르게 Ho!를 따라할 뻔했던 루키가 침을 삼키는 사이, 앞으로 튀어나온 ‘천본앵’ 자식이 이상한 막춤을 추기 시작했다.
“저거 완전 병신이네?”
“저 새끼는 쪽팔린 걸 모르나?”
“저걸 무대 구성이라고 짠 거냐? 쟤네 안무는 누가 짜는 거야?”
박인혁의 춤에 코드네임 멤버들이 푸핫, 하고 웃으며 그를 비웃었다.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졌다.
그리고 박인혁의 랩이 출발했다.
***
박인혁의 랩 스타일은 상현의 표현처럼 ‘어슬렁거린다.’라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박인혁의 랩은 불친절하다. 스네어에 정박으로 박히는 경우가 드물었고, 박자를 밀고 당김에 있어서도 일정한 방식으로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내키는 대로.
또한 888 크루의 모든 멤버들이 탑다운(Top-Down) 방식으로 가사를 쓴다면, 인혁은 병렬적 구조로 가사를 쓴다. 비슷한 바이브를 가진 문장, 단어들을 나열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인혁은 가끔씩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라는 멤버들의 질문을 받곤 했다. 하지만 크루원들 중 그 누구도 인혁이 가사 쓰는 스타일을 고쳐야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건 그가 가진 고유의 스타일이었고,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이었다.
상현을 제외하면 888 크루에서 가장 고평가를 받는 사람이 준형이다. 여성 래퍼라는 특수성까지 고려하면 하연도 고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힙합 팬들은 준형과 하연이 상현보다 랩을 잘한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준형과 하연이 랩을 하는 방식은 상현이 랩을 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개인 취향의 영역인 ‘랩 스킬과 보컬 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면에서 상현이 준형이나 하연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간혹 ‘이상현보다 In-Hulk(박인혁)가 낫지 않음?’이라는 글이 올라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 이유는 상현과 인혁의 랩이 전혀 다른 부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와이커밍(Why Commin')은 이러한 인혁 특유의 멋이 완벽하게 표현된 곡이었다. 특히 단어들로만 랩을 이어가는 초반 부분은 단연 압권이었다.
Why Come, Why For, Why Stand. Ho-!
박인혁이 떴으니 전부 소리 질러!
후렴구를 외치고 잠시의 환호를 즐기던 인혁의 벌스가 시작되었다.
광주, Eight Three.
In-Hulk, That's Me.
내가, 컸으니.
보다 더, 떴으니.
Nasty, Thirsty.
악기 없이, 버스킹.
머스탱, 링컨.
필요 없어, 비트 위
‘Nasty, Thirsty. 악기 없이 버스킹.’
Nasty는 끔찍한, 더러운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흔히 래퍼들이 스스로를 ‘거리(언더그라운드)에서 출발한 리얼한 래퍼’라고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이다. 제이지와 함께 동부 힙합의 왕인 나스(Nas)가 스스로를 퀸스 브릿지 출신의 네스티 나스(Nasty Nas)라고 칭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러니까 ‘Nasty, Thirsty’는 Nasty에 대한 목마름, ‘악기 없이 버스킹’은 준비 없이 버스킹을 할 수 있는 힙합 문화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였다.
‘머스탱, 링컨. 필요 없어, 비트 위’는 머스탱이나 링컨 같은 고급차는 필요 없다. 왜냐면 비트 위에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얼핏 보면 무질서해 보이는 인혁의 가사는 이러한 매력이 있었다.
걸리적거리는 걸, 모두 다 물어뜯는 상어 선생
셀 기회는 없겠지만 내 이빨은 888개
내 다음 차례라면 각오 단디 빡세개 해
김구 쌤과 전과가 같아 얼추 백범
오른발을 모니터링 스피커에 올린 채로 역동적으로 비트를 타는 인혁의 모습은 굉장히 신나보였다.
믹스 업(Mix Up).
스포츠 경기에서 자신의 역량 이상의 기술을 발휘해서 적극적으로 핀치를 주고받는 것.
오민지의 랩을 듣고 받았던 자극이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혼자 있으면 보이지 않는 닥템(Dark Templar)
둘만 붙여놓으면 커지고 붉어져서 조종하려 들어
Mind Con(trol), Like the, Psycho,
가서 창이나 닦아 바이퍼, 잘했어 라이코스.
거칠 것 없이 랩을 뱉던 박인혁은 문득 상현의 말이 떠올랐다.
오늘 관객들은 코드네임의 공연을 보고 힙합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 차례니까.
‘해도 되나?’
인혁은 문득 충동이 들었다. 그리고 해버렸다.
하고 싶으면 하는 거니까.
인혁이 본인 파트인 2벌스의 마지막 4마디를 시작하자 더블링을 맞춰주던 김환과 오민지가 당황했다.
본래는 ‘싸이퍼 나오려면-’으로 시작하는 가사였는데 갑자기 ‘스테이지 나오려면-’으로 가사가 바꿨다.
‘뭐야? 실수야?’
그들이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박인혁의 랩은 이어졌다. 김환과 오민지는 인이어를 통해 들리는 박인혁의 랩에 집중했다. 그리고는 더블링이고 뭐고 포기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이런 정신 나간 놈.’
김환은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스테이지 나오려면 화장을 고쳐
립싱크 하는 것도 그 모양? Code명 : 닥쳐
Why come? Why for? 선사시대 가요?
숨 쉬는 것도 힘들어 보여 멀리 가요.
코드네임에게 가하는 통쾌한 일침이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들었어?”
“크, 진짜 이 형 너무 매력적이야.”
“어휴, 박인혁은 어쩔 수 없는 박인혁이다.”
무대 바로 옆에 세워진 중계차에 마련된 대기공간에서 공연을 보고 있던 상현과, 준형, 우민호가 감탄했다.
평소에도 심심하면 프리스타일을 하면서 놀더니, 만이천명이 지켜보는 와중에 프리스타일로 코드네임을 깐 것이었다.
물론 본래 가사에서 몇 단어만 바꾸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이 큰 무대에서 그럴 수 있다는 게 대단해보였다. 게다가 라이브로 방송 중인데!
Why Come, Why For, Why Stand. Ho-!
Why Come, Why For, Why Stand. Ho-!
Why Come, Why For, Why Stand. Ho-!
888이 떴으니 전부 소리 질러!
귀가 좋은 관객들은 후렴구 전체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가사를 확실히 듣지 못한 관객들도 Why는 알아들었기에 ‘와이, 와이, 와이’를 신나게 외쳤다.
888이 떴으니 전부 소리 질러!
< Verse 14. 비 더 언더그라운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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