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14. 비 더 언더그라운드 >
Verse 14. 비 더 언더그라운드
광주 타이거즈는 4위를 확정지으며 준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냈다.
마지막 3연전을 스윕하며 3위까지 노려볼 수도 있었지만, 3위인 인천 스카이가 2승을 챙기며 결국 4위로 시즌을 마감을 했다.
사실 상현의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만약 광주 타이거즈가 3위로 올라가면 일정이 꼬여서 무등 경기장에서 광주 UP 공연을 못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상현은 광주 타이거즈의 3번째 경기 중계를 보면서 제발 지라고 응원하기도 했었다.
드디어 결정이 난 가을야구의 일정은 10월 6일부터 10월 25일까지.
본래는 10월 1일부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몇몇 경기들이 우천취소로 연기되면서 결국 가을야구도 5일이 연기되었다.
광주 타이거즈가 4위를 확정지은 다음 날, 888 크루 멤버들은 L&S의 미주, 방민식과 함께 광주 타이거즈 홈구장인 무등 경기장으로 향했다.
“여기 응원 단상에서 저희가 공연을 하는 건가요? 그러기엔 너무 좁은데…… 밴드 악기가 들어갈 공간이 없겠는데요?”
“단상 옆에다가 추가적으로 무대를 설치할 예정입니다. 지금 보시는 응원 단상의 2.5배쯤 되는 규모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옆 라인과 뒤 라인을 넓히는 거죠?”
“네. 밴드 L&S는 학익진의 형태로 뒤쪽에 배치될 예정이고요, 888 크루의 멤버들은 그 앞쪽에서 자유롭게 공연을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광주 UP 뮤직비디오가 전광판으로 나올 겁니다.”
고원국 대리의 말에 상현이 뭔가를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무대 위치를 보니까 원정팀의 팬들은 공연이 잘 안보이겠는데요?”
“그렇긴 한데, 어쩔 수 없는 부분이죠. 아무래도 홈팀 팬들이 우선이니까요.”
“그럼 전광판에 공연 장면을 트는 것은 어떤가요? 기술적으로 불가능한가요?”
“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카메라도 대여해야 하고 라인도 새로 따야 해서 좀 복잡해집니다. 최종 컨펌이 난 건 아니지만 비용 상의 문제 때문에 바꾸기가 좀 힘들 텐데요…….”
고 대리의 말에 상현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비용 상의 문제를 그들이 해결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우민호가 입을 열었다.
“그날 중계차 오죠?”
“가을야구 개막전인데, 당연히 오죠.”
“그럼 그 중계차의 카메라 라인을 전광판이랑 연결하면 안 되나요? 아니면 카메라를 업체에서 대여하지 말고 방송국 쪽을 통해서 잠깐만 대여하는 건요?”
“오! 그거 좋은 아이디어인데요? 방송국 쪽이랑 이야기가 잘 되면 라인연결비용 외에는 비용이 들지 않겠군요. 흠,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상현과 우민호가 주도적으로 공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방민식은 장비가 세팅될 공간들을 살폈다.
“저기, 대리님. 메인 스피커는 어디에 설치되나요?”
“딱히 메인 스피커랄 것은 없습니다. 기존의 1루, 3루 스피커를 사용하되, 응원 단상과 홈 베이스 쪽에 추가로 스피커를 설치할 예정입니다. 출력은 모든 스피커가 비슷한 수준입니다.”
“모니터링 스피커는요?”
“무대 제작팀이 응원 단상에 설치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뭔가를 생각하던 민식이 888 크루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니들 인이어(In-Ear) 끼고 공연해본 적 있냐?”
“저는 전주 월디페 때 껴보긴 했죠. 근데 불편해서 볼륨을 극단적으로 낮췄었어요. 그냥 드럼만 들리는 정도로.”
“나도 월디페 때 껴봤어.”
“저희는 안 껴봤어요. 우리 중에 껴본 사람 없지?”
미주와 상현을 제외한 888 크루 멤버 중에는 인이어를 껴본 사람이 없었다. 방민식이 말했다.
“여기서 공연하면 아마 레이턴시(Latency)가 발생할 거야.”
“레이턴시요? 모니터링 스피커 있잖아요.”
“모니터링이 제대로 안될 것 같아.”
모니터링 스피커(Monitering Speaker)란 공연자가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설치된 스피커를 말했다. 인이어는 모니터링 스피커 중에서 이어폰 형태를 말했고.
가수들이 모니터링에 민감한 이유는 소리의 밸런스 때문이었다. 모니터링이 잘 되지 않는다면 기준점이 없어서 목소리가 점점 커지게 되고, 마침내 악을 쓰게 된다. 학교 축제 같은 곳에 서본 사람들은 한 번쯤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었다.
모니터링 스피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가수들은 메인 스피커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런데 공연장의 규모가 클 경우에는 추가적으로 난감한 문제가 발생했다.
레이턴시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오빠, 레이턴시가 뭐야?”
가만히 듣고 있던 상미가 물었다. 힙합 웹툰을 그리기 시작한 뒤부터 궁금한 건 바로바로 묻는 상미였다.
“음, 무대에서 말을 하면 바로 들려야 하잖아? 근데 내가 말을 하는 것보다 조금 늦게 내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하두리 같은 걸로 영상 채팅하면 약간씩 딜레이가 발생하는 거랑 같은 거야.”
레이턴시는 무대와 스피커의 거리가 멀거나, 마이크 입력 라인에 문제가 있거나, 소리의 반향(벽에 부딪쳤다가 돌아오는 것)이 너무 클 경우 발생하는 문제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우민호가 물었다.
“근데 민식이 형. 레이턴시가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모니터링 스피커를 통해 들으면 괜찮지 않아요?”
“아니야. 무대를 기준으로 메인 스피커 3개의 거리가 각기 달라. 내 경험 상, 이런 경우에는 소리끼리 음파 상쇄간섭이 일어나기 쉬워. 아마 모니터링이 잘 안 들릴 거야.”
민식의 설명에 준형과 박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렇군. 음파 상쇄 간섭이라니. 이것 참 걱정스러운 걸.”
“후후, 잔망스런 음파상쇄간섭 녀석. 사람을 꽤 곤란하게 하는군. 혼 좀 나야겠어.”
“……니들 내 말 이해했냐?”
“아,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야? 레이턴시가 걸리면 랩하는 애들도 문제지만 우리도 문제잖아.”
미주의 질문에 방민식이 어깨를 으쓱했다.
“뒤지게 연습해야지 뭐.”
“아니, 그건 당연한 건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설명해!”
“내 지식을 자랑하고 싶었다! 왜!”
미주와 민식이 아옹다옹 거리자, 고원국 대리가 박수를 짝 치며 주의를 돌렸다.
“자자, 싸움은 다른 데서 하시고! 어차피 당일 리허설이 있으니까 그때 확인해 보시죠. 이제 공연이 6일 남았네요. 준비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열심히 해야죠. 고원국 대리님도 전광판에 영상 송출하는 거 알아보시고 연락주세요.”
“알겠습니다. 참, 페이는 공연이 끝나면 지급 될 예정입니다.”
고원국 대리가 먼저 사무실로 돌아가고, 상현은 일행들과 함께 무등 경기장을 돌아보았다. 경기장은 넓었다. 그리고 아마 공연 당일이 되면 수용 최대 인원인 12,500명이 꽉 찰 것이었다.
“와, 진짜 넓다.”
“호미 때 관객이 몇 명이었지?”
“천이백 명 정도 됐다던데?”
“크, 열 배가 넘네.”
“어우, 실수하면 어떡하지?”
“범국민적으로 망신당하는 거지 뭐.”
입으로는 호들갑을 떨었지만, 모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겁을 먹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어엿한 뮤지션이었다.
***
무등 경기장을 방문한 다음날, 상현은 임 변호사님을 통해서 반가운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드디어 888 X 888의 디자인 특허가 출원됐다는 소식이었다.
최종적인 도메스틱 브랜드 명은 트리플 에잇(Triple Eight).
상현은 즉시 의류 제작업체에 오더(Order)를 넣었다. 우선적으로 062 X RAP가 새겨진 뉴에라, 티셔츠, 수건을 판매할 예정이었다.
‘언젠간은 아디다스 같은 유명 브랜드랑 콜라보레이션할 수 있겠지?’
‘RUN DMC’가 새겨진 아디다스와 런디엠씨의 콜라보레이션 상품이 힙합퍼들에게 주는 스웨거는 어마어마하다.
대한민국의 국가 번호는 82번. 상현의 최종 목표는 트리플 에잇의 의류에 82 X RAP라는 메시지를 새기는 것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니, 작업실에는 공강인지 자체휴강인지 모를 박인혁과 김환이 있었다. 상미는 방에서 웹툰을 그리고 있었고, 준형과 하연은 저녁을 먹고 6시 이후에 온다고 했다.
“민호 형이랑 민지 누나는요?”
“둘 다 일이 있어서 오늘 못 온데. 내일 L&S 연습실에서 보자더라.”
“그럼 저희끼리 먼저 연습을 할까요?”
“놀아서 뭐하냐! 연습하자!”
그렇게 상현과 박인혁, 김환이 연습을 시작했다.
상현은 메인 래퍼의 포지션이었고, 888 크루 멤버들은 역할을 분배해 백 사운드와 더블링을 담당했다.
사실 상현의 광주 UP 라이브는 거의 완벽한 수준이었다. 때문에 연습의 목적은 백업 사운드와 호흡을 맞추는 것이었다.
“아, 이거 되게 어렵네.”
“그니까. 설마 이 정도로 레이턴시가 걸리진 않겠지?”
“그거야 모르지.”
박인혁이 투덜거리면서 다시 ‘두 개’의 비트를 틀었다.
그들은 방민식이 알려준 특이한 방법으로 연습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것은 두 개의 비트를 트는 방식이었는데, 스피커를 통해 비트를 틀어놓고, 또다시 이어폰을 통해 비트를 틀었다.
비트는 모두 광주 UP의 비트였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두 비트가 서로 다른 시점에 틀어졌다는 것이었다. 이어폰을 통해 나오는 비트가 1초 정도 빠르다.
레이턴시 중의 최악은 비트에 레이턴시가 걸리는 것이다. 래퍼가 듣는 비트와 관객이 듣는 비트의 출력 시점이 달라지면 엉망진창인 공연이 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극한의 상황을 가정하고 연습을 하고 있었다.
“광주 업! 광주 업!”
연습은 준형과 하연이 작업실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준형은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팔짱을 끼고 연습을 지켜보다가 비트를 중단시켰다.
“인혁이 형. 지금 형 더블링이 미묘하게 느려요. 스피커랑 이어폰의 중간 템포에요.”
“아, 그래? 크, 어렵네. 더 집중해서 들어볼게.”
“물 좀 마시고 하자.”
하연이 떠온 물을 마시며 김환이 입을 열었다.
“근데 후렴구 부를 때 관객들이 얼마나 따라 부를까?”
“글쎄? 호미 때처럼 떼창을 기대하긴 힘들지 않나?”
“크게 따라 부르면 그것도 의외의 함정이 될 수가 있어요. 관객들의 소리가 꼭 박자에 맞는다고는 볼 수 없으니까요.”
“음, 그것도 그러네.”
“근데 상현아, 배 안 고프냐? 짱개 하나 시켜먹을까?”
박인혁의 말을 듣자 갑자기 허기짐이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벌써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상현은 이어폰을 내려놓았다.
“준형이랑 하연이는 밥 먹었지? 형들 짜장, 짬뽕. 골라요.”
“나는 짜장. 너는?”
“저는 짬뽕이요. 인혁이 형은요?”
“크…… 짜장이냐 짬뽕이냐 인류 최대의 난제로군.”
박인혁은 심사숙고를 하더니 결국 ‘어느 것을 고를까요’를 시작했다. 김환이 짜장이었고, 상현이 짬뽕이었다.
“어느 것을 고를까…… 요!”
김환 짜장과 상현 짬뽕을 오가던 박인혁의 손가락이 상현을 가리켰다.
“그럼 짬뽕 두 개죠?”
“아니, 난 볶음밥!”
“……진짜 이 형 너무 매력적이야.”
상현이 중국집 번호를 찾아 핸드폰을 드는 순간, 고원국 대리의 이름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네, 고원국 대리님.”
상현이 공적인 전화를 받자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네? 아, 아니에요. 밥 먹으려고 잠시 쉬고 있었어요. 식사하셨어요?”
잠시 조용해진 틈을 못 참고 박인혁이 준형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장난을 걸었다. 그러자 준형이 박인혁을 넘어트리며 암바를 걸었다.
“아, 그럼 된 건…… 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나 상현의 목소리 톤이 높아지자 장난은 금방 중단되었다.
“네네. 어…… 그러면 그쪽에서는 누가 나오는데요?”
“뭐야? 무슨 일 있어?”
“쉿. 아, 아니에요. 말씀하세요.”
상현은 꽤 길게 고원국 대리와 통화를 했다. 중간 중간, 그런 건 환이 형이랑 이야기를 하셔야 할 거에요 등등의 이야기도 나왔다.
그렇게 모든 멤버의 시선이 상현에게 쏠려있을 때, 마침내 전화가 끝났다.
“뭐야? 무슨 일이야? 공연 파토 났어?”
“전광판 이야기 아니야? 전광판 안 해준데?”
준형과 하연이 전화가 끝나자마자 물었다.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일단 공연은 그대로 진행하고, 전광판도 해준데. 방송국에 협조를 얻어서 영상을 따기로 했데.”
“뭐야? 근데 무슨 통화를 그렇게 오래해?”
준형의 질문에 상현이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게…… 우리 두 곡을 더 준비해야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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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erse 14. 비 더 언더그라운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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