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13. 동그라미 (完) - 3권 끝 >
김운철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오치한전까지는 별로 멀지 않았다. 상현은 날씨가 좋아 산책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상현에게는 요즘 들어 생긴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 해야 될 일들은 순차적으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디자인 특허권은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우선 888 X 888의 상품 판매가 급했다. 디자인 특허권이 출원되면 곧바로 도매스틱 브랜드의 판매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상품은 도대체 언제 출시되냐는 문의 쪽지가 상현의 힙합엘이 아이디로 하루에도 열통이 넘게 오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광주 타이거즈의 공연이 있었다. 처음 타이거즈와 협연해서 뮤직비디오를 만들 때만해도 이 정도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었다. 상현을 비롯한 888 크루 멤버들은, 한 번쯤은 꿈에서 광주 UP을 공연해봤을 만큼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내 솔로곡인 게 아쉽네.’
공연 무대에는 888 크루뿐만 아니라 백 밴드로 L&S까지 올라가지만, 상현의 솔로곡이란 것은 변하지 않았다.
본래는 8마디씩 쪼개서 총 6명이 3 벌스를 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뮤직비디오와 공연의 랩이 달라지면 난감하다는 안철승 팀장의 의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랩은 상현의 몫이 되었다.
또 뭐 할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뭐더라?
‘아, 언더키드가 있었지.’
최대한 빨리 시간을 내서 하연과 함께 서울에 가야 했다. 언더 키드 앨범의 피처링 때문이었다.
상현은 언더 키드의 피쳐링 제의를 수락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언더 키드는 하연에게도 피쳐링을 제의했다. 본래 참여하기로 한 여자 래퍼보다 하연의 음색이 더 잘 어울린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고 보면 준형이랑 인혁이 형도 스타즈 레코드랑 콜라보를 한다고 했었지?’
스타즈 레코드의 프로듀서인 우연우가 준형과 인혁에게 콜라보를 제의했다. 조만간 나올 스타즈 레코드의 두 번째 컴필레이션 앨범에 참여하는 것이었는데, 본래 컴필레이션 앨범은 녹음이 끝난 상태였다.
그러니까 스타즈 레코드는 준형과 인혁을 참여 시키고 싶어서 믹싱이 끝난 앨범곡을 갈아엎은 것이었다. 상현과 크루 멤버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줬다.
888 크루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은 너무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상현이 스쳐지나가는 여러 가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 저기요.”
“네? 저요?”
옆을 보니 교복을 입고 있는 한 여학생이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저 부르셨어요?”
“저…… 혹시 으, 음악하시는 분 아니세요?”
“네? 아, 맞아요.”
“패, 패, 팬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발갛게 상기된 얼굴의 여학생이 고개를 두 번이나 꾸벅이며 인사를 했다. 상현은 엉겁결에 여학생의 인사를 받았다.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그를 알아본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종악기사의 공연을 봤던 여중생 무리들과 전주 월디페의 관객들, 그리고 클럽 호미 근처에서 몇 명의 팬들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세종악기사 공연은 여중생들이 먼저 가있던 것이었고, 월디페는 경연 공간이 한정되다보니 보는 사람을 또 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클럽 호미 역시 퍽 더 쇼 비즈를 들었던 힙합 팬들이 바글바글하던 곳이었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상현을 알아보는 대중은 눈앞의 여학생이 처음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상현은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서 어색하게 인사했다. 여학생은 또 한 번 고개를 꾸벅했다. 인사가 끝나자 둘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색하게 서있었다.
“어, 어디 가시던 길이었어요?”
“집이요. 저기, 오치한전이 집이라서…….”
“어? 저도 한전 근처의 카페로 가는데…….”
인사를 나눴는데 따로 가는 건 또 이상했다. 상현과 여학생은 약간의 어색함을 가진 채로 오치 한전으로 함께 걸어갔다. 처음에는 어색함이 맴돌았지만 몇 마디가 오가다보니 금방 이야기꽃이 피었다.
“우와! 그럼 이번에 광주 타이거즈 공연을 하시는 거예요? 광주 업으로?”
“네. 어제 홍보실 팀장님이랑 통화했는데 완전히 확정이 났어요.”
“우와! 우와!”
김혜미란 이름의 여학생은 광주 타이거즈의 엄청난 팬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야구를 좋아했고, 그러다보니 타이거즈 서포터즈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김혜미가 상현을 알게 된 것은 광주 타이거즈 홈페이지를 통해서였다. ‘서포터즈 다이어리’란 블로그를 운영하는 김혜미는 자료를 찾을 게 있어서 광주 타이거즈의 홈페이지에 방문했다가, 우연히 광주 UP의 뮤직비디오를 접했었다.
그리고는 노래에 푹 빠져서 퍽 더 쇼 비즈나, 클럽 호미의 공연 동영상까지 찾아듣기도 했었다.
상현과 김혜미는 짧은 거리였지만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힙합에 대해 전혀 무지했던 그녀는 힙합엘이라는 사이트가 있는 것도 몰랐고, 거기에 888 크루의 인터뷰가 있는 것도 잘 몰랐다. 아니, 크루라는 개념 자체를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꼭 인터뷰 찾아볼게요. 그리고 서포터즈 언니들한테 말해서 광주 업 현수막도 만들어볼게요!”
상현과 김혜미는 웃으면서 헤어졌다.
상현은 웃기게도 멀어지는 그녀를 보면서 내가 진짜 뮤지션이 됐구나라는 실감이 들었다.
광주 타이거즈 공연이 끝나면 더 많은 사람이 알아보겠지? 시간이 흐를수록 대중들은 이상현이란 사람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테고.
누군가는 자신을 롤 모델 삼아 랩을 시작할 것이고, 자신과 상관없이 써졌던 한국 힙합의 역사에는 이제 그의 이름도 새겨지게 될 것이었다.
‘그때쯤이면 내 이름 앞에 랩 스타란 수식어가 붙어 있을까?’
상현은 불현듯 아주 큰 동그라미가 생각났다.
두 팔을 활짝 펼쳐도 다 만질 수 없는, 아주 큰 동그라미를 그리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아주 큰 동그라미를 그리는 게 아닐까? 때론 싸우고, 다투지만 결국은 아름다운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 같으면서도, 또한 당연히 그러하다는 듯 순리대로 돌아가는 동그라미.
상현은 문득 자신의 랩이 가져올 힙합 씬의 변화에 대해 두려워했다는 게 우습게 느껴졌다. 어차피 자신은 힙합이라는 아주 큰 원 안에 조그마한 원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 원 안에는 상미의 이름도 있을 것이고, 888 크루의 이름도 있을 것이었다. 남들의 원보다 아주 조금 크다는 이유로 우월감을 느낄 이유도 없었고, 남들의 원보다 작다는 이유로 열등감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
상현이 바보 같은 걱정을 하지 않아도, 그가 리스펙했던 수많은 뮤지션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원을 그리고 있었다.
흔히 힙합 문화를 이야기 할 때 ‘원을 그린다’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길거리에서 탄생한 힙합퍼들이 어떠한 행위를 할 때 주변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서 구경하는 것에서 탄생한 말이었다.
‘혹시 내가 자만했을까?’
상현은 스스로가 작은 성공에 도취된 것이 아닌가 반성했다. 그러니까 그런 바보 같은 걱정을 했던 것이었다. 다른 것은 신경 쓸 필요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간단했다.
많은 생각들이 정리가 됐고, 그것은 어느새 하나의 가사가 되었다. 핸드폰을 들어 재빨리 가사들을 기록했다. 흥얼거리면서 멜로디를 붙였다.
‘동그라미’라는 노래가 만들고 싶어졌다.
서로 잘못한 건 없지
서로 잘한 것도 없지
먼저 물러서면 되잖아
우리들은 용기가 없잖아
그저 생각이 다른 것뿐
지금 멋진 팀이지만
우리도 싸울 때도 있지
그렇다면 손을 들고-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그려 아주 많이.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그려 아주 많이.
흥얼거리던 상현은, 888 크루의 멤버들과 함께 음악을 만들고 싶어졌다. 늘 그랬듯이 다투기도 하고, 한 발 물러서기도 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오늘은 각자 바쁜 일이 있어서 모이지 않는 날이었다.
‘그러고 보면 888이라는 이름에는 동그라미가 여섯 개나 들어가 있네. 이거 펀치라인인데?’
갑자기든 생각에 키득키득 웃던 상현은 이것도 직업병의 일종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집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집이 조용했다. 부엌에 불이 켜져 있는 걸로 봐서 상미는 작업실에 있는 것 같았다.
“상미야, 오빠 왔다.”
“어, 오빠 왔어?”
작업실에서 상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현은 작업실로 향하는 좁은 입구를 지나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널브러져 있는 일곱 명이 눈에 들어왔다.
상미와 하연, 민지는 좁은 침대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함께 만화를 보고 있었다. 우민호는 컴퓨터 앞에서 머리를 싸매며 뭔가를 디자인하고 있었고, 김환과 준형은 바닥에 앉아서 가사를 쓰고 있었다.
“어으, 시원하다.”
박인혁은 작업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 상현이 왔냐?”
“오빠, 지금 오줌 싸고 온 거 아니에요?”
“어? 맞는데?”
“근데 왜 손에 물기가 없어요?”
“어…… 드라이기로 말렸어. 호텔식 화장실이라고나 할까?”
“맞고 씻고 올래요? 그냥 씻고 올래요?”
오민지가 주먹을 흔들자 박인혁은 888 크루에는 청결의 자유도 없다고 투덜거리며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
멤버들은 더러운 형이라고 투덜거리면서 다시 자신의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상현에게 관심을 갖는 이가 없었다.
“뭐야? 다들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상현의 질문에 가사를 쓰던 김환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볼 일은 다 봤는데 너무 심심해서 여기로 왔어.”
“나도.”
“나도, 나도.”
준형과 우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상미가 신간 빌렸다고 하길래 왔어.”
“나도 나도.”
“왜? 내가 언니들 불렀는데 띠껍냐?”
하연, 민지, 상미가 대답했다.
“나는 과제하려고 왔다. 크, 곧 중간고사인데 무슨 과제가 이리도 많은지…….”
손을 씻고 들어온 박인혁이 투덜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책은요? 과제하러 왔다면서요?”
“전공 서적은 항상 마음속에 있는 거야.”
헛소리를 지껄인 박인혁이 준형과 김환의 가사를 구경하며 참견하기 시작했다. 준형은 박인혁의 참견이 심해지자 투덜거리면서 가사를 감췄다.
할 일이 없어진 박인혁은 아직도 우두커니 서있는 상현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좁으니까 구석으로 사라져 줄래? 아니면 작업실에서 나가던지?”
“오빠, 가서 아이스크림 좀 사와. 나는 바밤바.”
“나는 메로나.”
“나는 에로나.”
“나는 코로나.”
“엉……?”
어느새 정신을 차린 상현이 발로 박인혁과 준형을 밀며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좌우로 나동그라진 인혁과 준형이 소리를 질렀다.
“아, 뭐해!”
“좁아!”
“여기 우리 집이거든?”
“닥쳐, 여긴 내 작업실이야. 우리의 개념보다 내의 개념이 더 좁은 거 알지? 그러니까 가서 아이스크림이나 사와.”
“형이 사와요!”
“내가 왜?”
“우리 집이니까!”
“아, 서러워서 못살겠네. 내가 이상현의 실체라고 해서 힙합엘이에 글을 올리던지 해야지.”
박인혁의 농담에 상미가 파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오, 상미야. 오빠의 개그가 그렇게 웃겼어? 크, 역시난 래퍼보다 개그맨이 천직인가?”
“뭔 소리해요? 만화책이 웃겨서 웃은 건데.”
가만히 듣고 있던 우민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박인혁은 멋쩍은 듯이 웃다가 기습적으로 상현을 몰아냈다. 균형을 잃은 상현은 침대 위로 밀려났다.
“아, 오빠 변태야? 언니들 있는 거 안보여?”
엉거주춤한 자세로 침대를 짚고 있던 상현은 상미의 타박에 또다시 갈 곳을 잃고 쫓겨났다. 그러나 전혀 억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상현은 제자리에 서서 작업실 안을 둘러보았다. 보고만 있어도 입가에 미소가 맴돈다.
그 모습을 본 상미가 몸서리를 쳤다.
“오빠 왜 그렇게 변태처럼 웃어? 무슨 실험하고 왔다더니 신약 임상 실험했어? 약을 잘 못 먹었나?”
“너 약했어?!”
만화에 집중하고 있던 하연이 화들짝 놀라서 상현에게 물었다. 박인혁은 ‘고개 숙인 그대, 약한 남자!’라며 이상한 후렴구를 만들어 불렀다.
준형과 김환, 우민호는 여전히 신경 쓰지 않고 자신들의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렇게 888 크루의 작업실은 한참동안 소란스러웠다. 늘 그랬듯이.
그렇다면 손을 들고-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그려 아주 많이.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그려 아주 많이.
< Verse 13. 동그라미 (完) - 3권 끝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