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56화 (56/309)

< Verse 9. Twisted World >

“와일드 카드는 만장일치로 너희가 뽑혔어.”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어안이 벙벙한 희소식에 다시 대기실로 돌아온 L&S앞으로 언더 키드의 리더이자 드러머 김웅각이 찾아왔다.

“그냥 심사위원들 전부다 랩 메탈을 구사하는 밴드를 조금 더 보고 싶었던 거야. 내가 뭐 해준 건 없으니까 오해하지 말고.”

“예!”

평소에 큰 형 대접을 받는 방민식도, 한국 인디 밴드의 대부 언더 키드 앞에서는 고분고분한 아이처럼 보였다.

“이상현 맞지? 888 크루 리더?”

김웅각의 시선이 상현에게 향했다.

“리더는 아닙니다. 리더는 신준형이라는 친구인데, 이번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김웅각은 상현을 잠시 살피더니 씩 웃으며 어깨를 툭쳤다.

“임마, 쇼 비즈가 얼마나 악의적으로 편집했는지 우리도 알아. 우리는 너희한테 원한 같은 거 없으니까 긴장하지 말고. 오히려 팬이나 동생들이 너무 공격한 거 같아서 미안하던 참이었다.”

상현은 김웅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 정도로 덮어진다면 괜히 들출 필요 없겠지.

“원래는 스텝이 알려주는 건데, 그냥 너희 얼굴 한 번 보고 싶어서 형이 왔다. 그래도 우리가 기묘한 인연이 있잖아.”

“네.”

김웅각이 남자답게 웃었다.

“8강전 상대 알아?”

“아니요. 못 들었습니다.”

“대진 추첨했는데, 얄궂다. 너희 상대가 또 골든 핑거야.”

“음…… 골든핑거.”

예상치 못한 말이었지만 대부분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표정 보니 쫄진 않네. 하하.”

덕담을 몇 마디 건넨 김웅각이 대기실에서 나갔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L&S와 미주, 상현은 회의를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골든 핑거를 이길 수 있을까?

결론은 간단했다. 결승전용으로 아껴두었던 노래를 당겨쓰는 것.

“하지만 형, 그건 결승전에서 쓰려던 곡이잖아요.”

차인현의 반문에 방민식이 어깨를 으쓱했다.

“8강에서 떨어지면 결승도 없어.”

“그래도……!”

“곡 아껴서 뭐하게? 그건 네가 만든 최고의 노래잖아. 우리 최선을 다해보자.”

“아…….”

차인현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동안 고민했다. 상현이 이게 이정도로 고민할 일인가 싶을 만큼 고민하더니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민식을 비롯한 L&S 멤버들이 ‘8강은 무조건 이겼다!’라고 기운차게 소리 질렀다. 그렇게 모두 의기투합 하는 와중에 상현은 소외감을 느꼈다.

방민식이 말하는 ‘비장의 무기’를 아직 못 들어본 사람이 상현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 두 시고, 우리 무대가 여덟시쯤이지? 여섯 시간 남았네.”

“제가 뭐 도와드릴 건 없나요?”

상현의 질문에 차인현이 외면했다.

L&S 멤버들은 차인현이 상현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 곡의 ‘컨셉’ 때문에 상현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것 같았다.

방민식이 어색하게 웃으며 총대를 멨다.

“상현이 너는 미주랑 펜션으로 돌아갈래? 이 노래에는 미주 파트도 없으니까.”

“그럼 그렇게 할게요.”

별로 서운하진 않았다. 저 인간이 하루 이틀 저러는 것도 아니고.

결국 상현은 LOC에서 마련해준 밴드 연습실에서 나왔다. 미주는 사운드 밸런싱을 한다며 한 두 시간 정도만 도와주기로 했다. 연습실 옆의 화장실을 들렀다가 펜션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차인현이 연습실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서먹한 사이라지만 인사는 해야겠지.

“형, 들어가 볼게요. 고생하세요.”

“어…….”

상현의 인사에 차인현이 반응했다. 그러나 그 반응이 좀 애매했다. 인사를 받는 것도 아니고, 안 받는 것도 아니고.

상현도 이제 차인현의 거리 두기에 익숙해졌기에 별 생각 없이 연습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인현이 상현의 팔을 잡았다.

“상현아.”

“네?”

“잠깐 얘기 좀 할까?”

“어…… 말씀하세요.”

차인현은 말을 걸고도 한참동안 주저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에…….”

그때, 누군가 상현을 불렀다.

“상현아!”

“어? 하연이 너가 여기 왜 있어?”

“그냥 왔어. 어차피 펜션이랑 가깝잖아.”

하연은 상현 뒤의 차인현을 뒤늦게 발견하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빠. 뭐하고 계셨어요?”

“그냥 입구에서 우연히 만났어. 음료수 먹을래?”

차인현이 자판기를 가리키자 하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상현아 너 지금 연습해?”

“아니, 저녁 공연에는 내 파트가 없어.”

그때 차인현이 상현의 옆을 지나 연습실 안으로 들어가려했다.

“형. 할 말 있다고…….”

그러나 차인현은 상현의 말을 무시하고는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중요한 말 같았는데? 저 인간은 왜 저래?’

상현도 이제 차인현이 마냥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냥 그가 좋아하는 L&S의 멤버이기 때문에 허물을 찾지 않으려는 것뿐.

“너 할 일 없으면 나랑 장 좀 보러가자.”

“장? 저녁밥?”

“응. 아까 가위바위보해서 나랑 환이 오빠랑 가야하는데, 환이 오빠가 민호 오빠랑 뭐 하길래.”

“시켜먹지……. 해먹는 거 귀찮지 않아?”

“배달음식을 다들 지겨워해서. 된장찌개 좀 끓이려고.”

“너가?”

“민지 언니랑 같이 하겠지.”

“그래. 절대 혼자하지 마라. 라면도 못 끓이는 게.”

상현이 하연의 이마를 툭 쳤다.

저번에 작업실에서 다 같이 라면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벌칙에 걸린 하연이 끓여온 라면이 한강수였다. 4봉을 끓였는데, 물이 얼마나 많던지 ‘맑은 라면’이라고 한참을 놀렸다.

“웃기지마! 내가 한 봉 이상을 끓여본 적이 없어서 그렇거든!”

“아아, 그렇구나. 그것 참 새로운 사실이네. 이제 장보러 가자.”

“지금 그 영혼 없는 말투는 뭐야?”

“근처에 마트가 있나?”

상현은 하연과 투닥거리다가 마트로 향했다.

한참 뒤, 연습실에서 차인현이 나왔다. 차인현은 텅 비어있는 복도를 쳐다보다가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갑자기 떠오른 멜로디나 곡의 영감을 위해 가지고 다니는 기계였다.

녹음기를 내려 보던 차인현은 설정창으로 들어가 기능을 실현시켰다.

흑백의 녹음기 화면에 모래시계가 나타나 빙글빙글 돌더니, 곧 기능이 완료되었다.

-Delete.

차인현은 다시 작업실로 들어갔다.

곧 복도는 고요해졌다.

***

“저기 나무 밑에서 볼까요?”

“무대에서 너무 멀잖아. 더 가까이 가자.”

“으, 저녁인데도 덥다.”

“습해서 그래.”

888 멤버들과 미주, 상현은 공연 시간에 맞춰 무대 근처에 자리 잡았다.

8강전은 14강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관객이 많았다. 제대로 된 사회자도 있었고, 악기 세팅 시간도 넉넉히 주어졌다. 잠시 뒤 L&S 멤버들이 올라와 무대 세팅을 시작했다.

“L&S 파이팅!”

L&S를 응원하는 관객들의 외침이 간헐적으로 들렸다. 상현은 생각보다 L&S를 응원하는 외침이 많아서 뿌듯함과 고마움을 느꼈다.

‘기대된다.’

상현이 보기에 방민식은 약간의 결정력 부족이 있다. 셋 리스트를 짤 때도 남들보다 배는 고민한다. 그런 방민식이 고민 없이 최고라고 치켜세웠다는 것은, 정말 좋은 곡이란 의미였다.

그때 근처에 있던 여자 둘이 상현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어! 혹시 랩 하시는 분 아니에요?”

“아…… 맞아요.”

“혹시 사인 한 장 해주실 수 있을까요?”

상현은 사인이 없어서 난감했다. 사인 대신 사진을 찍었다. 상미가 냉큼 나서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항상 응원할게요! 파이팅!”

“클럽에도 가입할게요!”

상현은 그의 음악을 어디서 들을 수 있는지 묻는 팬들에게 888 크루의 싸이월드 클럽 주소를 알려줬다.

“오오! 연예인!”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준형과 상미의 말에 상현이 웃었다.

“봤지? 내 인기?”

“좋냐? 좋아? 아주 입이 귀에 걸렸네?”

미주가 상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좋았다. 여자가 말을 걸어서 좋은 게 아니라, 누군가 자신을 음악가로 분류한다는 것이 좋았다.

그러는 사이 악기 점검이 끝나고, 마이크 점검까지 끝났는지 선글라스를 낀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왔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사회자는 L&S를 소개하고,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상현의 이야기도 잠깐 나왔다.

“L&S가 다른 팀과 차별화된 것이 있다면 래퍼의 존재일 텐데, 이번 무대에는 래퍼가 없는 건가요?”

리더인 민식이 형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이번 곡에 래퍼는 없지만 곡 자체가 블랙뮤직의 감성을 많이 담고 있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

‘블랙 뮤직의 감성이라?’

상현은 미주가 차인현의 노래를 듣고 랩 같은 느낌이라 평했던 기억이 났다.

언뜻 R&B 싱어들이 블랙 뮤직 비트에 라임을 맞춰 부르는 노래들이 떠올랐다.

크리스 브라운, 로빈 시크(Robin Thicke)의 몇몇 노래. 한국 뮤지션으로는 그레이나 자이언티, 혹은 지드래곤. 여러 노래들이 간헐적으로 떠올랐다.

이제 사회자의 진행은 곡 소개로 넘어갔다.

“이번 경연에서 부를 곡의 제목은 뭔가요?”

“원(One)입니다.”

“다 함께 만든 곡인가요?”

“아뇨. 작곡과 작사는 보컬 차인현 군이 끝냈고, 저희는 세션만 도왔습니다.”

“그럼 차인현 씨가 곡 좀 소개해주세요.”

이제 사회자의 인터뷰는 차인현으로 넘어갔다.

“이 노래는 제가 벼랑 끝에 있을 때 발견한 곡입니다. 저에겐 의미가 큰 노래입니다. 곡 주제는……”

마이크를 건네받은 차인현이 간단히 곡을 소개했다. 인터뷰는 짤막하게 끝났다.

‘응?’

상현은 인터뷰를 끝낸 차인현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받았다. 아니, 느낌이 아니다. 그는 정말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차인현은 곧 고개를 내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상현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차인현이 이를 악물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들지?

“다같이! L&S!"

와아! L&S-!

한참동안 호응을 유도하던 사회자가 무대에서 내려갔다. 심사위원들이 몇 마디 덕담을 건넸고, 곧 큰 함성소리와 함께 드디어 무대가 시작되었다.

탁- 탁-

드럼 스틱을 두드리던 황인수가 연주의 포문을 열었다.

L&S는 이번 전주 월디페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우승을 하든 못하든 순위권인 8강에 안착하며, 쇼 비즈 인터뷰라는 화제성을 ‘음악성의 증명’으로 전환시켰다.

이제 L&S를 거론하는 사람들은, ‘쇼 비즈’와 ‘전주 인디 페스티발 8강’을 함께 거론할 것이다. 그것은 곧 좋은 이미지의 형성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고.

‘8강만 뚫으면 우승도 노려볼 수 있을 텐데.’

드럼, 기타, 베이스의 연주 뒤로 이미 녹음된 전자 피아노, 스트링, 신디사이저 등의 여러 악기가 깔렸다.

평소 인이어를 잘 끼지 않는 방민식과 용준까지 인이어를 끼고 연주하고 있었다. 그만큼 평소보다 어려운 곡이었다.

“멋지다…….”

전주만 듣고 미주가 감탄했다.

오늘 미주가 키보드를 치지 않는 이유는 연습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 컨츄리한 사운드를 좋아하는 L&S의 평소 음악과는 다르게, One은 수많은 전자 사운드를 백 그라운드로 받는다.

“와!”

상현도 감탄했다. 그러나 상현이 감탄한 이유는 미주처럼 연주에서 뭔가를 느낀 것은 아니었다.

상현은 음악을 잘 모른다. 화성학도 모르고, 악기도 잘 모른다. 그런 상현이 감탄한 이유는 One이 2005년의 음악을 뛰어넘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마치 2010년 이후로 음악 장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수많은 크로스 오버가 일어나던 시기의 노래 같다.

예를 들면 장기하 밴드나 혁오 밴드, 드레드 밴드처럼 굳이 장르에 국한 받지 않고 완전히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느낌.

하지만 분명한 건 듣기 좋다는 것이었다.

전주는 꽤 길었다. 그러나 귀에 감기는 멜로디와 전자 악기를 이용한 풍부한 사운드는 관객들을 지루하지 않게 잘 붙잡아 두었다.

상현은 편한 마음으로 무대를 응시했다.

이건 왠지 좋은 음악일 것 같다.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그때,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차인현이 고개를 들어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차인현의 입을 열렸다.

상현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 Verse 9. Twisted World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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