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8. 전주 월드와이드 인디 뮤직 페스티벌 >
***
“야야! 상현아!”
상현은 호들갑을 떠는 준형에게 이끌려 팬션에 비치된 컴퓨터 앞으로 끌려갔다.
“봐봐. 게시판에 오늘 영상 올라왔어.”
“어디? 나도 봐봐.”
준형의 호들갑을 들은 하연이 고스톱 패를 내려놓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참 이기고 있던 민지와 상미가 투덜거렸다. 하연이 다가오자 비누와 로션향이 섞여 좋은 향기가 났다.
“와, 반응 괜찮네?”
“이 새끼 요즘 완전 슈퍼루키 취급이라니까.”
준형의 말처럼 캠코더로 찍은 L&S의 영상, 그중 상현이 랩하는 부분이 먼저 재생되는 영상에는 2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려있었다.
부정적인 댓글보다 긍정적인 댓글이 많아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상현은 아직도 댓글을 볼 때면 뭔가 낯간지럽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밴드 음악을 무시하던 인터뷰는 조작인 듯. 그랬으면 저렇게 밴드랑 사이좋을 리가 없지. 인터뷰도 같이했는데, 진짜 그랬으면 밴드가 엿 같아서 공연 같이 안하지.
-짧아서 이걸로 평가가 됨? 그리고 어지간한 래퍼들 다 이 정도는 할 텐데?
-동감. 무슨 20초짜리 랩을 좋다 나쁘다 말하고 앉아있음. 앨범이나 믹스테잎 나오길 기다려야 함.
-존나 짧긴 한데, 악기 세션이 추가될 때마다 플로우가 미묘하게 바뀜. 드럼 세션 들어갈 때는 박자를 쪼개고, 키보드 들어갈 때는 당기는데? 이걸 못 느낀다고?
-개소리도 수준급인 듯.
-L&S가 14강 진출했으니까, 내일도 랩 하지 않을까요? 중간에 가사 보면 랩 메탈을 보여준다는 부분도 있는데.
-근데 이상현은 888 크루 아님? 왜 밴드에서 랩하고 있음?
-쇼 비즈 인터뷰 보면 888 크루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L&S 객원 래퍼였다고 했음. L&S랑 888이랑 존나 친한듯.
-이 사람 누군가요? 랩 네임이 이상현인가요?
-본명임. 랩 네임 없는 듯.
심취해서 댓글을 읽던 하연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 랩 네임(Rap Name) 정한다며?”
“아, 맞아. 배가(Vega)님이 호미(Hommie) 홈페이지에 올려야한다고 최대한 빨리 달랬잖아.”
상현을 제외하고는 888 크루 멤버들은 모두 랩네임이 있었다. 보통 래퍼 지망생들은 랩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랩 네임부터 짓곤 한다.
준형의 랩네임은 제이브로(J.Bro)였고, 하연은 루시(Lucy)라고 지었다. 그러나 상현은 랩네임이 없었다.
랩네임은 보통 별명에서 이어지는 경우가 많고, 때로는 속뜻을 먼저 생각하고 고심해서 만들기도 했다.
상현은 평생 할 음악이고, 평생 따라다닐 랩 네임이기에 작명을 꽤 오랫동안 고민했었다.
“얼마 전에 정했어.”
“오? 뭘로?”
“Five Six."
56.
“파이브 식스? 그게 무슨 의민데?”
하연의 질문에 상현이 고개를 저었다. 비밀이었다. 이건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속뜻이 있었다.
상현에게 2005년은 아주 큰 의미를 지닌 해였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어쨌든 현실에서 일어난 과거로의 ‘회귀’를 경험한 해였다.
18살이 되어 다시 새롭게 인생의 페이지를 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그 저변에는 분명 38살인 이상현이 존재했다.
음악 커리어 출발점인 2005년.
18살의 자신과 38살의 자신이 합쳐진 2005년.
그래서 상현은 18과 38을 더해서 56이라는 간단한 랩 네임을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이 뜻을 어떻게 설명하겠어?’
상현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오륙이 오빠 랩 네임이야? 구린데?”
“오륙이 아니라 파이브 식스!”
“그거나 오륙이나.”
상미의 말에 상현은 약간 상처받았지만, 어깨를 으쓱했다.
“랩 네임은 별로 안중요해. 잘하면 장땡이야.”
사실이 그렇다. 한국에는 컨트롤(Control)이란 곡으로 널리 알려진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는 랩네임으로 본명을 그대로 사용했다.
또한 얼핏 들으면 난해한 이름을 가진 ‘넋업샨’이란 래퍼는, 공연 포스터에 올라간 넋업샨 세 글자로 수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래퍼였다.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닌데, 멋이 없잖아.”
“멋있거든! 심플 이스 베스트(Simple is Best) 모르냐?”
“그래, 그래.”
준형이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하연과 상미, 민지는 다시 고스톱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상현은 젠장! 크게 외치고는 쇼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 난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그렇게 별론가?
한참 쇼파에 누워 자신의 랩 네임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던 상현은, 문득 눈을 돌리고는 기분 좋게 웃음을 지었다.
펜션 거실에 펼쳐진 광경 때문이었다.
상미와 하연, 민지는 세 자매처럼 모여서 고스톱을 치고 있었고, 준형은 컴퓨터를 만지며 힙합 사이트 게시판을 살피다가 지겨워졌는지 고스톱에 훈수를 두고 있었다.
‘다행이야.’
L&S의 전주 인디 뮤직 페스티발 제안을 거절할 때만해도, 이렇게 가족 같은 존재가 금방 생길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실 참가를 결정하고도 상미의 광장 공포증이 마음에 걸렸는데, 하연과 민지, 준형이 옆에 있으니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게 첫 크루 여행인가? 펜션에 와있으니까?’
펜션은 LOC 그룹 계열사에서 경연 참가자의 가족들에게 절반의 가격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LOC에서 따로 마련한 숙소에서 지내는데, 상현은 상미와 888 크루 멤버기 때문에 펜션 쪽으로 건너왔다.
원래는 미주도 오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부모님이 전주로 오셔 같이 있었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왔나보다!”
준형이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888 크루 멤버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김환이 치킨을 들고 펜션 앞에 있었다.
그리고 김환 옆에는 장비를 바리바리 지고 있는 한 남자가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들어오세요.”
“아, 안녕하세요.”
왠지 긴장된 표정의 사내가 무거운 짐을 한편에 쌓아놓았다.
“에이 형, 네 마리 밖에 안 사왔어요? 사람이 몇 명인데…….”
“일곱 명이서 네 마리면 충분하지. 얼마나 사와야 되냐? 무겁다고.”
준형의 타박에 김환이 투덜거렸다.
“형. 민지 누나가 얼마나 먹는지…… 악!”
민지에게 옆구리를 꼬집힌 준형이 우는 사이, 장비를 다 내려놓은 사내가 다소곳(?)하게 상현의 앞에 섰다. 상현이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환이 형한테 들었어요. 우민호 씨 맞으시죠?”
“네…….”
“제 이름은…….”
“알아요! 이상현! 완전 좋아합니다!”
“…….”
우민호의 난데없는 고백에 펜션은 잠시 고요해졌다. 순간, 이상현을 이상형으로 들었던 상현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우민호는 멤버들의 오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불거진 얼굴로 여전히 다소곳(!)하게 서있었다.
“그 좋아한다는 게 혹시 유전학적으로……?”
“네? 아, 아뇨!”
우민호가 손사래를 치며 자신의 여자 친구 사진을 보여주었다. 상현은 그런 게 아님을 알고 있었음에도 과장되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분위기가 한결 좋아졌다. 888 크루 멤버들과 우민호가 잠시 인사의 시간을 가졌다.
우민호.
2004년도에 김환과 함께 홍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그래피티(Grafity) 크루 겟어그립(Get a Grip)의 멤버.
그러나 우민호는 직접적인 그래피티보다는 그래피티를 하는 크루원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음악과 함께 비디오 클립으로 만드는 것에 더 치중했던 멤버였다.
‘뮤직비디오.’
상현은 퍽 더 쇼 비즈 덕분에 미디어앰플 사에서 소정의 광고비를 지급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번개같이 떠오른 생각이 이번 년도 안에 정식 출시될 유투브(Youtube)였다.
검색해본 결과 2005년도 10월쯤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유투브는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될거야.’
정확히는 모르지만, 처음 유투브는 동영상 업로드와 뷰어 로딩(시청 대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상용화 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고 화질의 동영상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을 도입해 가능성을 보였고, 구글에 인수가 되었다. 그 뒤로는 전 세계 각국의 버전으로 출시되었고.
‘아니, 반대인가? 구글에 인수되어서 기술이 도입됐던가?’
그리고는 알다시피 전 세계적으로 몇 십 억 명이 이용하는 사이트가 되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20억 이상이 조회수를 기록했고, 그는 뮤직비디오 하나로 단숨에 미국 전역의 스타가 되었다.
물론 조회수에 비례해 광고 수익도 발생한다. 게재 방식에 따라 다르고, 환율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조회수 1당 1원의 수익이 발생한다.
하지만 상현이 노리는 것은 광고 수익이 아니었다.
돈은 다른 방법으로도 벌 수 있다. 그가 노리는 것은 오픈 도어(Open Door)였다.
브랜드화 된 유투브 채널은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다. 만약 888 크루가 'Korean HipHop‘이라는 채널을 만들고, 그것을 2005년부터 독점할 수 있다면?
단순히 음악 활동의 저변을 넓히는 것을 떠나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한국-세계’의 접점이 되어 해외 뮤지션과의 연결고리가 될 수도 있고, 888 크루가 갖는 힘도 거대해진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뮤직비디오 디렉터다. 음악 프로그램이야 음악적인 욕심으로 알음알음 배운다지만, 영상 같은 경우는 전문가의 손길에 맡기는 것이 낫다.
상현은 시각 디자인과인 김환에게 MV 디렉터 섭외를 부탁했고, 그렇게 만나게 된 것이 우민호였다.
“내일 바로 촬영 가능하시겠어요?”
“물론이죠. 그런데 마이크 라인도 따야하고, 앵글도 잡아야 하니까 주최측에 협조가 좀 필요해요. 그런 부분은 아직 진행이 안됐죠?”
“네. 저희가 그쪽에는 무지해서.”
“주최측 연락처 주시면 제가 이야기를 해볼게요. 888 크루의 이름으로 해야 하나요? 아니면 L&S의?”
“일단은 L&S로 하고, 이야기가 진행되면 주체가 888 크루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알고 보니 우민호는 우연히 ‘퍽 더 쇼 비즈’를 듣고서 888 크루에 큰 매력을 느꼈었다. 그러다가 같은 크루에서 활동했던 김환의 연락을 받고 단번에 수락했다.
“페이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죠. 우선 제작비용은 당연히 저희가 지불하겠습니다. 제작비용에는 우민호 씨 본인 소유의 장비 대여료까지 포함하고요. 물론 이런 제작비용은 페이에 포함하지 않습니다.”
상현은 재능기부, 열정 페이 같은 단어를 혐오했다. 정당한 노력과 수고에는 정당한 비용을 제시해야 한다.
“제가 사실 이런 일의 적정 가격을 몰라서……. 보통 비디오 클립 한 편에 얼마 정도 받나요?”
상현의 질문에 우민호가 우물쭈물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작비용은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지만, 페이는 돈 말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요?”
“네. 말씀해보세요.”
“그…… 저도 888 크루에…….”
“네?”
“제가 영상뿐만 아니라, 다른 아트웍이나 그래피티…… 로고 디자인 같은 것도 좀 할 줄 아는데……. 무, 물론 엄청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히…….”
“네?”
“무, 물론 888 크루는 음악 크루니까 음악을 해야겠지만. 저, 저도 디제이 경력도 있고, 작곡이나 그런 것도 어느 정도는…….”
상현은 말끝을 심하게 흐리는 우민호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 상현이 침묵하자 땀을 흘리던 우민호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조, 좋아합니다! 같이 하고! 싶습니다!”
“……어머!”
툭.
하연이 먹고 있던 닭다리를 떨어트렸다.
우여곡절 끝에 우민호는 뮤직 페스티발 중 ‘뮤비 디렉터 겸 디제이’로 888 크루에 합류했다. 집은 대전이고, 활동 지역은 서울이지만 자주 광주로 내려오겠다는 의사까지 밝혔다.
그렇게 경연 첫 날이 지나고, 14강전이 기다리는 14일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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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erse 8. 전주 월드와이드 인디 뮤직 페스티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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