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8. 전주 월드와이드 인디 뮤직 페스티벌 >
12일 전야제로 시작한 페스티벌.
경연은 13일 토요일, 14일 일요일, 15일 월요일(광복절 휴일)까지 3일 동안 이어진다. 경연을 위해 L&S가 준비한 곡은 총 6곡.
13일에 2곡. 14일에 2곡. 15일에 2곡.
경연의 시작인 오늘, 13일에는 총 25팀이 참가한다.
그중 11팀이 떨어지고 14팀이 뽑혀서 14일의 14강에 진출.
이어지는 14일 오전에 14강을 통해 7팀을 뽑고, 한 팀은 심사위원의 재량으로 와일드 카드가 되어 추가 합격된다.
그리고 14일 저녁에 벌어지는 8강전.
이 8강전에서 승리한 4팀만이, 모든 관객의 시선이 몰릴 마지막 날의 경연에 진출할 수가 있다.
또한 우승팀과 준우승 팀은 상금과 함께 폐막식의 대미를 장식하는 축하공연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L&S! 통로에 대기해주세요!”
조연출의 말에 차인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민식이 형이랑 인수 형은 왜 안와?”
때마침 헐레벌떡 뛰어오는 방민식과 황인수가 보였다.
“아 씨, 오줌 마려운데.”
“그러니까 뭔 물을 그렇게 마셔요? 형 하마에요?”
“으으.”
“L&S! 지금 대기 안하면 실격패입니다!”
“갑니다!”
상현은 부산을 떠는 L&S 멤버들을 지켜보며 웃었다. 이렇게 어리바리 하다가도 무대에만 올라가면 멋있는 형들로 변한다.
‘오늘 내 역할은 주인공이 아니라, 서포트다.’
상현은 마음속으로 최고의 서포트를 할 것이라 다짐하며 대기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와아아!
멀리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경연이 끝났나보다. 드디어 우리 차례다. 심호흡을 하던 방민식이 급하게 멤버들의 손을 모았다.
“얘들아. 1차 예선에서 절대 떨어지면 안 된다. 알지? 우리 지금 밴드 씬에서 나름 핫하다.”
“그 핫이 잘해서 핫한 게 아니잖아요? 쇼 비즈니스 인터뷰 때문이지?”
“아무튼 핫하잖아! 그리고 우리가 못하냐? 우린 충분히 핫할 자격이 있어!”
민식의 말대로 현재 L&S는 인지도가 생기는 중이었다.
유명 밴드였던 ‘언더 키드’, 그리고 트러블의 중심인 ‘888 크루’와 얽힌 쇼 비즈니스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또한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민식의 말대로라면 ‘고음병치료제’인 1집 앨범이 몇몇 리뷰어들 사이에서 ‘그런지 & 네오소울 & 컨츄리’의 한국적 해석이라며 재조명되기도 했다.
“가자! 앨엔에스! 로컬 스피릿!”
방민식의 선창에 용준과 황인수, 차인현이 후창했다.
“가자! 엘엔에스! 롱 섹스!”
“야이 미친 새끼들아!”
멍하니 듣고 있던 조연출이 컥하고 웃는 소리를 BGM삼아 상현을 제외한 L&S 멤버들이 무대에 올랐다.
25팀이나 참여하는 1차 예선이기 때문에, 각 팀에게 주어진 시간은 5분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은 5분 안에 2곡을 연주해야 하는데, 그것은 암묵적으로 ‘편곡’을 요구받은 것과 같았다.
이럴 때는 첫 번째 곡의 아웃트로와 두 번째 곡의 인트로를 잇는 게 정석적인 편곡이었으나, L&S에는 상현이라는 래퍼가 있었기에 나름대로 재미있는 시도를 기획하게 되었다.
오늘 상현의 역할은 첫 번째 곡과 두 번째 곡을 잇는 것이다. 관중들의 이목을 끄는 랩을 하고, 바로 L&S에게 포인트를 넘겨주는 역할.
‘첫날 경연에서 너는 지루해지기 쉬운 곡의 인터벌을 책임져줘. 나머지는 형들이 할 테니까.’
상현도 경연곡인 6곡 전부에 랩으로 참여하는 것을 바라진 않았다. L&S에는 상현이 리스펙트하는 L&S만의 감성이 있고, 그들만의 음악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 저 자식들은…….’
상현은 언제든지 튀어나갈 수 있게 마이크를 잡고 대기하다가 저 멀리서 지나가는 밴드 ‘골든 핑거’를 발견했다. 사사건건 자신을 방해하는 이경민의 뺀질거리는 얼굴도 보였다.
‘저 자식들도 참여했구나.’
승부욕이 불타오르는 순간 L&S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상현이나 민식의 생각보다 L&S는 유명했다.
순수한 음악적인 성과로 얻은 인지도가 아니라는 점은 아쉬웠지만, 어쨌든 이름값이란 많은 것을 주는 법이었다.
“쟤들이 걔들이지? 그 888이랑 인터뷰한 애들?”
“쇼 비즈니스?”
“퍽 더 쇼 비즈!”
경연을 끝낸, 혹은 대기 중인 밴드 플레이어들이 L&S를 보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근데 그 가사가 다 사실인가?”
“다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쇼 비즈가 침묵하는 것을 보면 주요 팩트는 맞는 말이 아닐까?”
“글쎄. 내가 보기에는 그냥 쇼 비즈가 상대할 가치도 못 느끼고 침묵하는 것 같은데? 어쨌든 노이즈 덕분에 잡지 판매량은 늘었다면서.”
“상대할 가치를 못 느끼기에는 쏟아지는 비난이 장난이 아니던데? 인터넷에 기사도 몇 개 올라오고.”
“그래봐야 밴드나 힙합 씬에서만 아는 이야기지. 대기업이 그런 거 신경 쓰겠냐?”
“언제부터 쇼 비즈가 대기업이었냐?”
“작년에 계열사 편입됐잖아.”
“아, 근데 생각보다 힙합 팬들이 많더라. 난 한국에 그렇게 힙합 팬이 많은지 몰랐어.”
밴드 플레이어들 중에는 아직도 L&S를 어리석게 보고 888 크루를 건방지게 보는 팀들이 많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팀도 많았지만.
그러나 서로 다른 두 부류가 공통되게 느끼는 것이 있었다. 바로 한국에 힙합이라는 문화가 태동중이라는 것.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내년도 월디페(월드 와이드 인디뮤직 페스티벌의 줄임말)의 경연 부분에는 랩 부분이 신설된다는 말도 있었다.
“근데 밴드 경연 심사위원에 언더 키드 형들 있잖아. 그 형들은 어느 쪽이지?”
“888은 싫어할 수 있어도 L&S를 싫어할 것 같진 않은데? 그 형들이 밴드 플레이어한테 쪼짠하게 구는 거 본 적 있냐?”
“근데 따지고 보면 언더 키드 형들 인터뷰가 까인 거는 L&S나 888 애들이랑 상관없잖아. 그냥 잡지사에서 결정한 거지.”
“아니지. 888 놈들이 일부러 노이즈 마케팅하려고 자극적이고 이슈몰이 할 수 있게 인터뷰를 한 거잖아.”
“내 말이 그 말이야.”
“야야, 시작한다.”
“얼마나 잘하나 보자.”
숨을 크게 들이 킨 황인수가 드러밍을 시작했다.
밴드 플레이어, 관객, 심사위원이 L&S의 무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늘 L&S가 부를 두 곡은 그들 특유의 감성이 들어간 곡이었다. 첫 번째 곡은 ‘붕어빵’이란 곡이었고, 두 번째 곡은 ‘Drawing’이란 곡이었다.
두 곡은 상현이 특히 좋아하는 곡이었다.
‘붕어빵. 그리고 Drawing이라면 일차는 거뜬히 통과하겠지.’
상현은 처음 일곡병원에서의 L&S 공연을 기억하고 있었다.
화려한 고음과 어울리지 않는 보컬톤.
지르지 않고서는 올라가지 않는 음역대.
그때의 편견 때문에 처음에는 L&S에 음악성에 의구심을 품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같이 작업을 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꿨었다.
확실히 L&S의 음악은 시대를 잘못 타고 나왔다. 5년 정도만 뒤에 나왔다면 충분히 대중적인 시류를 탈 수 있는 음악이었다.
L&S는 표현력과 전개력을 중시하는 ‘언니네이발관’, ‘그레이’, ‘루시드폴’ 같은 뮤지션들이 풍기는 냄새와 비슷한 냄새를 풍겼다.
그러나 2005년의 밴드 음악은 메인스트림, 언더그라운드를 가리지 않고 비슷한 구도로 노래가 전개되는 경향이 있었다.
도입부로 잔잔하게 시작해서 노래가 고조되면서 클라이막스에서 고음으로 터지는 방식.
이런 방식은 L&S에는 정말 맞지 않았다.
때문에 L&S는 절치부심해서 대중성과 음악성을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드디어 오늘 그것을 평가받을 차례였다.
-난 머리가 좋아. 넌 꼬리가 좋아.
리버브가 잔뜩 들어간 마이크를 타고 차인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무대를 채우기 시작했다.
붕어빵은 용준과 차인현이 작곡한 곡을 미주가 가사를 붙이고 편곡한 곡이다. 가사도, 곡의 컨셉도, 진행 방향도 모두 미주가 정했는데, 한 겨울에 커플이 붕어빵을 먹으면서 투닥거리는 내용이었다.
‘아저씨 일단 붕어빵 주세요.’라는 후렴구가 쉽고 재밌는, 미디움 템포의 발랄한 노래였다.
-아저씨 일단 붕어빵 주세요.
후렴을 부를 때는 방민식이 후렴구를 가성으로 함께 불러, 풍부한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노래는 짧았지만 반응은 매우 좋았다.
앞서 나온 밴드들 중 ‘우리의 연주 실력을 보여주지!’하면서 만든 장엄하고 긴 노래보다 훨씬 좋았다.
많은 관객들이 처음 듣는 곡임에도 부구하고 ‘아저씨 일단 붕어빵 주세요.’라는 부분을 따라 불렀고, 심사위원들도 고개를 까딱거렸다.
마지막 후렴이 끝나며 노래가 끝났다.
‘응? 벌써 끝났나?’
심사위원들이 의문을 표했다. 반드시 편곡을 요구한 것은 아니지만 기승전결을 유지한 채 두 곡을 연속으로 부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그 순간, 어떤 사운드도 들리지 않는 텅빈 무대 위로.
"Yo-!"
약간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등장했다.
난데없는 소리에 딴 짓을 하고 있던 관객들의 시선이 한방에 쏠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등장. 미디움 템포의 사랑 노래가 가져다주던 여운이 한 방에 날아가 버리고, 낯선 호기심이 무대 위로 쏠렸다.
“뭐야?”
“그 친구 아니야? 팔팔팔?”
갑자기 등장한 상현을 알아보는 이들도 있었다.
호의적인 눈빛도, 적대적인 눈빛도 있었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상현의 랩에 집중했다는 것이었다.
“Shout out L&S!"
날카로운 상현의 목소리가 L&S에 대한 리스펙을 표함과 동시에 일렉 베이스가 묵직한 연주를 시작했다.
베이스 & 랩.
그 기묘한 조합은 심사위원들 역시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전주 월디페를 위해 준비한 이번 곡은 세종악기사에서 워크 디스 웨이(Walk this way)를 처음 연주할 때의 방식을 빌려왔다.
이건 완성된 곡의 형태에 랩 하는 것이 아니었다.
베이스로 시작해 드럼-키보드-기타 순서로 사운드가 차곡차곡 쌓여서 반주가 완성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반주가 완성되는 순간, 상현은 관객의 집중력을 차인현에게 물려주고 곧장 빠지는 역할이었다.
일렉 베이스의 시초이자, 따뜻하면서도 강인한 소리를 내는 특징을 가진 프레시전 베이스가 상현의 랩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몰라, 우리가 누군지.
Independent 밑바닥에 붙은 누룽지.
쉴 만큼 쉬고 또 쉬었지. 묵은지.
이제 드럼이 들어올 걸 박자는 두둠칫.
극단적으로 키운 마이크를 통해 완벽한 딜리버리(전달)가 이루어지자, 관객들 사이에서 작은 환호가 터졌다.
상현은 이번 곡을 만들며 랩보다 신경 쓴 것이 있었다. 관객들이 ‘저 자식 뭐라고 하는 거야?’라고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게 만들 리릭 드리블이다.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를 집중 시킬 수 있는 가사와 그것의 딜리버리.
가사처럼 황인수의 드럼이 거칠게 베이스 위로 올라왔다.
사분의 사박자 사이에선 사라지는
싸가지를 가진 나 자신과의 싸이퍼(Cypher).
예술적 자괴감과 자만 사이의 이 자식은
감히 참지 못하고 자꾸만 마이클 잡어.
망설임과 나의 싸움이 가져다 준건 상상력
잠시 뒤 나타날 키보드는 우리의 사령관
모음 ‘ㅏ’를 이용한 라임에 관객들의 큰 환호성이 터졌다. 상현은 이런 식으로 문장 구조를 무너트리는 과도한 라임을 좋아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관심을 유도해야한다.
강한 소리를 내던 드럼과 베이스 사이로 통통 튀는 전자 키보드 소리가 들어왔다.
L&S 그리고 Eight, Eight, Eight
내가 봤던 건 씬의 Mayday(조난 신호)네
랩 메탈을 보여줄게 전부다 예매해
인디 뮤직 페스티발에 이름을 새길게
마지막으로 방민식의 기타.
마지막은 이어지는 L&S의 ‘Drawing’ 후렴구를 랩으로 부르는 부분이었다.
난 화가처럼 꿈을 그릴래. Drawing.
물감의 색은 다양하지. Drawing.
난 화가처럼 꿈을 그릴래. Drawing.
물감의 색은 다양하지. Drawing.
상현의 랩이 끝남과 동시에, 지금까지 랩을 위해 볼륨을 죽이고 있던 드럼, 베이스, 기타, 키보드가 불을 뿜었다.
-와아아!
갑자기 펑 터지는 듯한 연주의 느낌에, 크게 관심 없던 이들도 반응을 보였다.
함성 사이로 차인현과 방민식, 신하연이 동시에 후렴을 시작했다.
화가-처럼 꿈을 그릴-래. Dra-wing-
R&B 기반의 유려한 멜로디가 강한 일렉 비트와 독특한 조화를 이뤘다. 본적 없는 곡 전개 방식에 잠시 얼이 빠져있던 관객들이 좋아하기 시작했다.
상현은 재빨리 무대에서 퇴장하며 씩 웃었다.
그에게 주어진 22초는 완벽히 클리어 했다. 나머지는 형들에게 맡길 차례다.
이어진 L&S의 무대는 심사위원들에 의해 25팀의 무대 중 가장 훌륭한 무대로 꼽혔고, 무난히 14강에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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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erse 8. 전주 월드와이드 인디 뮤직 페스티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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