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46화 (46/309)

< Verse 6. Fuck Tha Show Biz >

그때 조용히 듣고만 있던 준형이 입을 열었다.

“우리 크루원들은 제 말에 집중 좀 해주세요.”

인혁, 환, 민지, 하연 그리고 상현이 준형을 쳐다봤다.

준형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은 언더그라운드 씬이 매우 좁아요. 그래서 아마 첫 이미지가 잘 안 바뀔 거예요. 상현이랑 저는 이미 노출이 되어 어쩔 수 없지만 다른 크루원들은 공연이나 인터뷰에 참여하지 않았으니까…….”

“않았으니까?”

“굳이 888 크루의 이름으로 커리어를 시작하실 필요가 없단 말이에요. 형, 누나들은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괜히 888에 있단 이유로 욕을 먹을 필요가 없잖아요.”

하연이 물었다.

“너랑 상현이는 잘못을 했단 말이야?”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됐잖아. 저는 형, 누나들이 크루를 나간다고 해도 절대 서운하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물론 하연이도.”

“…….”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준형이 비장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묵을 깬 것은 박인혁의 힘찬 웃음 소리였다.

“푸하하하!”

“흐흐.”

김환과 오민지도 따라 웃었다.

준형은 난데없는 웃음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웃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끅끅 거리며 웃던 박인환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난 지금 법정 스릴러물을 찍어야 하는지, 언론사와 독립 영화를 찍어야하는지 고민 중인데 이 자식은 지 혼자 헐리우드 히어로 물 찍고 앉아있네.”

“왜? 이런 게 리더가 갖춰야할 덕목이지. 예상치 못한 오글거림과 유치함. 좋잖아?”

“크, 헐리우드 스타일.”

“이게 다 미연시의 폐해라니까? 저런 멘트하면 막 히로인이 ‘스고이, 준형 상!’이러면서 눈물을 반짝거리니까 진짠 줄 알잖아!

“언니! 그건 미연시에 대한 일반화라고 생각해요. 준형이가 유치한 거지, 게임 장르의 문제는 아니에요!”

“흠, 가만 보면 하연이가 은근히 미연시를 옹호한단 말이야? 솔직히 얘기해봐 너 집에 CD 몇 장 있어?”

“어, 없거든요……!”

한순간 작업실이 왁자지껄 시끄러워졌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준형이 눈만 껌뻑거렸다.

“아니…… 그래도…….”

“그래도는 뭔 그래도야. 우리가 크루를 왜 나가? 난 지금 오히려 불타오르는데. 이거 약간 N.W.A가 흑인이라고 경찰들한테 탄압당하는 거 같지 않냐? 아니면 에미넴이 백인이라고 흑인들한테 살해 협박을 받는 분위기?”

박인혁의 말에 김환이 동의했다.

“그러니 더더욱 Show And Prove가 필요해.”

쇼 앤 프루브. 힙합의 오래된 격언.

보여주고 증명하라.

김환의 말에 모두의 눈빛이 살아났다. 그렇다. 힙합 음악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증명이다. 우울하던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888 크루 멤버들의 눈에는 활기가 돌았다.

“888 크루 믹스테잎(Mix Tape : 비상업적인 앨범, 보통 힙합에서 다른 뮤지션의 곡에 자신들의 가사를 입혀 만든 앨범을 뜻한다)을 더 빨리 준비하자.”

“그 전에 뭔가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맞아. 지금 믹스테잎을 내면 결과물과 상관없이 매도당할 거야.”

“노이즈 마케팅의 주최가 우리가 되어버릴 수도 있어.”

확 바뀐 888 크루의 분위기에 L&S 밴드 멤버들과 미주는 큰 감동을 받았다.

특히 방민식은 리더의 입장에서 준형의 마음을 100% 이해하기에 더욱 그랬다.

감수성이 풍부한 미주는 빨갛게 달아오른 눈을 숨기려는 듯이 적극적으로 객원 키보드가 되겠다고 나섰지만, 눈치 빠른 박인환이 미주의 눈을 발견하고 울보라고 놀렸다.

“울보가 말을 한다!”

결국 박인환은 등짝을 얻어맞았다.

상현은 그들의 행동을 보고 미소 지었다. 준형의 걱정도 타당하고, 크루원들의 행동도 멋지다. 김환의 말이 맞다. 아무리 화가 나고, 열이 받아도 그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실력으로 증명하는 것뿐이다.

쇼 앤 프루브. 또, 쇼 앤 프루브.

“이 정도까지는 아니만, 예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비난받던 언더 뮤지션들이 있었어.”

용준의 말에 시선이 쏠렸다.

“민식이 형은 알거야. 기타와 노트, 그리고 피니쉬라인이라는 밴드 팀.”

“아…… 알지.”

“기타와 노트는 데뷔 앨범의 엄청난 호평 때문에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2집 타이틀 곡을 스웨덴 밴드의 곡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았어. 피니쉬라인은 1집 이후로 지나치게 상업적인 음악 행보로 욕을 먹었고.”

“그래서요?”

“기타와 노트는 망가졌어. 다음 앨범도, 그 다음 앨범도 엄청 별로였거든. 근데 피니쉬라인은 엄청나게 떴지. 결국 실력으로 증명했거든. 피니쉬라인이 지금 활동하는 빅 피쉬 밴드야.”

“아……!”

888 멤버들이 감탄을 내뱉었다.

빅 피쉬 밴드는 확고한 언더그라운드 팬층을 기반으로 높은 앨범 판매량을 기록하고, 가끔 대중적인 싱글을 만들어 차트에 오르내리는 밴드였다.

대중적인 슈퍼스타는 아닐지라도, 다들 노래방에서 한 두 번은 빅 피쉬 밴드의 노래를 불러봤을 것이었다.

“내 말은 기본적으로 환이의 의견과 같아. 실력으로 증명해야 돼. 스포츠 계에서 악동이란 말이 많이 쓰이지. 악동이란 단어는 보통 사생활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싸가지는 없는데 겁나 잘하는 선수들한테 쓰이는 말이잖아.”

“이상하게 사람들은 악동을 좋아한다고.”

“그래 맞아.”

용준이 강하게 말했다.

“단언할 수 있어. 너희가 이번에 보여주는 곡이 888 크루의 일, 이년을 좌지우지할 거야.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의욕에 가득 차는 건 좋은데 상황을 냉철하게 볼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야.”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 침묵은 좀 전의 무거운 침묵이 아니라, 진지한 고민과 함께 흐르는 침묵이었다.

그리고 침묵을 깨며 상현이 입을 열었다.

“디스 곡.”

“응?”

“디스 곡을 내자.”

모두들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디스리스펙트(Disrespect).

줄임말로 디스(Diss).

공격적인 가사를 이용해 상대를 비난하는 힙합 특유의 공격적인 문화.

“디스라면 노래로 공격하는 거지? 비난하는?”

“네.”

용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200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디스라는 단어가 대중화 되어, 셀프 디스 등의 단어들까지 생겨났지만 2005년에는 그렇게 익숙한 단어는 아니었다.

상현이 기억하는 한국 힙합의 첫 디스곡은 2000년에 4WD와 버벌진트가 ‘노자’라는 곡으로 조PD를 디스한 것이었다. 당시에 이 곡은 힙합 팬들 사이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그 뒤로도 꽤 많은 디스 트랙들이 생겨났다.

“누굴 디스하자는 거야?”

“당연히 쇼 비즈니스와 황 편집장이죠.”

“역효과가 나진 않을까?”

“힙합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 노래와 차별화된 긴 가사가 존재하는 거죠.”

황 편집장의 악의적인 인터뷰 편집에 대한 설명.

쇼 비즈니스에 대한 공개적 비난.

노이즈 마케팅에 대한 조롱.

이 모든 걸 소화할 수 있는 디스 트랙이 필요했다.

이건 단순한 디스와는 약간 다르다.

N.W.A가 그들의 혁명적인 앨범 Straight Outta Compton에서 보여줬던 'Fuck tha police' 같은 곡이 필요하다.

N.W.A는 서부 힙합, 흔히 말하는 갱스터 힙합의 시작이자, 역사이고, 전설인 그룹이다.

행동하는 흑인들(Niggas With Attitudes)이라는 뜻을 가진 N.W.A를 힙합 역사상 가장 중요한 그룹이라 평가하는 평론가들도 많았다.

정부를 비판하고, 흑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N.W.A는 노골적인 가사로 미국의 라디오 방송에서 제한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경찰들의 탄압을 받고, 심각한 수준의 FBI 경고장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천만장의 CD를 팔았다.

닥터 드레(Dr. Dre).

이지 이(Easy-e).

디제이 옐라(Dj yella).

아이스 큐브(Ice Cube).

엠씨 렌(MC Ren).

아라비안 프린스(Arabian Prince).

상현은 그들이 1988년에 가졌던 의식이 필요했다.

“퍽 더 쇼 비즈(Fuck tha Show biz)."

상현이 선언했다.

그래. 퍽 더 쇼 비즈.

“퍽 더 쇼 비즈……? 왠지 익숙한데?”

준형의 중얼거림에 박인혁이 상현의 어깨를 툭치며 씩 웃었다.

“엔 더블유 에이(N.W.A).”

“맞아요.”

“아!”

그제야 모두들 N.W.A를 전설로 만들어준 '퍽 더 폴리스(Fuck Tha Police)'를 떠올렸다.

L&S 멤버들만 영문을 모를 뿐이었다.

“진짜 죽이는 곡 만들 자신 있어? 이건 디스를 떠나서 네가 레퍼런스 하려는 곡이 너무 전설적인데?”

“못하면 탈탈 까일 걸?”

“진짜 못하면 안하는 것만 못한 시도인데?”

하연과 박인혁이 상현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상현은 말과 달리 그들이 보이는 신뢰를 읽을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퍽 더…… 뭐?”

미주와 민식이 물었다. 박인혁이 간단히 N.W.A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니까 저항의식을 담는 곡이란 말이지?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TM)처럼?”

이번에는 888 크루의 멤버들이 RATM을 몰랐다. 민식이 간단히 설명했다.

“상현아. 이번 곡은 너 혼자해라.”

“욕먹은 건 준형이 너도 똑같잖아?”

“아니야. 이건 메시지가 중요한 곡이야. 괜히 두 명의 래퍼가 서로 다른 스타일로 랩을 하다보면 메시지보다 랩의 우열에 시선이 집중될 수도 있어.”

상현은 준형의 말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준형은 안목이 있다.

“맡겨만 둬.”

“오늘 바로 작업 들어가는 거지?”

“당장.”

상현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두고 봐라. 쇼 비즈니스가 노이즈 마케팅을 원했다면, 나는 실력을 증명하며 더 큰 노이즈 마케팅으로 돌려주겠다.

***

2005년을 기준으로 한국 힙합 씬의 역사는 6년이 채 안 된다. 힙합의 본고장인 미국과 비교하면 아주 짧은 역사다.

재미있는 점은 한국 힙합 씬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생겨났다는 점이다.

1999년 이후, 하이텔의 BLEX, 나우누리의 S&P 등의 통신동호회를 기점으로 시작된 한국의 힙합 씬.

2000년대 초반의 블랙뮤직 뮤지션들은 거의가 통신 동호회 출신이었다.

온라인 힙합 커뮤니티 =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

2005년은 위의 공식이 거의 성립되는 시기였다.

때문에 한국 힙합 씬은 작은 사건도 ‘힙합 커뮤니티’를 통해 굉장히 빨리 확산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2005년 8월 초, 힙합 커뮤니티에 하나의 글이 올라왔다.

-이래서 힙합이 욕먹는 거다.

자극적인 제목을 가진 글이 이슈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

“888 크루?”

배가(Vega)라는 랩 네임으로 활동 중인 배상욱이 땀을 닦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한국 힙합을 이끌었던 클럽 마스터플랜(MP)이 2001년 12월 마지막 공연을 끝으로 문을 닫고, 한동안 힙합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은 공연 기회가 없었다. 배상욱은 늘 그게 아쉬웠다.

마스터플랜의 1세대 래퍼들이 오버그라운드로 데뷔하는 와중에도 배상욱은 계속 언더그라운드를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8월 말에 개장하는 클럽 호미(Hommie)와 계약을 했다.

배상욱의 주도하에 앞으로 1년 동안, 두 달에 한 번씩힙합 공연을 개최하기로 계약한 것이었다.

“888 크루가 뭔데?”

“너 요즘 커뮤니티 안 들어가냐?”

“안 들어간 지 좀 됐어. 호미 첫 공연 때문에 너무 바쁘잖아. 연습도하고, 계약도 조율하고, 라인업도 짜고.”

배상욱은 첫 공연의 대박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지금도 공연 연습 중에 찾아온 크루 멤버만 아니었으면 연습 중이었을 거였다.

“왜? 죽이는 앨범 나왔어? 팔팔팔 크루라는 곳에서?”

“아니야. 앨범은 개뿔.”

“그럼 뭔데?”

“광주에서 활동하는 힙합 크루라는데 그제부터 커뮤니티에서 말이 많아.”

“전라도 광주? 경기도 광주?”

“전라도.”

“와, 광주에도 크루가 있구나. 근데 왜? 뭐가 말이 많아. 엄청 잘해?”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건방지고 싸가지가 없어서 말이 많아.”

배상욱이 동료의 말투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직접 만나봤어?”

“그건 아닌데…… 쇼 비즈니스 알지?”

“그 가십지?”

“엉. 팔팔팔 크루 놈들의 쇼 비즈 인터뷰 내용이 문제야. 나도 봤는데, 일단 어린놈의 새끼들이 싸가지가 없던데?”

< Verse 6. Fuck Tha Show Biz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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