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5. 어느 화요일 >
Verse 5. 어느 화요일
운산고등학교는 공부 많이 시키기로 유명한 학교답게 방학이 아주 짧았다.
12일 동안의 순수한 방학 이후, 8월 1일 화요일부터 ‘방학 자율 학습’이라는 명목 하에 학생들의 등교가 강요되었다. 일정은 9시 등교, 5시 하교의 방학이라고 믿을 수 없는 타이트한 커리큘럼.
예외라면 준형같이 부모님의 지지 하에 일찌감치 예체능의 길로 들어선 친구들인데, 상현은 방학 자율 학습 불참을 선언한 이유로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가져야했다.
“방학 잘 보내셨어요?”
“그래 임마. 너 어제는 왜 학교 안 왔어.”
“솔직히 말씀드리면 까먹었어요.”
상현의 대답에 담임선생님이 기도 안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현은 거의 매일을 준형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신도 준형처럼 예체능 반으로 편성이 됐다고 착각했다.
정작 담임선생님은 상현이 음악 하는 것을 모르는데 말이다. 결과적으로 상현은 아무런 통보도 없이 방학 자율 학습을 불참한 게 되었다.
“기말고사 성적표는 봤지?”
“어…… 네.”
사실 안 봤다. 관심이 전혀 없었다.
“선생님이 너의 진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게 어쩌면 너한테 상처가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담임된 입장에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어제 네가 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지? 선생님은 음악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 길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은 알아.”
“네.”
상현은 담임선생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려면 공부가 제일 좋다는 것을 그도 인정한다. 실제로 그런 삶도 살아봤고.
하지만 자신의 다짐은 확고하다.
“지금 네 성적을 보면, 언수외만 따지면 전교 30등 안에 드는 점수야.”
“예? 진짜요?”
“그럼 가짜냐?”
상현은 담임선생님이 내미는 자신의 성적표를 확인했다. 언어만 2등급이고 수리, 외국어는 1등급이다. 특히 외국어는 석차가 무려 전교 3등이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처음에 너무 못 봤어.’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그러나 나머지 과목들은 7~8등급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암기과목은 단 1초도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찍고 잤다.
“포기하긴 너무 아까운 성적 아니니?”
“선생님. 만약 제가 공부를 해야 한다면 정말 잘할 자신 있습니다.”
담임은 상현의 눈빛을 보고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음악 할 때만큼 행복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아직 어린 제가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인생은 너무나 짧고, 한 번뿐인데 행복하지 않은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냐.”
담임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허망하게 간 부모님의 영향으로 상현이 현재의 행복에 큰 가치를 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해도 제자에겐 상처가 되지 않을까?
“그럼 쌤이랑 약속하나만 하자. 네가 원하는 게 행복이어야 한다. 쾌락이면 안 돼.”
“에이, 쌤. 멋있는 척은.”
“학교 나오고 싶냐?”
“명심하겠습니다.”
상현은 그 뒤로도 담임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 전에 있었던 부드러운 직선의 공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고, 며칠 뒤면 쇼 비즈니스란 잡지에 인터뷰가 실린다는 이야기도 했다.
공연 이야기 때는 그러려니 하던 담임도 잡지 이야기에는 제법 놀라는 눈치였다. 쇼 비즈니스면 제법 유명한 잡지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잡지 발매가 언제라고?”
“원래는 팔월 일일인 어제가 예정일인데, 발매가 안됐더라고요. 곧 나오겠죠.”
“선생님이 한 부 사주마.”
“에이, 저희는 그냥 간단히 인터뷰만 실렸어요.”
“그래도 임마.”
담임선생님의 말에 상현이 쑥스럽게 웃었다.
“그럼 선생님이 너한테 숙제를 하나 주마.”
“숙제요?”
“지금은 네가 이학년이니까 비교적 자유롭지만, 우리학교 특성상 고삼이 되면 야자를 빼는 것도 어려워질 거다. 내년 담임이 누가 되든 말이다.”
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상현은 자신을 지지해줄 부모님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러니 학교에 증명을 해줬으면 좋겠구나. 너가 음악으로 진로를 정할 수 있다는 증명을.”
“어떤 방식으로……?”
“시월에 있는 학교 축제 때. 내년 너의 담임선생님, 너한테 관심을 두는 교장 선생님도 다른 소리를 하지 않게끔.”
상현은 그제야 담임이 원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고3때를 위해 선생님들 앞에서 음악적 재능을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어려운데.’
재능이란 말 그대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파티 랩을 해서 모든 사람을 뛰게 만든다고, 잘 짜인 랩을 실수 없이 공연한다고 재능을 보여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나 상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 정도에 주춤할 거면 시작도 안했으니까.
그렇게 담임과의 긴 면담이 끝났다. 방학 때의 자유를 보장받아 홀가분해진 상현은, 학교에서 나오다가 세종악기사 홍 사장님의 전화를 받아야했다.
-지금 좀 볼 수 있나?
오늘은 아무래도 이리저리 불려 다닐 팔자인 것 같았다.
***
“어? 상현아!”
“어? 누나, 왜 출근해 있어요? 원래 오후타임이잖아요?”
“너는 꼭 사실관계부터 언급을 해야겠어? 반가운 척이라도 좀 해라.”
“반가운 건 너무 당연해서 말할 가치도 없어서 그래요.”
세종악기사로 가니 뜬금없이 미주가 알바를 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원래 오전타임인 알바 형이 운전면허 도로주행을 연습해야 해서 며칠간 근무시간을 바꿨다고 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야?”
“보고 싶어서요.”
“내가 알바하는지도 몰랐으면서?”
“마음이 향했죠.”
미주는 능글맞은 상현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상현이 악! 하며 아파하더니 미주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한참 장난치던 둘은 결국 등짝을 더 얻어맞은 상현이 뒷걸음질 치며 끝났다.
상현이 투덜거렸다.
“누나 이거 데이트 폭력이에요.”
“이게 데이트냐?”
“좁은 공간에 남녀가 단둘이 웃고 떠들면 데이트죠.”
상현이 흐흐 웃으면서 커튼을 확 쳤다. 순간 가게가 어두워졌다.
“이제 어둡기까지 하군요.”
“어머, 밀실 살인사건 체험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질식사와 의문사가 있는데 어느 코스를 택하시겠어요?”
미주가 주먹을 꽉 쥐며 상현을 위협했다. 그러나 상현은 음흉하게 웃었다.
“복상사는 없나요?”
“……!”
미주의 얼굴이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만큼 빨개졌다. 피아노만 치던 순진한 미주의 공격 따위, 상현에게는 별 것 아니다.
“진짜 주, 죽을래?”
“으이구, 순진해가지고는.”
상현이 씩 웃고는 커튼을 휙 걷었다. 다시 가게가 밝아졌다.
“사실은 홍 사장님이 부르셨어요.”
“큼, 사장님이? 왜?”
상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요.”
“사장님 삼십 분쯤 전에 나가셨는데?”
“기다려보죠 뭐.”
“앉아있어. 나는 우쿨렐레 좀 닦아야겠다.”
미주는 곧 까치발을 들며 벽에 걸린 우쿨렐레를 닦기 시작했다. 손도 잘 안 닿으면서 열심히도 닦는다. 자신에게 부탁할 만도 한데, 상현은 언제나 당차고 독립적인 미주의 모습이 보기가 좋았다.
“이리 줘요.”
걸레를 빼앗아 우쿨렐레를 닦았다.
“내 일인데?”
“서운하게 니 일 내 일 하지 말고 앉아있어요.”
“그럼 커피 한 잔 마실래? 아니면 홍차?”
“홍차면 그 영국산 비싼 홍차 말하는 거죠? 사장님이 애지중지하는? 그거 맘대로 먹어도 되요?”
“서운하게 니 홍차 내 홍차 하지 말고 앉아있어.”
“아니, 그건 사장님 거잖아요?”
흥, 하고 웃은 미주가 악기사 안으로 들어갔다. 상현은 그런 미주를 보고 피식 웃고는 악기를 닦기 시작했다. 높이도 걸려있다.
“자, 마셔.”
“감사합니다.”
“아, 참. 너 사장님이 말씀하신 건 봤어?”
“예? 뭐요?”
“연극 한 번 보라고 하셨잖아.”
“아…… 그랬죠. 연극.”
세종악기사 사장님은 상현을 볼 때마다 뭔가 도와주고 싶었는지 녹음 방법이나 믹싱(Mixing : 여러 가지 소리를 듣기 좋게 섞는 것. 랩에서는 보통 녹음된 목소리에 효과를 줘 비트와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방법 등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몇 번이나 소극장의 연극 공연을 보라고 말씀하셨다. 연극은 랩과 비슷하게 몸짓과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가장 특화된 매체라면서.
상현도 흥미는 있었지만 그동안은 공연 준비 때문에 바빠서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그리고 연극이란 분야는 바로 접근하기에 너무 낯설다.
“봐야죠. 근데 광주도 연극 공연이 있나요?”
“그럼. 사장님 친구 분이 조대 쪽에 소극장 운영하셔.”
“그래요? 뭐야 그럼 나를 이용해 매출을 올리려는 생각이셨나?”
“설마.”
“그런데 갑자기 공연은 왜요?”
“아, 내가 공짜 표가 생겼는데 할 거 없으면 같이 가자고.”
“연극 제목이 뭐에요?”
“어…… 몰라? 그냥 어쩌다 표만 받았어. 제목이 뭔지는 자세히 안 봐서 모르겠어.”
“언젠데요? 시간은?”
“금요일인가 토요일이었던 것 같은데. 보통 하루에 세 번 공연이니까 아무 시간 때나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야? 시간이 적혀있던가?”
“뭐 이렇게 아는 게 없어요?”
상현이 타박하자 미주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상현은 허허 웃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혹시 갑자기 나랑 데이트 하고 싶어서 아직 예매도 안했고, 연극 제목도 모르고, 연극 시간도 모르는데 막 지어내는 거 아니에요?”
“맞을래?”
상현은 미주의 목소리 톤이 낮아지자 등짝이 화끈거렸다. 이것이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인가?!
“보기 싫으면 말아라. 지 생각해서 표도 얻어왔더니만.”
“에이, 누나 왜 또 화를 내고 그래요. 우쿨렐레는 다 닦았는데 베이스라도 닦을까요?”
방긋방긋 웃는 상현의 모습에 미주가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이리 줘. 팔 닿는 곳은 내가 닦아야지.”
“연극 날짜랑 시간 봐서 문자로 보내주세요.”
“안 본다며?”
“에이, 제가 언제 안본다고 했나요. 그리고 설령 연극은 안보더라도 누나는 봐야죠.”
“너의 그 수작질을 상미가 배울까 겁난다. 상상해봐라. 상미가 어떤 남자한테 ‘오빠는 뭘 먹고 그렇게 귀엽나? 혹시 내 사랑?’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
갑자기 상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안 그래도 요즘 상미가 좀 능글맞아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장난기도 많아지고…….
사실 아빠도 엄마도 장난기가 정말 많은 분이셨다. 아직도 기억나는 장난은, 여덟 살 때인가 아홉 살 때인가 갑자기 아빠가 ‘사실 너는 내 친아들이 아니다.’했던 장난.
엄청난 충격을 받은 상현이 장난이란 말을 듣고도 자꾸 의심하자 친자 확인 검사까지 해야 했다.
그야말로 핏줄에서 이어진 장난기.
‘아니, 그래도 상미는 안 돼!’
미주는 시시각각 변하는 상현의 얼굴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버렸다. 하여튼 자기도 어린 주제에 동생은 끔찍하게 아낀다. 물론 상미도 상현을 잘 따르고.
그러고 보면 보통 남매는 원수지간보다 조금 나은 사이인데, 상미랑 상현은 친구처럼 가깝다.
‘상현이 부모님은 좋겠네. 착한 애들 둘이 사이도 좋아서.’
미주는 그녀의 부모님이 몇 년째 그녀의 동생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4, 5년 전만해도 ‘동생이 생기면 어떨 것 같아?’라고 자주 물어보셨다. 지금은 연세도 있으셔서 포기하신 것 같지만.
미주는 부모님이 물어볼 때마다 동생이 생기면 좋겠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오빠를 가진 친구들이 부러웠다.
예대 특성상 시험기간에는 학교서 밤늦게까지 실기를 연습하는데, 비라도 오면 툴툴 거리며 우산을 들고 오는 동기들의 오빠가 항상 부러웠다.
물론 동기들은 항상 오빠가 아니라 웬수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상현이 같은 오빠라면…….’
그러나 미주는 자신이 상현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모습을 상상하다 스스로 닭살이 돋아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그나저나 연극은 있겠지? 없으면 어떡하지?’
그때 악기사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 아, 사장님.”
“오늘 치 알바 비는 상현이에게 주면 되냐?”
홍 사장이 악기사로 들어오며 미주에게 말했다. 미주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하다가 상현이 아직도 걸레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헤헤 하고 웃었다.
< Verse 5. 어느 화요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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