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32화 (32/309)

< Verse 3. 888 Crew >

지난주, 일이 있었던 상현을 제외하고 준형은 먼저 크루원들과 만남을 가졌었다.

“근데 원래 여덟 명인가 되지 않았어?”

“네 명은 빼기로 했어.”

“왜?”

“내가 이번에 멤버를 모은 기준은 시작하는 마음이야. 그런데 네 명은 너무 거만하더라.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화합을 망칠 것만 같았어.”

상현은 준형이 세운 기준이 일종의 방어기재라고 생각했다. 고등학생이 리더인 크루에, 기존의 음악 색을 지닌 사람을 거부하는 방어기재가 발동한 것으로.

‘잘하겠지 뭐.’

하지만 그는 준형의 판단을 신뢰했다.

어찌됐든 준형은 평생 음악을 하는 놈이고, 성공하는 놈이다. 준형은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겠지만, 상현의 입장에서는 검증이 됐다는 말이다.

“그래서 남은 네 명은 어때? 몇 살이야?”

“직접 봐. 들으면 뭐해.”

“아, 궁금하잖아. 알려줘 봐.”

“그러게 누가 지난주에 빠지래?”

“변호사가 만나자는데 그럼 빠지냐?”

“시끄럽고. 시간 더럽게 안가네.”

상현은 크루원들을 기다리는 자리가 설레며 초조했다. 새로운 분야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느끼는 기분 좋은 긴장.

게다가 평생 업으로 삼으려는 음악 분야다.

“야. 근데 우리 크루 이름은 뭐야?”

“어? 크루 이름……?”

상현의 물음에 준형이 눈을 끔뻑였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없네?”

“뭐야. 지난주에 안정했어?”

“응. 사람이 나까지 아홉이었잖아. 말 많고 거만한 몇 놈들이 쓸데없는 자랑질 좀 몇 번 하니까 세 시간이 금방 가더라.”

“그럼 어차피 약속 시간까지 삼십 분정도 남았는데, 이름이나 정할까?”

“콜. 완전 쩌는 걸로.”

상현이 기억을 더듬었다. 당장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이름만 해도 열 개는 넘었다.

하이라이트, 데이즈 얼라이브, 벅와일드, 저스트뮤직, ADV 등등.

대부분 2005년 현재를 기준으로는 아직 생기지도 않은 크루들이었지만 왠지 이름을 뺏고 싶지는 않았다. 상현의 마음에는 그들의 컴필레이션을 보며 설렜던 느낌이 남아있었다.

‘그럼 외국은?’

Good Music, Asap mob, Shady record, Grand hustle, Young money 등등…….

그러나 외국의 이름도 뺏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역사가 긴 외국 팀들은 상현이 몰라서 그렇지 이미 존재하는 크루, 레이블 이름일 것 같았다.

“으으…….”

준형이 머리를 쥐어짜며 괴로워했다.

상현의 생각에 크루 이름이 굳이 멋질 필요는 없었다. 솔직히 그는 크루 이름을 개똥이라고 지어도 음악이 정말 좋다면 상관없다고 믿었다.

사실 Good music이나 Wu-tang clan이 완전 멋진 이름은 아니지 않은가?

대신 상현은 이름이 자신들을 표현하기를 바랐다. 힙합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Represent다.

준형이 중얼중얼 거리며 이름을 생각하는 것에 반해, 상현은 노트에 펜으로 끼적이며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한 이름이 생각났다.

“이거 어때?”

“엉? 뭐야? 이거 어떻게 읽어?”

888 Crew.

“글쎄, 어떻게 읽을까? 팔팔팔 크루?”

“무슨 뜻인데?”

“우리 둘이 88년생이잖아. 또 8의 모양이 ∞(Infinity)를 세운 것과 같잖아.”

“무한하게 세우자?”

“아니, 뭘 그렇게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냐? 여러 가지 심볼(Symbol)들이 내포되어 있다 이거지. 단순하게 생각하면 음악이 팔팔하다고 해도 되니까. 의미야 가져다 붙이기 아니겠냐?”

“근데 왜 팔이 세 개야? 88년생이 둘이니까 네 개 아니냐?”

“우리가 반 정도는 합칠 ‘팔자’라고 해두자.”

“오오!”

준형이 테이블을 탕 내리쳤다.

“좋다! 이거다! 너로 정했다! 포켓볼!”

준형의 주접에 상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휴, 미친놈. 근데 이거 어떻게 읽어야하지?”

“에잇에잇에잇?”

“그럴 바에는 Eight hundred eighty eight이 낫겠다.”

“너무 복잡하잖아.”

한참 고민하던 상현과 준형은 결국 공식명칭을 ‘팔백팔십팔 크루’로 합의했다.

준형은 이름이 마음에 든다며 희희낙락했다. 상현도 마음에 들었다. 팔백팔십팔.

-지이잉.

“어? 크루 형한테 문자왔다. 여기 카페 이름이 뭐였지? 못 찾겠다는데?”

“조대 앞 카페 가온. 테라스 쪽이라고 말했냐?”

“말했어. 아, 형!”

준형이 때마침 카페로 들어오는 남자를 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더럽게 찾기 힘드네. 말을 똑바로 해야지! 형은 공대 입구 쪽인 줄 알았잖아.”

“아, 정말요? 그래서 다른 분들도 헤매나? 문자 한 번 보내볼게요.”

“그래. 이 친구가 상현이야?”

“안녕하세요.”

상현이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꾸벅 인사했다. 이제는 완전히 18살에 적응한 상현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 자신보다 나이가 많으면, 회귀전인 38살 때도 자신보다 나이가 많던 사람이다.

“와, 잘생겼네. 우리 셋의 비주얼이라면 광주 정복은 쉽겠는데?”

전남대학교 법대에 재학 중인 박인혁은 굉장히 쾌활한 사람이었다. 인상도 좋았고, 먼저 다가오는 게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상현은 금방 박인혁이 마음에 들었다. 팀의 케미를 책임질 재간둥이라고나 할까?

박인혁을 필두로 약속 시간인 1시가 되자 하나둘 크루원들이 모였다.

“한 명은 30분 정도 늦는데요. 저희끼리 먼저 자기소개 할까요?”

“자기소개라니. 크, 신입생 같다.”

박인혁의 말에 모두 어색하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운산고등학교 2학년인 18살 이상현.

마찬가지인 신준형.

전남대 법대생, 24살 박인혁.

연세대 시각디자인과, 24살 휴학생 김환.

연세대 철학과, 23살 휴학생 오민지.

총 5명이었다. 이 중 오민지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고등학생은 여자였다.

처음에는 약간의 어색함이 있었지만 같은 분야를 목표로 모인 이들이기에 음악 이야기로 금방 어색함을 떨쳐버렸다.

최근 발표된 한국 힙합 앨범이야기로 시작해서, 미국 메인스트림의 앨범까지 끝도 없는 잡담이 넘쳤다.

“아, 그 가사가 그렇게 해석되나요?”

“응. 아마 1집 타이틀 곡을 레퍼런스 한 내용일거야.”

“형 외국 음악 많이 들으시네요.”

상현은 크루원들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준형의 눈이 확실함을 인정했다.

이들은 모두 랩에 깊은 관심과 애정이 있으며 남들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럼 너희 둘은 밴드 L&S의 객원 래퍼인거야?”

“객원은 아니고, 그냥 친해서 공연을 도와주는 거죠.”

“그게, 상현이가 완전 밴드형들을 홀려버려서 그래요. 혹시 세종악기사라고 아세요?”

“당연히 알지. 거기서 가끔씩 공연하잖아.”

준형이 신나서 상현의 Run this town 공연을 떠들었다.

상현은 왠지 잘난 척 하는 것 같아서 준형을 말렸지만, 준형은 어느새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골든 핑거의 베이시스트 이경민을 물 먹였던 이야기를 늘여놓았다.

< Verse 3. 888 Crew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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