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27화 (27/309)

< Verse 3. 888 Crew >

상현과 준형은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둘은 뭔가에 홀린 듯 시간 날 때마다 음악을 듣고, 가사를 쓰고, 랩으로 뱉고, 서로의 노하우를 공유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기위해 준형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부모님에게 래퍼라는 꿈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하는 일이었다.

준형의 어머니는 준형의 꿈을 막연하게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정말 생뚱맞은 소리였다.

하지만 준형은 자신의 의견을 깡따구 있게 밀어붙였고, 결국 준형의 아버지도 ‘한 번 해봐! 이왕 할 거면 죽을 각오로 하고!’라며 떨떠름하게 허락하셨다.

‘사실 내가 갑자기 과감해진 이유는 너가 난데없이 잘하니까 뵈기 싫고 재수 없잖아? 건방진 자식아?’

준형이 나중에 상현에게 한 말이었다.

준형의 어머니는 담임선생님과 통화를 통해 준형의 야간자율학습을 빼는, 그야말로 신의 한수와도 같은 든든한 지원사격을 해주셨다.

그 결과 준형은 매일 상현의 집으로 와서 상현과 음악에 대해 토론했고, 심심함에 기웃거리는 상미와도 점점 더 친해졌다.

상현과 준형은 컨디션 좋은 날은 하루에 2~3곡의 가사를 쓰는 열정을 보였다. 물론 폐기하는 가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 비트에 어울리지 않을까?”

“비트가 너무 아마추어 티가 난다.”

“그래? 난 괜찮은 것 같은데?”

또한 외국 아마추어 작곡가들이 작업물을 올리는 외국 인스트루멘탈(Instrumental) 사이트를 발견해 요긴하게 써기 시작했다.

상현은 그 사이트에서 ‘DJ. STANDARD’라는 아이디를 발견하고는 혹시나 해서 메일을 보내 놓은 상태였다.

‘내가 아는 LA출신의 디제이 스탠다드일까?’

디제이 스탠다드의 발견을 계기로 상현은 과거에 좋아했던 한국 래퍼들의 현재를 추적해봤다. 과거의 우상들이 유명세를 얻기 전에 만나고, 그들과 진심으로 친해지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음악을 통해 본인의 과거를 상세하게 이야기했던 소수의 래퍼들을 제외하고는 현재를 추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아쉽다. 홍대에 가면 꽤 많이 찾을 수 있겠지?’

2005년의 광주는 음악적으로 동떨어진 섬 같았다.

“우와, 이게 홈레코딩 장비야?”

“어허, 어디다가 더러운 손을 대는 거야? 어여 가서 손 씻고 와.”

상현은 여유 시간에 종종 세종악기사에 들러 홍 사장님에게 홈레코딩 견적을 부탁했다.

얼마 전의 독한 말은 정말 악역을 자처한 것이었는지, 홍 사장님은 아주 친절하게 가격대비 저렴한 홈 레코딩(Home Recording) 장비를 정해주셨다.

상현은 망설이지 않고 장비를 곧장 구매했다.

“그럼 언제부터 쓸 수 있는 거야?”

장비들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살피던 준형의 질문에 상현이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오늘 저녁에 세팅해보려고. 내일 바로 써보자.”

“오오, 첫 곡으로 움직여야지 녹음할까?”

“좋은 생각인데?”

그리고 벌써 3일이 흘렀다.

산업공학과 출신이자, IT 금융계열 회사 창업자였던 상현은 부끄럽게도 하드웨어적으로 기계를 다루는 것에는 별 소질이 없었다.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홈레코딩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단 말이었다.

“안녕하세요. 홍 사장님.”

결국 상현은 홍 사장님한테 SOS를 쳐야했고, 홍 사장님은 한참동안 설명을 하다가 그냥 한가한 평일 오후에 알바생인 미주를 출장보내기로 결정했다.

“안녕하세요. 들어와요.”

이게 상현의 학교가 끝난 4시에 미주가 상현의 집을 방문한 이유였다.

“안녕. 혼자 있어?”

“네. 동생은 아직 학교에서 안 왔어요.”

“부모님은?”

“어…… 안 계셔요.”

잠시 고민한 상현의 대답이었지만 미주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너 인문계 아니야? 학교가 일찍 끝났네?”

미주가 현관에서 쭈뼛거렸다.

“야자를 안 해서 그래요. 근데 현관에 서서 뭐해요? 빨리 들어와요.”

“그래.”

거실로 들어온 미주가 우두커니 벽 근처에 서있자 상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꼭 낯선 장소에 혼자 떨어진 강아지 같다.

“남자 집 처음 와요?”

“무슨 소리! 수도 없이……!”

“오호? 수도 없이?”

“우리 할머니 집은 오래된 집이라 수도 없이 양동이로 물을 길어야…….”

“……?”

미주의 횡설수설을 듣고 있던 상현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일단 좀 앉아요. 드라마에서는 주스? 커피? 라고 물어보던데 물밖에 없어요. 아, 화채 먹을래요?”

“아니야. 무, 물 줘.”

“왜 이렇게 말을 더듬어요?”

“몸을 더듬는 것보다는…….”

“……?”

“……내가 뭐라고 했지?”

상현이 미주에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미주는 과감하게 원샷을 때렸다.

‘고봉(?)이었는데?’

물을 마신 미주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려서 집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간첩이에요? 뭘 그렇게 은밀하게 살펴요. 집 좀 안내해드릴까요?”

“안내는 무슨…….”

활달한 성격이기에 그렇게 안 봤는데, 이 아가씨 생각보다 되게 순진한 아가씨다. 피아노만 열심히 치다보니, 아무래도 남자 집에 처음 온듯했다.

“어? 팔찌 안찼네요?”

“어? 아니 그게…….”

“내가 동생주려고 산 거 선물했더니만 안차고 다녀요? 도로 내놔요.”

“아니 그게 아니라…….”

“가난한 고등학생이 비싼 거 사줬더니만 성의를 무시하네.”

“아니 그게…….”

“맘에 안 들었으면 말하지 그랬어요?”

“맘에 안든 게 아니라 알바하면 기스 나니까 안찬 거야!”

미주가 버럭 화를 내자 상현이 웃었다.

“원래대로 돌아왔네.”

“어?”

“모태솔로 티 그만내고 장비나 세팅이나 해줘요. 알바생.”

“알바생? 고삐리 자식이 건방지네.”

미주가 투덜투덜 거렸다.

사실 남자 혼자 있는 집에 처음 와보긴 한다. 어릴 적부터 피아노만 치다보니까 음악 외적인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근데 모태 솔로가 뭐야?”

“아…… 별거 아니에요.”

상현은 모태 솔로라는 단어가 아직 안 쓰인다는 것을 깨닫고 아차 싶었다. 종종 이런 일이 있다.

“장비나 봐주세요.”

“장비는 방에 있어?”

“아뇨. 방을 지나 애매한 공간에.”

“애매한 공간?”

상현의 집은 1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큰 방 한 개에 작은 방 두 개, 화장실, 부엌, 거실이 있는 전형적인 4인 가구 주택. 또한 어렸을 때부터 상미와 뛰어놀던 잘 꾸며놓은 옥상이 존재했다.

상현이 말하는 애매한 공간은 1층과 옥상 사이였다.

냉장고로 가려진 창문 옆에 좁은 계단을 지나면 보이는 공간.

다락방이라고 말하기엔 크고, 복층이라 말하기엔 천장이 너무 낮은 애매한 공간인데, 원래는 짐을 쌓아놓는 창고였다.

“다락방이야?”

“비슷해요.”

“기계는 습한 곳에 놔두면 별로 안 좋아. 장마 때 물새는 건 아니지?”

“머리나 조심해요.”

다락방은 다 좋은데 입구가 너무 좁았다.

상현이 먼저 좁은 입구로 쏙 들어갔다. 미주는 입구만 보고 엄청나게 좁은 방을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컸다.

그리고 멋졌다.

“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뭐랄까? 뮤지션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상상 속의 작업실에 온 것만 같았다. 더 멋진 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조금씩 공간을 채워가는 재미.

“멋지네.”

“그렇죠?”

크진 않지만 환기용으로는 충분한 창문과 환풍기가 있어서 습기 문제는 걱정 없을 듯 했다.

빛이 들어오는 창문 맞은편에는 벽걸이형 에어컨과 소형 냉장고가 있었고, 그 옆에는 3대의 모니터를 설치한 컴퓨터가 있었다.

< Verse 3. 888 Crew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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