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 움직여야지 >
상현은 미주에게 이끌려 시내 외곽의 공원으로 향했다. 금남로 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공원에는, 마침 광주 시청에서 진행하는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마침이 아니라 노린 건가?’
진행되는 행사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성금 모금 행사였는데, 꽤 큰 무대를 세워놓고 이런저런 공연 팀들이 올라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밴드, 댄스, 노래, 마술 등등 종류도 다양했다.
“이 팀 어때?”
“별로…….”
미주와 상현은 금남로 공원 2층 벤치에 앉아서 공연을 지켜봤다.
“그럼 저 팀은 어때?”
“음, 괜찮네요.”
“방금 쭉 춤 춘 팀은?”
“춤 쪽은 제가 잘 몰라서…….”
“그냥 느낌대로 말해봐.”
“음…… 다 괜찮았어요.”
“왜?”
미주의 질문에 상현이 머뭇머뭇 답했다.
“글쎄요? 그냥 좋아보였어요.”
“그럼 쟤들은 춤을 만들 때, 그냥 좋아보이게 만들었을까?”
“아뇨? 뭔가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겠죠?”
“무슨 의도?”
상현은 그제야 미주의 질문이 세종악기사의 홍 사장님이 했던 충고의 연장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미주에 대해 잘 모르지만 듣기로는 꽤 유명한 음대에서 피아노를 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거의 평생을 피아노만 쳤을 것이고, 계통이 다르다고 해도 상현은 충분히 조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음…… 관객을 즐겁게 하려는 의도?”
상현의 대답을 들은 미주는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상현이 이어지는 다음 공연팀의 무대를 끝까지 봤을 때쯤 미주가 입을 열었다.
“너, 나 피아노 전공인거 알지?”
“네."
“나는 5살 때 피아노를 처음 쳤어. 그리고 지금까지 쳤지. 그러니까 17년 동안 피아노를 쳤단 말이야.”
엄청나게 긴 시간이다. 그로서는 17년 동안 한 가지 일에만 매진했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재능 있는 사람들 수도 없이 봤어. 특히 입시할 때 느낀 건데, 내가 14년 동안 친 것보다 한 2년 친 사람이 더 잘 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어.”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근데 가진 바 재능이랑 아무 상관없이 나는 ‘이 사람이 피아노를 오래 치겠구나. 아니면 곧 그만두겠구나.’를 알 수 있어. 이 사람이 내 라이벌이 될 사람인지, 아니면 잠깐 피아노를 스쳐지나가는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나만의 분류법이 있단 말이지.”
미주의 말에 상현은 흥미가 동했다.
“어떻게요?”
“손목.”
“손목?”
“기타에서 운지법이 중요하듯, 피아노는 손목이 아주 중요해. 손목의 위치가 너무 높아도 안 되고, 낮아도 안 돼. 그런데 손목을 컨트롤하는 연습 과정은 너무 지겹고, 반복적이란 말이야.”
피아니스트마다 견해와 방법이 다르겠지만, 미주가 배운 방법은 피아노를 치는 동안 손목 아래에다가 볼펜을 세워놓는 법이었다.
손목이 너무 내려가면 볼펜에 쿡쿡 찔려서 손목 부근이 잉크 범벅이 된다.
“진짜 재미없고 지루한 과정이야. 눈감고도 칠 수 있는 연주를 수백 번 반복하며 자세를 교정하는 과정은. 그런데 내가 본 바에 의하면 피아노를 오래 치게 될 사람은 이것마저도 재밌어해.”
손목에 묻는 잉크의 양이 줄어드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똑같은 곡을 수백 번 연주하면서도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게 내가 아는 예술을 하는 사람이거든.”
“…….”
“아까 그 얘들이 무슨 생각으로 춤을 만들었냐고? 당연히 지들 재밌으려고 만든 거야. 그냥 내가 젤 잘 추는 동작들 모아서 만든 거야. 관객들을 생각하고 그런 게 아니라.”
상현은 침묵했다. 홍 사장, 그리고 미주가 해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아가고 있었다. 예술에 대한 화두.
그렇게 상현이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 갑자기 미주가 벤치에서 일어나더니 상현을 잡아끌었다.
“따라와.”
“네? 어디 가게요?”
“여기까지 와서 뭐하겠어?”
“……?”
“공연 해야지.”
상현이 상황을 이해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사이, 미주는 행동력 있게 공연의 스태프에게 다가갔다.
미주는 스태프가 뭔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금방 상현에게 돌아왔다. 상현은 이야기가 잘 안됐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다음, 다음 차례야. 무슨 곡 할 거야?”
“네?!”
“뭘 그렇게 놀래? 다음, 다음에 너랑 나랑 무대에 올라간다니까?”
“어떻게 그렇게 쉽게 공연을 잡아요?”
“미인계.”
“…….”
“그 표정은 뭐지?”
상현의 불신 가득한 표정에 미주가 사실을 털어놨다.
“지금 사운드 만지는 PD 오빠가 옛날에 밴드 같이 했던 오빠야. 오전에 미리 연락도 했고.”
“뭐야, 낙하산이네요?”
“누가 뭐래?”
미주는 어딘가 신나보였다.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하는 듯한 장난기 가득한 모습이었다.
사실 미주는 런 디스 타운의 키보드와 랩의 조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조화.
“근데 비트는커녕, 아무 것도 준비 안됐잖아요?”
“내가 있잖아. 말만해. 어지간한 건 다 키보드로 쳐줄게.”
상현이 머뭇거리자 미주가 상현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공연하기 싫어?”
상현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지금 공연하기 싫어? 아니, 전혀 아니었다. 공연을 하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밴드와 댄스팀을 보는 순간부터 공연이 하고 싶었다. 관객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아뇨. 하고 싶어요.”
“진짜?”
“네.”
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를 못했지만 하고 싶었다. 정말로.
“나는 힙합은 잘 모르지만, 너가 MP3에 있는 거 들려주면 어지간하면 쳐줄 수 있어.”
“멜로디 하나 없고 드럼 같은 퍼커션 밖에 없는 곡도요?”
“어? 그건 좀 곤란한데…….”
상현이 미주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었다.
피아노와 함께하는 랩이라면 얼른 떠오르는 곡이 있었다. 바로 준형의 대표곡인 ‘Alone at night’였다.
Alone at night은 십 수 년간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했던 준형이 유일하게 차트에 올린 곡이었다. 당시 인기가 굉장했었다. 출연은 안했지만, 공중파 음악 방송에서 출연 제의도 왔었다.
그러나 상현은 이 곡을 부를 수는 없었다. 지금 미리 불러버리면 준형의 히트곡을 뺏는 것 밖에 안됐다.
‘뭘 부르지?’
MP3의 플레이리스트를 뒤지며 생각했지만 여차하면 Walk this way를 다시 불러도 괜찮았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곡이 있었다.
2Pac (Feat. Nas, J. Phoenix) - Thugz Mansion
“이거 한 번 들어보실래요? 어쿠스틱 기타로만 친 곡인데?”
미주는 말없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한참을 노래에 집중하던 미주의 표정이 바꿨다. 그리고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손목을 까닥거렸다.
“와, 너는 어떻게 이런 노래를 알아?”
이어폰을 빼며 나온 미주의 감탄에 상현이 웃었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Thugz Mansion은 1996년에 사망한 투팍의 사후 앨범에 수록된 곡이었다.
무려 6년이나 지난 2002년에 발매된 앨범.
그러나 이 앨범은 빌보드 핫 랩/알엔비 차트에서 1위, 빌보드 200에서 2위를 했고, 싱글로 발매된 Thugz Mansion은 빌보드 핫 랩 송에서 4위를 차지했던 노래였다. 앨범 판매량으로 따지면 첫 주에만 300만 장이 팔렸다.
뮤지션이 죽고 6년 뒤에 나온 앨범이 빌보드를 점령했다는 것은 쉽게 믿기 힘든 일이었다.
투팍은 그만큼 위대한 뮤지션이었다.
“키보드로 칠 수 있어요?”
“어쿠스틱 기타와 똑같은 사운드는 안 되겠지만, 키보드도 나름의 맛이 있을 것 같아.”
“좋아요. 이걸로 해요.”
“가사 외우고 있어?”
“제가 외우고 있는 외국 랩이 다섯 개쯤 되는데, 그 중 한 개에요.”
2005년을 기준으로, 상현이 외우고 있는 노래는 현재 발매된 랩이 2개. 아직 발매되지 않은 랩이 3개였다.
물론 국내로 들어오면 준형의 랩을 비롯해서 외우고 있는 곡이 많았지만.
“이게 코드가 루프(Loop : 반복)되는 형식의 노래잖아. 내가 한 바퀴 루프한 다음에 딴딴딴 하고 사인을 줄게. 그 다음에 랩을 해.”
“사인을 캐치할 수 있으려나?”
“들으면 알거야. 그러니까 처음에 속도를 익혀둬. 원곡이랑 비슷하게 가긴 할 건데, 차이가 있으니까.”
미주와 상현이 그렇게 이미지로 공연 곡을 상의하는 사이, 어느새 그들의 차례가 다가왔다.
“가요.”
상현과 미주가 무대에 올랐다. 세종악기사 때와는 사뭇 기분이 다르다. 세종악기사 때는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섰다면, 지금은 그의 의도다.
무대에 오르니 많은 사람이 보였다.
사실 본격적으로 무대를 관람하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을 위한 성금 모금 행사기 때문에, 앞줄 앉아계신 시각장애인 분들이 제법 많았고, 봉사자와 공연진까지 합치면 인원은 꽤 됐다.
다음 차례 밴드에게 양해를 구한 미주가 키보드에 앉아 세팅을 시작했다. 그 사이 마이크를 잡은 상현은 가만히 서있기 멋쩍어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Thugz Mansion이란 곡을 공연할 팀입니다.”
저 아래에서 누군가의 ‘팀 이름이 뭐예요?’ 하는 질문이 들렸다. 상현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하다가 M&S라고 말했다. 갑자기 떠오른 M&S는 미주&상현이라는 뜻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미주의 키보드 세팅이 끝나고 잔잔한 피아노 선율과 함께 공연이 시작되었다.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던 어쿠스틱 기타의 멜로디와는 달랐지만, 곧 키보드 멜로디에서 익숙한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나지막한 상현의 랩이 시작되었다.
조용히 밤을 보낼 수 있는 곳, 긴장을 푸는 시간
내 삶에는 너무나 압력이 많아, 때때로 울지
한 번은 자살은 생각했었고, 시도할 뻔 했어
하지만 권총을 드니, 내 엄마의 눈만 보이더군.
누구도 내 힘든 길을 몰라, 문제를 일으키는 걸로만 보여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때 계속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면서
상현은 편하게 랩을 불렀다.
멋을 부리지도 않았고,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단지 즐겁게, 무대 위의 순간을 즐기려 노력했다.
썩 좋지 않은 음향 상태, 의미를 전달할 수 없는 영어로 가득 찬 가사. 그러나 상현의 무대는 시선을 끄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편안한 느낌을 받은 상현은, 후렴을 부를 때 즉흥적으로 한국어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모든 거리, 모든 도시엔
우릴 힘들게 하는 곳들이 있지
술을 마시며 편하게 누워
하늘을 봐도 돼, Cause It's all good
널 힘들게 하는 건 잊어버려
그건 서서히 사라질 테니까
Nothing but Peace, Love
열정이 있는 곳, 각자의 거리에서
아주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지만, 듣는 사람들이 고개를 까닥거릴 수 있는 노래였다.
후렴구인 노래가 끝나고 상현은 다시 최선을 다해 랩을 이었다. 중간 부분에 가사가 헷갈려 멈칫하는 부분도 있었고, 실수로 1절 부분의 랩을 2절에 다시 부르기도 했다.
마침내 아주 짧은 공연이 끝났다.
“감사합니다.”
상현과 미주가 꾸벅 인사했다.
즐거운 무대였다. 하지만 썩 잘한 무대는 아니라고 생각됐다.
그러나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뜨거운 박수가 들렸다. 가장 앞자리에서 앉아 계신 시각장애인 분들에게 나오는 박수였다.
< Verse 2. 움직여야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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