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24화 (24/309)

< Verse 2. 움직여야지 >

상현은 화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사업하면서 얻었던 인내심과 부동심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홍 사장의 공격적인 말투가 자꾸 생각났다.

집으로 돌아온 상현은 상미가 없음을 확인하고 방에 틀어박혀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런디스타운보다 좋은 곡을 만들어 증명하겠어.’

그러나 상현은 랩 메이킹을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적당한 비트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직 유튜브(Youtube)가 없구나.’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막연히 랩에 쓰일 인스(Inst)를 유튜브에서 찾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2005년은 아직 유튜브가 정식 오픈하지 않은 시기였다.

사실 나는 랩에 대해서는 잘 모르네. 하지만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

홍 사장이 말이 떠올랐다. 상현은 정말 자신이 아무 것도 안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유투브 한 번 들어가지 않다니.

비트가 없으니 가사를 쓸 수가 없다. 아니, 억지로 쥐어짜서 쓰긴 했는데 이게 런디스타운보다 좋을 리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뭐지? 아무리 비트가 없다지만 이렇게까지 안 써지나?’

상현은 본인의 사고력이 18살이 아닌 38살이라는 것을 알았고, 미래에 히트 칠 유명한 랩들의 가사를 알고 있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멋진 가사를 뽑아낼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오히려 어떤 랩들이 히트 쳤다는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가사 쓰는 게 더욱 어려웠다.

-지이잉.

그렇게 가사를 쥐어짜내고 있던 상현의 핸드폰에 오연주 과장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상현은 별 생각 없이 문자를 확인하다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XX제약 회사 최종부도처리 됐네요. 투자하지 않길 잘했어요.

짧은 문자였지만 담겨있는 의미는 컸다.

‘그 회사는 공기업과 합병되는 게 아니었나?’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분명 XX제약회사는 공기업과 합병이 됐었다. 과거에.

과거에. 아니 미래에?

상현은 혼란을 느꼈다. 제약회사와 공기업의 합병은 그가 과거에 겪었던 일이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미래의 일.

‘나비효과가 벌써 발휘되는 걸까?’

아무리 캘리포니아 나비의 날개 짓이 텍사스의 태풍을 일으킨다지만, 자신의 행동이 제약회사의 최종부도에 어떤 역할을 했을까?

상현은 가사 쓰는 것을 포기하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된 이상,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의심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펀드에 투자한 금액도 빼야할까?

문득 방금까지 열심히 쓰던 가사가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도, 의미도, 진심도 담겨있지 않은 가사.

‘내가 음악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내가 알고 있던 미래의 음악 판이 바뀌면 어떡하지?

오연주 과장의 문자 메시지 하나가 상현에게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불안감을 이기려 억지로 가사를 쓰던 상현은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오빠! 오빠!”

“으, 허리야…….”

상현은 상미가 깨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노인네야? 왜 그러고 자고 있어?”

나도 모르게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나보다.

“어쩌다보니까……. 지금 몇 시야?”

“열시 반이야. 밥 먹어. 설거지는 오빠가 하고.”

“알겠어.”

상현은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별로 입맛이 없었다.

“왜 이렇게 깨작거려?”

“아침이라 입맛이 없네. 어제 몇 시에 들어왔어?”

“아홉시 쯤. 나는 오빠 집에 있는지 몰랐어. 거실에 불 좀 켜놓지 그랬어.”

“내가 불을 안 켰었나?”

상현이 하하 웃더니 국을 후루룩 마셨다.

“맛있네. 요리는 언제 배웠어?”

“밥 다 남기고 맛있다는 건 뭐야?”

“국은 다 먹었잖아.”

상미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빠.”

“응?”

“너무 가장인 척 안 해도 되니까. 오빠도 좀 나가서 놀고 그래. 너무 힘없어 보인다.”

“응? 아니, 나는 괜찮은데?”

상현이 힘이 없는 것은 상미와는 아무 상관없었지만, 상미가 보기에는 아니었다.

결국 상현은 오늘 하루는 나가서 놀라는 상미의 성화에 억지로 집에서 쫓겨났다. 상현은 덜 마른 머리를 털며 상미한테 항의 문자를 보냈다.

-너 혹시 집에 남자친구 부르려고 나 내보내는 것 아니냐?

-방금 아침 먹었는데 벌써 욕이 먹고 싶어?

-불시에 집에 들이닥칠 거니까. 긴장하고 있어라. 밥은 알아서 잘 챙겨먹고.

이제 답장도 없네.

상현은 상미의 마음 씀씀이가 곱다고 생각했다. 물론 상현이 정말 가장의 무게 같은 것에 허덕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느끼는 스트레스의 원인은, 확실하다 생각했던 미래의 일이 바뀐 것.

‘난 병원에서 불확실한 미래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상현이 병실에서 했던 다짐은 유효하다. 과거와 같은 삶을 살기보다는 도전하겠다는 의지.

그런데 왜 불안한 것일까?

상현은 억지로 생각을 떨쳐냈다.

모처럼 쉬는 토요일이다.

‘우철이나 준형이한테 연락해볼까? 아직 자고 있으려나?’

토요일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고민하고 있던 상현의 핸드폰이 지이잉 울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신미주’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이것 좀 들어봐.”

“저거 좀 가져와봐.”

“아, 뭐해. 왜 이렇게 느려?”

상현은 미주가 쇼핑몰을 활보하는 것을 따라다니면서 딱 한 마디만 곱씹었다.

아니, 우리가 이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잖아?!

미주의 전화는 상현에게 꼭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며 시내로 오라는 전화. 그렇게 시내에 도착한 상현이 해야 할 일은 미주의 짐꾼이었다.

“저기요.”

“왜? 배고파? 기다려봐. 이것만 사고.”

“아니 배가 문제가 아니라……!”

“너가 보기에는 뭐가 낫냐? 둘 중에는 이게 낫지?”

몇 번이나 느꼈지만 참 자기주관적인 여자다.

투덜거리던 상현은 어느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편한 마음으로 미주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대학졸업부터 취직, 퇴사, 창업, 그리고 부도를 막으려고 아등바등하던 시간까지 쉴 새 없이 달려왔었다.

길거리에서 쇼핑이란 걸 해본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난다. 그냥 돈 버는 시간 말고 날 위한 시간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청혼은 안했지만, 은연중에 ‘어쨌든 이 여자랑 결혼하겠지.’라고 생각했던 약혼녀도 사업이 망하니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지금 그녀는 뭐하고 있을까?

‘아니, 생각해보니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인가? 오 마이 갓.’

5살 차이가 38살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18살인 지금은 끔찍하다. 13살! 초등학생이라니!

“무슨 생각을 그리해?”

“철컹철컹.”

“뭐?”

“아니에요.”

상현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밥먹으러가자.”

“잠시 만요. 저도 살 게 있어요.”

상현은 매장으로 들어가서 꽤 비싼 팔찌를 하나 샀다.

“혹시 나 주려고?”

“제가 미쳤어요?”

“어린 것이 누나한테 건방지게……!”

상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포장된 팔찌를 가방에 넣었다.

“그럼 누구 주는데?”

“여동생 줄 겁니다.”

“거짓말하네! 내가 22년 평생, 길가다가 여동생 선물 사는 오빠는 한 번도 못 봤다!”

“아무튼 그쪽 거 아니니까 신경 끄세요.”

상미에게 줄 선물이었다.

“누나한테 버릇없게 그쪽이라니. 생각해보면 저번부턴 누나라는 말을 잘 안 쓰는 것 같다?”

“……밥이나 먹죠. 산다면서요?”

아무리 18살에 적응하는 중이라도, 미주같이 새파랗게 어린(?) 것한테 누나란 말은 선뜻 안 나온다.

미주는 알바비를 받았으니 크게 한턱 쏘겠다며 상현을 데리고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중요한 일이 짐꾼인가요?”

“당연히 아니지. 이건 시간이 남아서 겸사겸사 하는 거고. 너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어.”

“뭔데요?”

“따라오면 알아.”

상현과 미주는 상추튀김, 떡볶이, 김말이로 한상 푸짐하게 먹고는 다시 시내로 나왔다. 그 많던 짐은 친구가 일하는 노래방 카운터에 맡기는 지혜도 발휘했다.

“가자.”

상현은 미주에게 이끌려 시내 외곽의 공원으로 향했다. 금남로 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공원에는, 마침 광주 시청에서 진행하는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 Verse 2. 움직여야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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