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 움직여야지 >
여중생들이 떠나고 가만히 있던 준형이 입을 열었다.
“뭐야, 너 밴드랑 같이 음악 해?”
“아니, 그게…… 쭉 같이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어쩌다가 같이 공연 한 번 한 거야.”
“전주 무슨 페스티벌도 간다며?”
“아냐, 상미 때문에 거절했어. 준형아 미안하다. 가사를 내가 좀 더 자세히 봤어야하는데.”
과거에 준형은 상현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가 앨범을 발매했었다. 준형에게 셋 리스트가 가지는 의미는 어쩌면 상현의 생각보다 훨씬 각별할 수도 있었다.
네가 걸으려는 황금의 길 위에서도 내 음악이 들리면 쉬어, 몇 걸음쯤은.
타이틀곡에 수록된 가사였다. 상현은 준형이 언급한 ‘너’라는 인물이 자신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상현은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의미를 가진 가사를 상현이 무시해버린 것과 다름없으니.
상현이 준형에게 사과하자 준형이 피식 웃으며 상현이 어깨를 툭 쳤다.
“새꺄, 나 화 안 났어. 왜 이렇게 눈치를 봐. 그냥 밴드랑 음악하면서 크루나 다른 거에 신경 쓸 틈이 없었으면 바로 말을 해주지 그랬냐.”
“신경 쓸 틈이 없는 건 아니고…….”
“다음에 밴드 형들이나 소개시켜줘. L&S밴드면 나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아무튼 크루는 일단 나는 만들 거니까. 너가 들어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들어오면 되잖아?”
상현의 알았다는 대답에 준형은 심부름에 늦겠다며 길을 재촉했다. 준형은 정말로 상현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상현은 이상하게도 준형한테 미안했다.
“그럼 너 노래 만든 거 있냐? 밴드랑 같이하는?”
“아직 없지. 마이크 사려고 세종악기사 갔다가 우연히 밴드를 알게 된 거야.”
“아아, 그렇구나. 그럼 전주에서 열린다는 무슨 페스티벌은 아예 포기야?”
“상미 때문에 별 수 없지.”
“저번에 보니까 상미 괜찮은 것 같던데?”
“나나 친구들이랑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직도 혼자 사람 많은 곳에 있으면 위험해. 전주에 가게 되면 아무래도 축제 한 가운데 상미 혼자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도 꽤 자주.”
“내가 같이 가줄까?”
준형의 제안에 상현이 멈칫했다. 매력적이긴 했다.
“음, 내가 필요하면 부탁할게.”
“그래.”
걷다보니 상현과 준형의 이동 방향이 달라지는 사거리에 도착했다.
“간다.”
“내일보자.”
몇 걸음 걸어가던 준형이 머뭇거리다가 상현에게 말했다.
“상현아. 나도 음악 잘하고 싶어. 너가 알려줄 만한 것 있으면 알려줘.”
“내가 뭘 알려줘. 니가 더 잘 알지.”
“그려, 내일봐.”
상현은 잠시 준형이 가는 걸 보다가 집으로 향했다. 그가 기억하는 준형은 저렇게 어른스럽지 않았는데 뭔가 이상했다.
‘어른스러운 척을 한 걸까?’
집에 도착하니 상미가 있었다.
CA 담당 선생님이 집에 사정이 있어서 수업 없이 일찍 귀가한 것이었다. 상현은 CA 등록비가 있는데 오늘 빠진 수업 보강되는 거냐고 물었다가 상미에게 좀생이처럼 굴지 말라고 한 소리를 들었다.
“참, 오빠 나 조금 이따가 친구 집 갈 거야. 저녁은 거기서 먹고.”
“친구? 누구?”
“말하면 오빠가 알아? 같이 수행평가 할 게 있어서 그러니까 오라버니는 관심 끄시지요.”
“남자냐?”
“생각하는 거 하고는.”
상현은 한동안 힘이 빠져 있던 상미가 다시 자신에게 틱틱 거리는 게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사실 정상적인 남매의 사이가 무작정 좋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물론 상현은 상미를 동생보다는 딸처럼 대하고 있었지만.
“용돈 줄게 집에 올 때 택시타고 와. 마중 나갈 테니까 전화하고.”
“마중은 무슨 마중이야. 오빠는 할 일 없어? 음악 한다며?”
“하고 있어.”
상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하고 있다고? 내가 보기에는 하루 종일 집에서 게으름 피우는 것 같은데?”
“아니야. 천천히 계획 세우고,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최적화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
“음악에 그런 게 필요해?”
“당연하지. 세상 모든 일에는 통계학적 분석이 중요하니까. 성공하려면 체계적으로 접근해야지.”
“그치만 오빠가 하려는 건 예술이잖아? 수학이 아니고?”
상미의 질문에 상현이 머뭇거렸다.
예술이라고 체계성이 필요 없을 리는 없다. 창업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느꼈던 것이 ‘감을 믿지 말 것.’이니까.
‘또 과거 타령이야? 새롭게 시작한 거잖아.’
상현이 잠시 머뭇거리자 상미는 흥미를 잃었는지 화제를 돌려버렸다.
“오빠, 어제 사온 수박 먹어봤어?”
“아니? 맛있어?”
“더럽게 맛없어. 사이다 좀 사와 봐. 화채 해먹게.”
상현은 바람을 쐬고 싶은 마음에 차라리 잘됐다며 마트로 향했다.
사이다를 사고 나오는데, 뜬금없이 미주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너 어디야?
“집 앞 마트에요.”
-지금 별로 안 바쁘지?
이 여자가 왜 이러지? 나한테 화난 거 아니었나?
미주 목소리는 좀 퉁명스러웠지만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요? 별로 안 바빠요.”
-밥은 먹었어?
“아니요.”
-그럼 잠깐 가게에 들러.
“세종악기사로? 지금요?”
-응. 사장님이 널 좀 보고 싶어 하시는데? 온 김에 밥도 같이 먹고.
“홍 사장님이 저를? 왜요?”
-몰라? 그냥 너 좀 불러달라고 사장님이 부탁하셨어. 올 거지? 빨리 와.
“어…… 네. 갈게요.”
상현은 L&S 멤버들과 술을 마시며 세종악기사의 홍 사장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좋은 분이여서 항상 손해보고 살지만, 주변에 넘치는 인복으로 그 손해를 메운다고 했다.
광주 인디 음악가들의 대부라지?
무슨 일로 자신을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만나서 나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한 상현은 사이다를 한 병만 사왔다고 욕을 먹고는 상미와 함께 집에서 나왔다.
상미는 친구 집으로 향했고, 상현은 택시를 탔다.
***
“안녕하세요.”
“반갑네. 자네가 상현 군이지?”
“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상현이라고 합니다.”
홍 사장의 인상은 평범했다.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외모에 부드러운 목소리. 그러나 L&S 멤버들의 이야기를 듣고 떠올렸던 엄청나게 인자한 아저씨처럼은 보이지는 않았다.
홍 사장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가게를 닫고는 상현과 미주를 데리고 근처 고급 중화요리전문점으로 향했다.
“이 웬수 덩어리는 대체 왜 따라 오는 거야?”
“아, 사장니이이임.”
홍 사장이 미주를 구박했고, 미주는 꿋꿋이 애교를 피웠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먹고 싶은 거 골라라.”
“오예!”
주문을 끝내자 정체모를 차가 나왔다. 상현은 차를 마시며 홍 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한데, 왜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음, 자네 고향이 어디야?”
“네?”
뜬금없는 말에 상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광주로 이사 왔어? 말투가 광주사람이 아닌데?”
“어…… 아닙니다. 광주사람입니다.”
“그래? 부모님 고향이 어딘데?”
“부모님은 두 분 다 서울출신이셨습니다.”
“학교는 어디야?”
홍 사장은 상현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쓸데없는 말들만 늘어놓았다. 그런데 홍 사장과 이야기하다보니 자연스레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게 연륜인가 싶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니 세종악기사에서 참여했던 잼 이야기도 나왔고, L&S 밴드와 만났던 이야기도 나왔다. 심지어 길에서 만난 여중생 무리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는 사이 음식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잼에는 어쩌다가 참여하게 된 건가? 경민이 그 자식이 꼬장 피우는 것 같던데?”
상현은 잼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말하면 이경민을 욕하는 뒷자리가 될 것 같아서 머뭇거렸다. 그러자 지켜보던 미주가 상황을 대신 설명했다.
“흠. 역시 그랬군.”
홍 사장은 뭔가를 생각하더니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 Verse 2. 움직여야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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