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ro. 한번뿐인 삶 >
어둑어둑한 밤사이로 봄과 여름의 냄새가 섞인 바람이 불었다.
“이럴 때는 정말 담배 생각이 절실하네.”
한 번도 흡연을 하지 않은 싱싱한 몸이건만,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이론이 사실인 듯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상현은 유혹을 꾹 참으며 전남대학교 정문으로 향했다.
톨게이트를 지났다는 전화를 받고 정문의 돌계단에서 10분쯤 앉아있으니, 빨간색 외제차가 보였다.
‘저거 비싼 차인데?’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마 출시년도가 2005년인 신형 외제차 일 거다. 평범함 회사원은 아니라는 뜻.
차 문이 열리고 늘씬한 몸매의 여자가 내렸다.
목소리를 듣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젊었다.
“이상현 학생 맞죠?”
“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제 이름은 오연주에요. 우선 차에 타요. 어디 커피숍이라도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오연주의 얼굴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추 20대 초반의 외모로 보였다. 동안이라고 쳐도 20대 중반.
“이 근처에 다방이나 커피숍이 있나요?”
“글쎄요. 광주역 앞에 다방이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2005년만 해도 커피숍과 다방의 비율이 비슷하던 시기였다. 상현은 연주의 차를 타고 광주역 앞의 다방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생애 통틀어 처음 들어오는 다방이다.
다방에 들어와 커피를 시킨 연주는 자리에 앉자마자 상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울었나요?”
“네?”
“눈이 부었네요. 울었어요?”
상현이 머뭇거렸다.
아무리 현재 신체 나이에서는 자신이 어리다고 해도, 상현은 스스로를 38살로 인식하고 있다. 띠 동갑도 넘게 차이가 나는 여자한테 울었다고 말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아닙니다. 저녁 먹고 졸다가 나와서 그런가보네요.”
“흠……. 그래요.”
누가 봐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왠지 주도권을 잡힌 기분이다.
‘아니, 울긴 울었으니까 증명할 수 없는 건가?’
연주가 상현을 빤히 살폈고, 자연스레 상현도 연주를 보게 됐다. 촌스러운 화장이 눈에 안 익어서 그렇지, 굉장히 예쁜 얼굴이다.
“그나저나 왜 절 보자고 하셨죠? 부재중도 18개나 찍혀있던데.”
“전화는 왜 이렇게 안 받았나요?”
“받을 정신이 없었습니다. 왜 전화하신건가요? 오경그룹 직원이라고 하셨는데 직원 신분으로 절 찾으신 건가요?”
그때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연주는 커피를 받더니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냈다.
“오경그룹 전략기획실의 오연주 과장이에요.”
“과장?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여섯이에요.”
생각보다는 나이가 있었지만 절대 과장이 될 나이는 아니었다. 자동차도 그렇고, 있는 집안의 자식이 분명했다.
“절 왜 찾아오셨나요?”
“상현 학생은 부모님이 왜 돌아가셨는지 알고 있나요?”
“……!”
예상치도 못했던 소리에 상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싶은 걸 간신히 꾹 참았다.
“사고라고 알고 있습니다. 오경그룹 행사에 동원된 차량의 중앙선 침범으로.”
“음주운전으로 발생한 사고라는 것도 알고 있나요?”
“음주…… 운전?”
생전처음 듣는 이야기다. 음주운전이라니?
아무리 과거의 자신이 어수룩했다고는 하지만 음주운전을 기억하지 못할 리는 없다.
가해자가 있단 말인가?
분노가 치밀어 오름과 동시에 의심이 생겼다.
‘이 여자는 나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일까?’
오연주 과장의 눈빛은 선의, 호의를 담기보다는 어떤 의도가 있는 사람의 눈빛으로 보였다.
“자세히 말씀해주시죠.”
오연주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근 오경그룹은 본사와 계열사들의 전략기획실을 개편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계열사 전략기획실 직원 중 합당한 자들이 교육 겸 MT를 떠나게 되었다. 그 안에는 오연주도 포함되어 있었고.
오전에는 교육, 오후에는 멤버십 프로그램, 저녁에는 술판을 벌이는 날들이 며칠 동안 이어졌다.
문제는 교육종료를 3일 앞둔 날 발생했다.
집에 급한 일이 생긴 유통 계열사의 고 부장이 새벽에 운전기사를 억지로 깨워서 회사차량을 출발시킨 것이다.
문제는 운전기사가 전날 늦게까지 술을 먹은 것. 운전기사는 새벽에 일어나서도 술에 크게 취해있는 상태였고, 모두가 만류했지만 고 부장이 억지로 운전을 강행했다.
상현은 연주의 말을 들으면서 상황이 대충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화가 났다.
“그리고 마침 본사에 일이 발생해 서울로 돌아가려는 직원들이 좀 있었어요. 저는 감기 기운이 너무 심해서 병원에 가려고 차를 탔고요.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운전기사가 취해있다는 걸 몰랐죠. 다들 술에 취해서 차에서 곯아떨어졌거든요.”
“……계속하세요.”
“그리고 사고가 났어요.”
연주는 사고 전날에 몸이 좋지 않아서 약을 먹고 일찍 잠이 들었다. 그런데 너무 많이 자버리는 관계로 서울로 가는 버스에서 나쁜 몸 상태를 가지고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아서 창밖을 보다가 버스가 자꾸 비뚤비뚤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은 다른 동료들에게서 나는 술 냄새인 줄 알았던 것이 기사의 것이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사고가 났어요.”
연주는 사고가 나면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의 운전수가 바꿔있었다.
“다른 사람으로 바꿨다고요?”
“음주운전을 하지 않은 멀쩡한 직원이 조서를 쓰고, 실제 운전기사는 보이지 않더군요. 저보다 빨리 병원으로 이송된 것 같아요.”
“고 부장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아마도요. 음주운전에 의한 사고보다는 단순 과실이 훨씬 수습하기도 쉽죠. 특히 그 음주운전을 무리하게 추진한 입장에서는.”
“객관적인 이야기 인가요?”
“고속도로 진입로에 설치된 과속감지 CCTV를 보면 당시 운전자와 조서를 작성한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CCTV는 이미 확보해놓은 상태에요.”
상현은 과거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에 혼란스러웠다. 잠잠해졌던 두통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러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계속 전화하신 이유가 이걸 알려주려고 했던 건가요?”
“네. 전화를 너무 받지 않아서 당황하던 참이었어요. 고 부장이 최대한 빨리 사건을 무마하려고 노력 중이거든요.”
원래 이맘때는 크게 방황하며 어느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를 동정하는 위로의 전화도 싫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일상의 용건을 이야기하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회귀 후 깨어난 상현은 이미 아픔을 극복한 상태였고 전화를 받게 된 것이었다.
“저에게 이런 것을 알려주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머리가 아프다.
온몸의 관절이 저린 것 같은 환지통이 다시 시작된다.
“단순 과실로 수사방향을 잡은 경찰에 강한 이의를 제기하고, 사건 종결을 거부하세요. 또한 제가 고용한 변호사가 상현 학생과 협의 하에 고 부장을 고소하게 될 거에요. 상현 학생이 고소인이 되는 거죠.”
“왜요?”
“왜라뇨? 고 부장은 살인을 저지른 것과 다름없어요.”
“오 과장님이 살인범을 잡는 형사입니까? 계열사는 달라도 같은 그룹의 치부 아닙니까? 고 부장도 라인이 있을 테고, 그 라인이 난리를 치면 오 과장님도 곤란하실 텐데요?”
오연주는 태연한 척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부모의 죽음에 책임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손쉽게 고소할 줄 알았더니 의외다.
하지만 상현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상현은 회사의 창립자이자 오너로서 10년을 근무한 인물이었고, 사내 정치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저는 오경그룹의 일원으로, 꽤 높은 후계서열을 가지고 있어요. 여자라서 본사를 이어받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주인의식이 있단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나요? 오경그룹의 치부를 모른 척 지나갈 수 없다는 거예요.”
오연주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순수한 정의감 때문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정말로 고 부장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합당한 법의 처벌을 받게 하고 싶고.
‘이 정도면 됐겠지?’
오연주가 슬쩍 눈을 돌려 상현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한 겨울에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 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Intro. 한번뿐인 삶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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