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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화. 종장(2) (248/249)
  •  249화. 종장(2)

     다섯 각성자가 잃었던 의식을 되찾았을 땐,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돌아왔군.”

     시간 여행을 떠나기 직전, 회합 장소로 사용하고 있었던 로엘 직속 공방. 다섯 각성자는 어느새 자신들이 널찍한 원탁에 둘러앉아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실감이 잘 안 나네. 그렇게 10년을 보내고 왔는데, 정작 여기서는 1초도 흐르지 않았다는 거잖아.”

    “확실히 그러네. 조금 싱숭생숭한 기분이야.”

     르우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리자, 옆에서 카트란이 그것을 긍정했다.

    “자자. 감상은 조금 나중으로 미뤄두고. 정산부터 하자. 보고 싶은 얼굴들 많잖아? 해야 할 일부터 빠르게 끝내자고.”

     로엘이 손바닥을 짝짝 두드리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각성자들은 한 사람씩 돌아가며 그동안의 수확에 대해 이야기했다. 레인, 바르바젠, 르우벤, 카트란 순서였다.

     획득한 모든 물건의 종류와 수량을 정확하게 기입했다. 그중 각자가 사용할 것들은 따로 추리고, 나머지 것들은 사용처를 명확히 결정한 뒤 걸맞은 역할을 맡고 있는 이들에게 배분했다.

     이내 로엘의 순서가 돌아왔다. 다른 각성자들이 궁금증이 어린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넌 그동안 뭐 하고 다녔냐?”

    “무슨 일을 할 건지 말도 안 하고, 사라진 동안 연락도 안 되고. 혼자서 뭘 그렇게 하고 다닌 건데?”

     그러자 로엘이 득의양양한, 동시에 사악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흘렸다.

    “궁금하냐?”

    “뭘 저지르고 온 거야, 너.”

     레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로엘이 ‘저런’ 표정을 지었다는 건, 무언가 말도 안 되는 짓을 꾸몄거나 저질렀다는 의미였다. 이 상황은 물론 후자이리라.

     딱.

     로엘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아공간이 열리고, 그 내부 한구석이 엿보였다.

    “실화냐, 이거.”

    “미친 짓도 누가 하냐에 따라 스케일이 천차만별이구만.”

    “세상은 넓고 약쟁이는 많다더니.”

     웬만해선 크게 동요하는 일이 없는 레인이 얼굴을 굳혔다. 르우벤이 입을 떡 하고 벌렸다.

     카트란이 기가 막혀서 말문을 잇지 못하고, 바르바젠이 몇 번이고 눈을 비비며 자신이 본 게 현실인지를 검증했다.

    “설마 마도 비행선을 통째로 훔쳐 왔을 줄이야.”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카트란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 지난 시간 동안 로엘은 치밀한 공작을 벌인 끝에 마도 비행선이 보관된 수납고에 침입, 거대한 비행선을 통째로 아공간에 넣어 훔쳐 왔다.

     곧바로 각성자들과 함께 원래 시대로 도망쳐 와버렸으니, 그야말로 완벽 범죄가 성립되었다. 범인이 누군지 알아내고 못 알아내고의 문제가 아닌, 알아내더라도 처벌할 수가 없다는 의미에서!

    “그쪽은 아주 난리가 났겠군.”

     레인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 가운데, 로엘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제 우리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잖아?”

     * * *

     정산을 끝마치고, 다섯 각성자는 뿔뿔이 흩어졌다. 각자 애타게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찾아서.

     르우벤은 용병대 본부가 자리 잡고 있는 수도로 향했다. 바르바젠은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사라졌다. 카트란은 이레닐이 기다리고 있을 제국군 주둔지로 복귀했다.

     그리고 로엘은, 자신을 수행하기 위해 따라온 플로라가 있을 옆방을 급습했다.

    “응? 끝났어?”

    “…….”

     로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그리곤 기척 차단 아티펙트를 작동시켜, 방 내부에서 소음이 새어 나가지 않게 했다.

    “왜 그래?”

     로엘은 갑작스러운 자신의 행동에 어리둥절해하는 플로라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들었다.

    “자, 잠시만!”

     그대로 플로라를 끌고 침대로 향한 로엘이, 그녀를 밀어붙여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듯 자리 잡았다. 그리곤 억눌려 있던 무언가를 해방하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난데없는 박력 넘치는 태도에 플로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로엘이 이런 행동을 취할 거라곤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무, 무슨 일 있었어?”

    “아뇨, 아무 일도. 그냥 갑자기 이러고 싶어져서.”

     로엘은 그대로 플로라의 입술을 덮쳐 들어갔다. 플로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설육이 얽히고 타액이 섞였다. 그와 동시에, 로엘의 손길이 조용히 플로라의 옷가지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긴 시간에 걸쳐 반쯤 나체로 화한 플로라가, 숨을 헐떡이며 로엘을 손으로 밀어냈다. 거부의 몸짓이라기보다는 힘에 부쳐 애원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하, 하아.”

     로엘이 상체를 일으키며 입가를 손등으로 닦았다. 플로라가 정신없이 숨을 고르는 가운데, 그가 아공간에서 하나의 단환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 제가 누나를 위해 선물을 하나 준비했는데. 뭔지 맞춰보시겠어요?”

    “선물?”

    “네. 선물.”

     플로라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로엘의 손에 들린 단환을 발견하고 ‘몸에 좋은 약이냐’고 물었다. 로엘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훨씬 대단한 물건이죠.”

    “……?”

     로엘은 이쯤에서 단환의 효능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플로라의 의아해하는 얼굴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지만, 사실 그 본인이 더욱 애가 닳아 있었다.

    “젊음의 비약.”

    “젊음의 비약?”

    “말 그대로 복용자의 육신을 젊게 유지시켜주는 비약이에요. 마치 엘프와도 같이, 죽을 때까지 늙지 않게 되죠.”

     힘없이 풀려 있던 플로라의 눈이 번쩍 떠졌다. 세상에, 그런 물건이 존재할 줄이야!

     여인이기에, 아니 그 이전에 사람이기에. 눈앞의 단환이 미치도록 탐이 났다. 탐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라.

     로엘이 단환을 든 손을 내밀었다. 플로라가 조심스럽게 마주 손을 내뻗어왔다.

     그런데 플로라의 손이 다다르기 직전, 로엘이 손을 휙 빼냈다. 마치 약 올리듯.

    “어째서?”

     플로라의 얼굴에 극도로 아쉬워하는 기색이 어렸다.

     로엘이 단환을 다시 아공간에 수납하며 상체를 숙여 그녀와 밀착했다. 그리곤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워낙 귀한 물건이라 맨입으로는 줄 수 없을 것 같은데.”

     그것은 더없이 감미로우면서도, 듣는 이를 오싹오싹하게 만드는 마력이 담긴 목소리였다.

    “이걸 줄지 말지는 이제부터 고민해보려고요.”

    “……!”

     플로라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런 로엘의 태도가 정말로 낯설었다. 그렇지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온몸이 긴장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아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깊은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아찔한 감각마저 느껴졌다.

     로엘은 플로라의 고개를 붙잡고 돌려,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플로라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열풍이 몰아쳤다. 한 쌍의 남녀가 뒤엉킨 침상 위를 뜨겁게 달구는 열풍이.

     * * *

     열풍이 몰아친 것은 레인이 되돌아온 카르테리온 검가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오늘따라 왠지…….”

    “있었지.”

     레인은 땀에 젖은 레이나의 머리칼을 쓸어주고, 그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레이나가 의아한 얼굴로 질문해오는 것을 모호한 답변으로 얼버무리며.

    “잘 자.”

    “네. 스승님.”

     두 사람은 그대로 이불을 덮고 누워 깊게 잠들었다. 그야말로 기준 좋은 수면을 취했다.

     다음 날 아침.

     몸을 씻고 옷을 걸친 뒤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던 레인은, 셀린으로부터 한 가지 요청을 받았다.

    “사부.”

    “?”

    “나 어제 벽을 넘었거든. 그래서 말인데, 대련 한 번 해줘.”

     레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이전과는 달라졌음이 느껴졌다.

     바로 어제 시간 여행을 마무리 짓고 돌아온 탓에 현실 감각이 조금 무뎌져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눈치챘을 터였다.

     아무튼 경사였다. 이로써 카르테리온 가문이 보유한 초월자의 숫자는 총 셋이 되었다. 레인과 레이나, 거기에 셀린까지.

     그야말로 대륙제일검가의 위상에 부족함이 없는 원로원이 구성되었다. 얼마 전에 초인의 경지에 오른 루미아까지 더해 계산한다면, 이미 상당한 수준의 전력이 갖춰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지. 밥 먹고 바로 연무장으로 이동할까.”

     레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셀린이 긍정하고, 거기에 루미아와 레이나가 가세했다.

     일리나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미소 띤 얼굴로, 동시에 약간은 부러워하는 얼굴로 지켜보았다.

     당연하다고 할까, 이후에 벌어진 대련은 뻔한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레인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격차를 선보이며 제자들을 눌러버렸다.

    “사부.”

    “왜.”

     셀린이 연무장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운 채 숨을 고르며 물었다.

    “또 언제 경지가 오른 거야?”

    “어제.”

     레인은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캬아악! 캬악!”

     한쪽에서 루미아가 바닥에 엎어진 채 분하다는 듯 바닥을 쾅쾅 내리찍었다.

     그동안 필사적으로 좁혀 온 격차가, 또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꾹꾹 눌러뒀던 수인족 특유의 분노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초인의 경지에 접어들면서 과거 레인이 걸어둔 제약 따윈 진작에 깨뜨린 그녀였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오로지 레인만을 목표로 삼아 정진해온 그녀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일반인보다 훨씬 거대한 흐름을 지닌 그녀의 감정이 향하는 대상은 늘 레인이었다.

     그런 그녀이니만큼 느끼고 있는 분함의 정도가 다른 제자들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왜, 억울해?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닿을 수가 없어서? 그럼 포기하던지.”

     레인은 루미아를 위로하는 대신 오히려 자극했다. 그러자 루미아의 눈에 독기가 가득 들어찼다.

     루미아의 발광이 잦아들었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격전을 치른 직후인지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도 많이 컸네. 처음 봤을 때는 완전히 꼬마였는데.’

     어느새 루미아의 나이도 열아홉이었다. 그야말로 꽃 같은 미모를 자랑하는 여인이 다 되었다.

     새삼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시간 여행을 다녀오기 전에는 오히려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건만.

    “먼저 들어갈게요.”

     루미아가 휘청거리며 연무장 바깥으로 향했다.

     셀린이 그 뒷모습을 누운 채 가만히 바라보다가, 질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레이나가 빙그레 웃으며 따라서 일어나더니 셀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연무장을 벗어났다.

     세 제자 모두 의욕이 꺾이거나 하지는 않은 듯했다. 오히려 향상심을 불태우고 있다면 모를까.

     문득, 레인은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제자 복 하나는 제대로 타고난 듯하다고.

     정말로 과분하게 느껴질 정도로 좋은 제자들이었다.

     * * *

     각자 충분히 휴식을 취한 각성자들은 다시 바쁜 일상으로 복귀했다.

     마족의 3차 대륙 침공이 이뤄지기까지, 앞으로 3년이 남았다.

     로엘은 우선 바엘른 마탑을 찾아갔다. 그가 본 와이번을 타고 이동하던 도중, ‘젊음의 비약’ 하나를 꺼내 들고 그것을 잠시 응시했다.

     복용자의 젊음을 죽을 때까지 유지시켜주는 기적의 단약. 이 단약에는 또 다른 효과도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수명이 다해가는 인간에게 이것을 복용시키면…….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지.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10년 가까이.’

     안타깝게도 다량을 복용한다고 그만큼 수명이 더 늘어나는 건 아니었다. 육체의 한계를 쥐어짜는 것에 가까운 효능인지라, 두 개째부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높았다.

     바엘른 마탑에 들어선 로엘은 곧바로 탑주의 개인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 내부엔 세 사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탑주인 로카인 파르테인, 차기 탑주인 엘리제 파르테인, 그리고 로카인의 전속 의원.

     로카인은 침상에 누운 채 전속 의원에게 진료를 받고 있었다. 무슨 대단한 병환이 있는 것은 아니고, 수명이 다해가는 중이었다.

     오히려 그 정도면 굉장히 건강하게 장수한 축에 속했다. 보통의 마법사가 그 정도로 건강을 관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진대.

    ‘원래 역사대로라면 앞으로 1년 후에 자연사하고, 그 뒤를 엘리제 파르테인이 잇게 되겠지만.’

     로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로카인이 그의 기척을 읽고 살짝 고개를 들었다.

    “음?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이번에 제 손에 귀한 물건이 하나 들어와서 말이죠.”

     로엘은 사람 좋은 웃음을 입가에 그리며 침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엘리제 파르테인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겉으로 드러난 표정, 입 밖으로 꺼내는 말과는 달리, 로엘의 마음속 진심은 시커멓기 그지없었다.

     어딜 혼자 편하게 떠나려 합니까.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느라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한 판국이건만.

     이렇게 곱게는 못 보내드립니다. 가기 전에 대륙의 안위를 위해 뼈 빠지게 일 좀 하고 가시죠.

     한 10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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