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종장(1)
[남은 시간 : 2개월]
마신의 심장 조각 건을 처리한 이후, 각성자들은 본래의 시간 축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자. 본격적인 수확의 시간이다.”
다른 각성자들과 원탁에 둘러앉은 직후. 로엘이 훗, 하고 웃으며 말했다.
인과에 관련한 문제는 이제 다 해결되었다. 지금부터는, 이곳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김에 취할 수 있는 이득을 모조리 취하면 되었다.
“흩어져서 움직이자. 난 이미 지금부터 뭘 할지 정해뒀거든. 너희는 따로 생각해 둔 것이 있어?”
“난 미리 점찍어둔 미공략 유적들을 좀 돌아다니려고.”
르우벤이 번쩍 손을 들고 말했다. 로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 과거까지 왔는데 유적 공략이 빠지면 섭섭하다. 특히 공략 불가 판정이 내려져 자연 소멸되어 버릴 유적들. 한 번쯤 도전해볼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위험하겠지만, 그만큼 보상도 클 것이다. 이 시대의 유적이니만큼 더더욱.
‘르우벤이라면 따로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저 유적 귀신이라면 알아서 잘할 터였다. 이전에 진입한, 타임 트래블러가 봉인되어 있던 그 유적처럼 답도 없는 장소에 발을 들이는 게 아님에야.
“나는 그동안 만들어둔 연줄을 동원해 귀족가와 국가기관을 순회할 예정이다. 이 시대에는 미래의 그것에 비해 훨씬 다양한 용도로 마법을 활용하더군. 돌아가면 즉시 활용할 수 있는 마법들 위주로 모아볼 생각이다만.”
“좋은 생각이네.”
바르바젠의 설명에 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시간 동안 그것을 위한 밑 준비를 열심히 해왔음을 알고 있었다. 아마 상당한 성과가 있으리라.
“하는 김에 운명 마법도 챙겨. 엘리시안 하르베르그에게 언질을 해 뒀으니, 어렵지 않게 습득할 수 있을 거다.”
“그러지.”
바르바젠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으로는 카트란이 입을 열었다.
“나는 따로 생각해 둔 게 없어서, 그냥 이쪽 세계의 상단들을 순회하면서 미래에는 구하기 힘든 금속이나 아티펙트, 마법 재료 같은 걸 모아볼게.”
“잘 생각했어. 그것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 비용은 내가 지불할게.”
로엘이 아공간에서 그동안 이쪽 세계에서 모은 화폐와 값진 금속들을 꺼냈다. 거기에 애초부터 가지고 있던 금괴나 보석들도. 그것을 전부 카트란에게 넘겼다.
“그리고 레인. 너도 딱히 생각해 둔 것 없지?”
“어.”
“그럼 카트란과 함께 움직여. 적절하게 역할을 분담해서. 아마 손이 부족할 거다.”
레인이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로엘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짝짝 손바닥을 두들겼다.
“지금부터 아티펙트의 제한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걸리는 시점까지. 할 수 있는 최대한 뽕을 뽑아야 해. 지금 바로 시작하자.”
다섯 각성자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될 듯했다.
* * *
[남은 시간 : 1개월]
“나? 은거할 건데.”
“네에?!”
레인의 간결하기 그지없는 답변에, 앞서 ‘이제부터 뭘 할 생각이십니까?’ 하고 물었던 사내가 경악한 얼굴을 했다.
레인과 카트란은 각 상단과 마탑, 심지어 암시장까지 순회하며 갖가지 물건들을 모았다.
의외로 값싼 물건도 있었고, 상상을 초월하게 비싼 물건도 있었다. 그래도 로엘이 챙겨준 자금이 넉넉했고 두 사람의 신용이 확실했기에 그 부분에선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일손 부족이었다.
한 달 내로 최대한 많은 소재를 모으자는 취지. 두 명이라는 인원으로는 그 취지에 부합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 문제 해결을 위해, 레인과 카트란은 그동안 전장에서 함께하며 친분을 다진 몇몇 인물들을 동원했다. 주로 힘 좋고 우락부락한, 거리낌 없이 부려 먹어도 좋을 사내놈들을 골라 임금을 주고 고용했다.
“은거라니요! 레인 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명예 귀족은 고사하고 고위 귀족이나 검가의 주인이 되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텐데요!”
“관심 없어.”
“세상에.”
사내는 레인의 얼굴에서 진심을 읽어냈다. 정말로 일말의 미련이나 아쉬움도 남지 않은 듯했다.
이런 성격의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존경하고 따른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레인 님 좋다고 따라붙는 아리따운 영애들만 한 수레는 될 텐데요.”
“알 게 뭐야.”
“금은보화, 권력, 명예, 영토, 작위. 그 모든 걸 다 포기하시겠다고요?”
“필요 없어.”
사내의 눈에 황망한 감정이 담겼다. 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진심을 내뱉고 말았다.
“레인 님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만드시면 그 줄을 붙잡으려고 대기하고 있는 인원이 상당할 텐데요!”
“그 인원에 너도 포함되고?”
“네.”
“그러게 줄을 잘 잡았어야지.”
“커헉!”
사내가 뒷목을 붙들었다.
이럴 수가! 내 완벽한 노후 프로젝트가 이렇게 작살 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착실하게 돈 좀 모아둘걸!
“그, 그럼, 대체 이것들은 전부 어디다 사용하려고 이렇게 모으고 계신 겁니까.”
“내가 쓸 것 아니야. 친구 녀석이 모아다 달라고 한 거지. 그 녀석도 이번에 은거할 생각이거든.”
“…….”
“어딘가의 오지에 개인 연구실이라도 건설해서 처박히려나 보지. 머나먼 미래에 유적으로 출토될지도.”
레인은 사전에 논의해뒀던 거짓부렁을 태연한 얼굴로 늘어놓았다.
상당히 그럴듯한 거짓말이었다. 마법사가 원래 그런 족속들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후.”
사내는 무언가 체념한 얼굴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단호한 얼굴을 한 레인의 마음을 되돌리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하다못해 은거지가 어디인지만이라도 알려주시죠. 가끔 찾아뵙겠습니다.”
“싫어.”
“……그렇겠죠.”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아마 자신이 찾아가는 것 자체는 반기겠지만, 그에 따라붙을 날파리들을 귀찮게 여기는 것이겠지.
이미 그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커졌다. 그것을 이용하려 드는 무리는 어떤 식으로든 등장할 것이다. 아예 여지를 남겨두지 않을 생각임이 분명했다.
“에휴.”
“…….”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인 사내를, 레인이 잠깐 돌아보았다. 그러나 별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저 기억에 담아두었을 뿐.
* * *
[남은 시간 : 15일]
“그, 그건 저희 가문의 비전입니다!”
“그래서, 내어 놓지 않을 생각인가?”
바짓가랑이라도 물고 늘어질 기세로 울먹이는 중년의 대머리 사내를 향해, 바르바젠이 비웃듯 물었다.
중년 사내는 자신에게 선택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의 시선이 바르바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형 아티펙트를 향했다.
‘크윽.’
저 아티펙트가 작동되면, 자신의 체내에 심어진 정체불명의 골렘이 극도의 고통을 선사해온다는 것을 사내는 잘 알았다. 잘못하면 죽게 될 수도 있다는 것도.
가문의 비전이 중요하긴 하지만, 자신의 목숨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본인의 목숨보다 가문의 비전에 더 높은 가치를 두는 자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자신은 아니었다.
사내는 결국 체념한 얼굴로 바르바젠을 이끌고 집무실과 연결된 비밀 장소로 향했다.
‘나노머신은 이미 제거했지만 말이지.’
그런 사내를 뒤따라가며 바르바젠이 내심 중얼거렸다.
그는 다양한 종류의 마법을 확보하는 것뿐 아니라, 로엘의 부탁대로 나노머신을 회수하는 일에도 힘쓰고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대상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 몰래 잠입하고, 아티펙트로 나노머신을 조종해 꺼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바르바젠조차 아무런 잡음 없이 침입하긴 힘들 정도로 강력한 전력을 저택에 배치해둔 귀족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나노머신을 회수하자니 소음이 일 터였고.
그런 경우엔 그냥 깔끔하게 포기했다. 어차피 사용한 나노머신 중 대부분은 회수할 수 있고, 새롭게 제작한 것들도 꽤 되었으니까.
“이, 이것입니다.”
중년 사내가 비밀 공간 중앙에 엄중히 보관되어 있는 하나의 마도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르바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혹시 필사본으로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제가 가주 직을 맡고 있다고 해도 원본을 드리게 되면 여러모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관없다.”
“가, 감사합니다!”
바르바젠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남은 건 상대가 약속한 대로 함부로 비전을 유출시키지 않기를 기원하는 것뿐이었다.
“…….”
바르바젠은 혹여나 자신의 마음이 바뀔세라 황급히 필사본을 챙기러 가는 귀족 사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원래 시대로 되돌아가기 전까지 저들이 나노머신이 회수되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에 주의를 거듭해야겠다고.
* * *
[남은 시간 : 7일]
“대, 대체 이만한 분량의 아티펙트는 다 어디서 구해오신 겁니까?”
“요즈음 미공략 유적을 좀 털고 다녔거든. 그중에서 내가 쓸 물건 추리고, 나머지를 들고 온 거야.”
“허어.”
르우벤은 전쟁 중 인연을 맺은 한 마법사를 찾아가 아티펙트의 처분을 의뢰했다.
아무래도 유적 공략의 결과로 획득한 아티펙트들이 전부 새로운 것들은 아니었다. 이미 충분한 물량을 확보한 아티펙트도 심심찮게 습득할 수 있었다.
르우벤은 그런 계륵 같은 아티펙트를 따로 추렸다. 원래 가지고 있던 아티펙트도 거기에 상당수 보탰다.
그것들을 가지고 마탑을 순회하며 교섭을 벌였다. 이것들을 헐값에 넘겨줄 테니, 마탑에서 유출 금지 품목으로 지정해 엄중히 관리하는 물건들을 내어달라고.
“제, 제 선에서 결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알아. 그러니까 상급자 모셔 와.”
교섭은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 아티펙트라는 게, 르우벤에게나 넘쳐나는 물건이지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지가 않았다.
차라리 금은보화를 제시했다면 마탑은 르우벤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을 터였다. 그러나 아티펙트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랐다.
하루도 빠짐없이 온갖 실험과 연구가 진행되는 곳이 바로 마탑이었고, 고대의 비전이 담긴 아티펙트는 최상위의 소재였다.
그런 아티펙트를 손해 보며 넘겨주겠단다. 마탑 입장에서는 혹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법사 사내가 허둥지둥 일어나 방을 나섰다. 르우벤이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손해 보는 거래긴 하지만, 그건 이 시대에서나 적용되는 이야기란 말이지.’
르우벤이 마탑에 내어줄 것을 요구한 특수 관리품목에는, 마법사의 마력 한계 용량을 늘려주는 아티펙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져다주면 그 녀석이 좋아하겠지, 하고 중얼거린 르우벤이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 * *
[남은 시간 : 3일]
“카트란 공.”
“무슨 일이십니까?”
그날도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카트란의 눈앞에, 선한 인상을 지닌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은 상당한 수준의 유물임이 분명한 로브와 장신구를 착용했고, 뒤쪽에 호위 기사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이전에 목숨을 구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감사는 이전에도 충분히 받았습니다.”
사내의 정체는 제국의 8황자. 일단 황자이긴 하지만, 황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마법에 재능이 있어 마탑에 투신한 인물이었다.
과거 마족군에 쫓겨 목숨을 위협받던 그를 카트란이 구해준 일이 있었다.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며 황자답지 않은 과한 예의를 차렸던지라, 카트란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야 황자 체면이 말이 아니지요. 이번에 제가 황실의 보고에 들릴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이런 걸 발견했습니다.”
8황자는 그렇게 말하며 한 권의 책자를 카트란에게 건넸다.
“카트란 공께서 전장에서 활약하시는 광경을 몇 번이나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자에 담긴 내용이 카트란 공이 사용하시는 마법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 같더군요.”
“……!”
“애초에 관련 마법을 익히지 않은 자들에게는 무용한 물건입니다만, 카트란 공께는 이야기가 다르겠지요. 이 정도면 충분히 보답이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카트란은 책자의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이것이 큰 기연임을 알 수 있었다. 무려 자신이 익힌 마법의 시조격되는 인물이 남긴 기록이었다!
쿵! 쿵! 쿵!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 * *
[남은 시간 : 1일]
다섯 각성자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외진 장소였다.
“잊은 건 없지?”
“그래.”
“드디어 돌아가는구나!”
로엘이 타임 트래블러를 꺼내 들고, 마력을 주입했다.
[아티펙트를 재기동하기 위한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습니다.]
[아티펙트를 재기동하시겠습니까?]
물론, 로엘의 대답은 ‘Yes’였다.
화아악!
이내 환한 빛이 주위를 덮쳤다. 다섯 각성자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 * *
영웅들이 은거했다.
마족의 3차 대륙 침공에 대비해 한데 모였던 현자들은, 답이 나오지 않는 토론에 지쳐 뿔뿔이 흩어졌다.
사람들은 마족의 위협에 대해 점차 잊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굉장히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마족’의 존재가 동화에나 나올 법한 허무맹랑한 이미지로 굳어졌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