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끝과 시작(7)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저를 너무 부려 먹으시는 것 같습니다만.]
로엘은 파프닐의 투덜거림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임무 수행에 집중했다.
[저기요? 대답 좀 해 주시죠?]
파프닐 덕분에 앞길을 가로막는 마왕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여야 했다. 한 번 오냐오냐해주면 끝없이 생색을 늘어놓는 그의 성격을 지금 상황에서 감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도 없군.”
그는 지금까지 영지 내의 비밀공간이라고 할 법한 장소들을 모조리 순회해 왔다. 중요한 물건이 숨겨져 있을 만한 장소는 전부 뒤지고 다녔다.
근 일주일간 이어져 온 추격대와 마족군의 대치 상황. 양측이 서로의 눈치를 보던 그 기간 동안, 로엘은 자신과 연결점이 있는(나노머신이 주입된) 제도의 귀족들을 이용해 정보를 모아뒀다.
마족군에 점령당하기 이전에 이곳 영지를 통치하던 영주의 혈족. 그들을 찾아내 ‘영지 내 존재하는 비밀스런 공간들에 관한 정보’를 모조리 긁어모으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 공간들 중, 이미 무너져 버린 곳들을 제외한 모든 곳을 둘러보았다. 별다른 소득을 얻지는 못했지만.
“설마 저곳에 있나?”
로엘의 시선이 성의 중심, 영주관으로 향했다.
“…….”
설마 이렇게 뻔하고 눈에 띄는 장소에 ‘그것’을 덜렁 가져다 뒀을까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외로 가능성이 낮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자도 아니고 두 ‘관리자’ 중 하나인 비프론즈가 영주관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정말로 이 안에 떡하니 놓여 있는 것일까? 그동안 들였던 시간과 수고는 그저 스스로의 기준과 상식에 의거한 설레발이었을 뿐이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쓴웃음이 지어졌다. 하긴, 철저한 성격과 그로부터 비롯된 철저한 준비가 늘 좋은 결과만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로엘이 그런 생각을 하며 영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발견하고 덤벼드는 마족들이 있었지만, 그 모두가 헬 하운드의 공격을 받아 잿더미로 화했다.
[로엘. 찾았나?]
이동 도중, 바르바젠으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아직.”
[이쪽은 거의 정리되어가고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게 좋을 거다.]
“그래.”
통신이 끊어졌다.
로엘이 곧바로 신형을 날렸다. 되도록 신중히 움직이려 했는데, 아무래도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을 듯했다.
* * *
“쿠하아악!”
대지를 조종하는 권능의 소유자, 아가레스. 강력하기 짝이 없는 힘을 지닌 이 마왕은, 지금 빈사 상태에 몰려 있었다.
“이, 이 비겁한 놈들!”
그가 왈칵, 하고 피를 토해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딘가의 꽉 막힌 기사 양반도 아니고, 저런 말 내뱉으면서 부끄럽지 않나?”
르우벤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전장에서 다 대 일로 좀 덤볐기로서니 비겁을 운운할 줄이야. 이놈, 마족이 맞긴 한 건가?
촤악!
바르바젠이 권능을 발현해 단숨에 아가레스의 목을 베어냈다. 원통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머리통이 몸통에서 분리되어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이걸로 대충 다 정리됐나.”
“병사들을 풀었으니까 잔당도 금방 정리되겠지. 남은 건 저쪽 정도인가.”
주위를 살피던 카트란의 시선이 레인과 바알의 전투 현장에 고정되었다.
“어쩔까. 가세할까?”
“아니, 방해하지 말라더군. 자기 혼자서 상대하겠다고.”
“그것참, 꽉 막힌 기사 양반 또 한 사람 납셨네.”
세 각성자는 병사들에게 뒷수습을 지시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도주한 마족들을 쫓아 자리를 비웠지만, 일부 병력은 남아 있었다.
한편, 레인과 바알의 싸움은 절정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쾅! 콰광! 콰드득!
초근접거리에서 주먹과 발길질을 쏟아내는 두 무장. 웬만한 병사들의 눈에는 그 공방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커허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이미 두 무장의 머릿속에는 전투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전장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와 같은 것들은 뒷전이었다.
정확히는, 그런 것들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다.
콰아앙!
레인은 강했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얼마 전 경지가 오르면서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강함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바알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다. 단순 출력으로는 레인이 앞섰지만, 이만한 고수들의 싸움쯤 되면 변수는 무궁무진했다.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공격 한 번이면 전세가 통째로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았다. 잠시도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한 번. 단 한 번 큰 공격을 적중시킬 수만 있다면!’
바알이 이를 악물었다.
내장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역량적인 측면에서 자신을 압도하는 상대를 만나게 된 것이 대체 얼마 만이던가.
그가 마족 최강의 무장으로 군림한 세월만 수십 년이었다.
그는 ‘대격변’이 일어난 그날, 72마왕의 일익으로 거듭난 선택받은 존재. 지금의 전투 스타일을 확립하고 난 이후론 1대1 싸움에서 이렇게까지 고전해 본 적이 없었다.
“하압!”
질 수는 없다. 아니, 지고 싶지 않다.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다!
바알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숨긴 채 날카로운 눈으로 기회를 노렸다. 쉴 틈 없이 초수를 교환하면서도, 레인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또 관찰했다.
쉬익!
날아드는 수도(手刀). 간발의 차이로 신형을 젖혀 그것을 피해내는 바알.
그의 머리칼 끝이 잘려 나가 허공에 흩날렸다. 곧바로 이어지는 반격.
터엉!
상체를 뒤로 젖힌 채 손을 내뻗어 그대로 바닥을 짚은 바알이, 다리를 들어 크게 돌려찼다. 레인이 양팔을 교차해 그것을 받아내고, 곧바로 추격했다.
묘기와도 같은 움직임으로 다리를 휘두르고, 그 반동으로 신형을 일으켜 강력한 권격을 내지르는 바알. 모든 공격을 아슬아슬한 간격을 두고 피해낸 레인이 마주 권격을 내질렀다.
콰아앙!
폭음이 울리며 두 사람을 중심으로 대지가 깊게 패여 들어갔다. 거대한 파장이 주위를 집어삼키고, 먼지구름이 확 하고 치솟아 올랐다.
탁. 탁.
두 무장은 그제야 한 차례 떨어져 서로를 마주 보았다.
“…….”
그러나 주위를 둘러볼 틈도 없이 곧바로 서로의 빈틈을 탐색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두 초월자에게 이 정도 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잠깐의 적막이 이어지고, 양측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어 충돌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고차원적인 전투. 전투가 길어짐에 따라 레인도, 바알도 몸에 상처가 늘어갔다.
이쪽 측면에서는 바알이 조금 더 유리했다. 기본적인 회복력이 인간인 레인에 비해 월등했으니까. 그것이 승패를 뒤집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변수가 아니다 보니 의미가 없을 뿐.
‘먼저 체력이 바닥나는 건 이쪽이다.’
외상은 그렇다고 쳐도, 역량 차 때문에 지금까지 축적되어온 피해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의 스테미너 한계가 대체 어느 정도일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역시 한 방이 필요했다. 열세를 만회하고 단숨에 전황을 뒤집을 강력한 한 방이!
그러던 어느 순간. 바알은 그토록 기다려왔던 기회를 포착했다.
‘빈틈!’
아주 실낱같은, 촌각의 시간이 흐르면 없어져 버릴, 바알쯤 되는 실력자가 아니었다면 발견하지도 못했을 미세한 빈틈.
‘아니, 함정인가!’
곧바로 파고들려던 바알은 순간적으로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이 빈틈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4년 전의 싸움. 별동대를 추격하려던 자신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던, ‘암흑정령’의 존재.
그러고 보면 상대는 지금까지 암흑정령을 활용하지 않고 있었다. 필시 승부를 결정지을 최후의 순간에 활용하기 위해 아껴두고 있는 것이리라.
‘내가 이 빈틈을 파고들려고 하면 암흑정령을 이용해 제동을 걸 생각이다. 그 순간에 끝장을 낼 심산이겠지.’
순식간에 계산을 끝마친 바알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빈틈을 파고들었다. 지금이야말로 승부를 걸어야 할 때였다.
상대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했다면 위험한 선택이겠지만, 사전에 간파했으니 오히려 그 의도를 역이용하는 게 가능할 터!
아니나 다를까, 자신이 반응을 보이자 상대의 그림자가 미약하게 일렁였다.
‘여기서 한 차례 더 가속!’
바알은 최적의 공격 타이밍을 일부러 내버리고, 레인이 신형을 물릴 것이라 예측되는 위치를 향해 급가속해 수도를 내질렀다.
과연 의도가 제대로 적중했다.
그림자에서 솟구쳐 오른 검은 줄기들은 바알의 등 뒤쪽 허공을 공허하게 휘저었다. 반면 바알이 내지른 수도는 유령처럼 전방에 모습을 드러낸 레인의 미간을 향해 똑바로 날아들었다.
무리한 방향과 자세의 전환에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바알은 개의치 않았다. 이 일격으로 승부를 결정짓는다!
타이밍은 완벽했다. 이 공격은 피할 수도, 막아낼 수도 없다. 이대로 미간을 꿰뚫고 뇌를 곤죽으로 만들면 그것으로 끝…….
촤악!
갑작스레 등으로부터 전해져오는 화끈한 통증에, 바알이 두 눈을 부릅떴다. 순간적으로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푸콱!
그와 동시에, 레인의 수도가 바알의 명치를 꿰뚫었다.
수도를 타고 흘러들어온 내력이 신체 내부를 휘젓는 것을 느끼며, 바알이 울컥 피를 토해냈다.
‘대체 뭐가.’
바알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저 홀로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한 자루의 검이 그의 시야에 비쳐 들어왔다.
곧바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림자 줄기에서 검을 뽑아내 그것을 원격으로 조종, 자신의 등을 베어낸 모양이었다.
바알이 신형을 허물어뜨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무기는 사용하지 않는다더니.”
레인이 바알의 명치를 꿰뚫고 등 뒤까지 튀어나온 손을 뽑아내며 쿨하게 대꾸했다.
“그걸 왜 믿어?”
바알은 어이가 없어졌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대체 왜 적의 발언 따위를 신용하고 있었단 말인가.
[왜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거냐.]
[널 상대하는 데엔 박투술이 좋을 것 같아서.]
[자신감의 발로인가? 무기 따위 없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아니. 그냥 너 정도 되는 강자와의 싸움에서 끝까지 버텨줄 무기가 없을 것 같거든.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두겠지만, 딱히 무기를 들지 않았다고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거짓말이었던지라 조금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 별다른 의미도 없어 보이는 대화가 싸움의 승패를 가르는 복선으로 작용하다니, 농담이 심하지 않은가.
“쿨럭.”
바알이 바닥에 엎어진 채 피가래 섞인 기침을 뱉어냈다.
레인은 그런 바알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툭 하고 내뱉었다.
“내가 묻는 질문 한 가지에 대답해 주면, 편하게 갈 수 있게 해주지.”
“……?”
바알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레인은 후, 하고 숨을 한 차례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그가 뱉어낼 질문에는, 모든 일의 핵심이 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어째서 각성자들은 굳이 추격대를 이끌기를 자처했으며, 마왕 비프론즈가 이끄는 마족군을 쫓아가 포위했을까? 그래서 그들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마왕 바알은 또 무슨 이유로 마계로 복귀하지 않고 비프론즈의 군대를 구원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을까?
왜 각성자들은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자신들끼리 빠르게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 했을까?
마지막으로, 각성자들이 원래 시대로 되돌아가기 위해 달성해야 할 ‘세 번째 조건’은 대체 무엇일까?
그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이, 지금부터 레인이 뱉어낼 질문에 들어 있었다.
레인이 물었다. 어느새 손에 장검을 그려 쥔 채, 덤덤한 목소리로.
“마신의 심장 조각은 어디에 있지?”
* * *
영주관 내 집무실. 그 한편에 놓인 대형 금고.
그 금고를 열어젖히고 내용물을 확인한 로엘이, 빙긋하고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중얼거렸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