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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화. 끝과 시작(6) (244/249)
  •  245화. 끝과 시작(6)

     두두두두두두!

     쏟아져 들어오는 인류의 기병대.

     한순간에 성벽이 무용지물이 됐다. 마족들이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토해냈다.

    “이, 이 미친!”

    “쿠악! 다 틀렸어! 이제 우린 끝장이야!”

    “대체 그 괴물 같은 인간 놈은 뭐야!”

     성벽 내부로 침투한 기병대가 살육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 각성자들이 있었다.

     바르바젠이 권능을 뿌렸다. 르우벤이 마검을 휘둘렀다. 카트란이 수십에 달하는 검강을 뿌렸다.

     각성자 전원이 지난 시간 동안 큰 폭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수련과 실전을 반복하며 본신의 실력을 높였고, 각각의 능력에 걸맞은 아티펙트를 획득했으며, 무엇보다 마족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합을 맞추는 데 능숙해졌다.

     그들은 앞길을 가로막는 마족들을 무자비하게 쓸어내며 전진했다. 미처 지금의 상황을 대비하지 못한 마족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텅! 텅! 텅!

     그리고, 레인이 사전에 감지해뒀던 기척을 따라 마왕 바알에게로 쇄도해 들어갔다. 연속으로 진각을 밟아 신형을 포탄처럼 쏘아내며.

    “워어어어어어어!”

     바알이 거대한 함성을 내지르며 마주 돌진해 왔다.

     그의 함성에 대기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초인조차 버거워할 만한 막대한 기파가 주위를 휩쓸었다.

    ‘이 상황은 위험하다!’

     바알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이대로라면 제대로 대응해보기도 전에 아군 진영이 유린당해버리고 만다. 최대한 빠르게 전투에 가세해야 한다!

    “…….”

     레인은 바알이 날려 오는 주먹을 살짝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 피해냈다. 권풍만으로도 살가죽이 찢어질 듯한 압박이 전해져 왔지만, 절묘하게 내력을 방출해 그것을 흘려냈다.

     쉬익!

     레인이 신형을 뒤틀며 팔꿈치를 휘둘렀다. 그것을, 바알이 레인이 그랬던 것처럼 절묘하게 회피하고 반격했다.

     콰앙! 쾅! 콰과쾅!

     순식간에 십여 초수의 공방이 오갔다.

     콰아아앙!

     한차례 크게 충돌한 양측이 동시에 거리를 벌렸다. 그리곤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군.”

     바알이 입가에 흐르는 핏줄기를 닦아내며 말했다.

     과거 두 사람이 맞붙었던 때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 연출되었다. 압도하고 있는 쪽은, 레인이었다.

    “왜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거냐.”

    “널 상대하는 데엔 박투술이 좋을 것 같아서.”

    “자신감의 발로인가? 무기 따위 없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아니. 그냥 너 정도 되는 강자와의 싸움에서 끝까지 버텨줄 무기가 없을 것 같거든.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두겠지만, 딱히 무기를 들지 않았다고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레인은 후, 하고 숨을 고르며 우득우득 손을 풀었다.

    “…….”

     바알이 굳은 표정으로 레인을 노려보다가, 득달같이 쇄도해 들어왔다.

    “여유가 없어 보이는군. 조급한가?”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레인의 지적을 바알이 광포하게 받아쳤다.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 상황에서 부정해 봐야 의미가 없을뿐더러, 애초에 그는 조급함에 휩쓸려 냉정을 잃을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다.

     콰앙!

     마족 최강의 무장과 인류의 전쟁 영웅이 거칠게 맞붙었다. 서로를 향해 내지른 주먹이 충돌해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바, 바알 님과 호각으로.”

    “물러나라! 말려드는 것만으로도 죽을 수 있다!”

     전투의 여파가 워낙 압도적인지라, 그 누구도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투의 여파 정도는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실력자들이라도 끼어들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두 무장이 워낙 고차원적인 공방을 주고받고 있는 탓에 어설픈 지원은 오히려 방해로 작용할 공산이 컸다.

     쾅! 콰득! 콰과광!

     연속해서 울리는 폭음.

     차원이 다르다는 표현이 이렇게나 어울리는 싸움이 있을까. 그저 개인과 개인이 치르는 전투임에도 주위 모든 지형지물이 파괴되어나가는 비현실적인 광경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한가로이 감상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이내 모두가 각자의 싸움에 휘말려 들었으니까.

    “크르릉! 막아라! 놈들을 막아!”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쓸어버려라!”

     급히 병력을 수습하는 군단장들. 바알 휘하 군단장들이 선두로 나서 추격대의 발목을 붙들고, 이어서 기타 마왕과 군단장들이 가세했다.

     수없이 많은 충돌이 벌어지고, 수없이 많은 목숨이 스러졌다. 물론, 전황은 인류군 측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크악!”

    “물러나지 마라! 전열을 유지하란 말이다!”

     애초에 기병과 보병의 싸움이다. 성벽이 무용지물이 된 시점에서 마족군에게 승산은 없었다.

     그나마 바알이라는 스페셜리스트가 가세하면 상황이 조금 나아질지도 모르지만, 그 바알은 레인에게 붙들려 있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목이 날아갈 접전을 치르고 있었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르우벤이 내지른 용의 포효(Dragon roar)가 전장을 휩쓸었다. 마검과 연동되어 본래의 위력보다 훨씬 강화된 그 음파는, 앞을 가로막는 마족들의 사기를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이건 도저히 안 돼!”

    “크르륵! 이젠 다 틀렸어! 달아나야 해!”

    “달아나지 마라! 달아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급속도로 붕괴되는 전열. 진형을 유지하길 포기하고 달아나는 마족들.

     지휘관들이 본보기 겸 불온 분자들을 척살해가며 병력을 독려했지만, 금세 한계에 봉착했다.

     안 그래도 레인의 무력시위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마족들이었다.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바알은 발이 묶였고, 적의 군세는 이쪽을 크게 상회했다. 떨어진 사기를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그에, 카트란이 결정타를 꽂아 넣었다.

    “쿠악! 네, 네가 왜!”

    “이, 이놈! 감히 내게 칼을 들이대는 것이냐!”

     마족 병사 일부가 갑작스레 칼끝을 돌린 것이다.

     카트란의 존재와 그가 가진 특수한 능력에 대해선 이미 마족군 사이에 잘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에 마력의 파장을 뒤틀어 그 능력에 저항할 특수부대가 따로 편성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특수부대가 레인의 일격에 휩쓸려 성벽과 함께 증발해버렸다는 것이었다. 카트란을 경계해 성벽 위에 포진시켜둔 그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소멸당해버릴 것이라 누가 예상했을까.

     즉, 지금 기병대를 막아서고 있는 마족군 중 카트란이 작정하고 발현한 마법을 어찌할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배신이 아니다! 적측 지휘관의 마법에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 잠깐! 내 의지로 그런 게 아니야! 컥!”

     알면서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상황이 여기까지 내몰리자 더 이상 상위 마족들의 압박도 소용이 없었다. 마족 병사들이 대규모로 전선을 이탈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진형의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안 돼! 돌아와! 돌아와서 자리를 지키란 말이다!”

    “제기라아아아알!”

     끝내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만 군세. 인류군은 기세를 늦추기 않고 그 뒤를 쫓아 마족 병사들의 목숨을 취했다.

     마치 잘 익은 곡식을 추수하듯, 적병의 목을 우수수 베어내는 바르바젠의 권능. ‘천참만륙(千斬萬戮)’.

     몇몇 마족이 폭사하며 쏟아져 나온 피의 폭풍이 주위를 휩쓸고, 검은 불꽃이 장벽처럼 솟아올라 도망자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우리의 대지를 침범하고 유린한 저들에게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마라!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쓸어버려라!”

     우아아아아아아아아!

     세 각성자를 따라 움직이며 거대한 함성을 내지르는 기병대. 요새 공략이 수월하게 이뤄져 갔다.

     그리고 그 시각.

     본대와 따로 떨어져 움직이며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던 로엘은,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마왕 비프론즈와 마주쳐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 * *

    [컹! 커르르릉!]

    [퀴이이이익!]

     헬 하운드와 마충이 지축을 울리며 비프론즈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그에 맞서 비프론즈가 권능을 발현했다.

     그는 점성술의 대가였다. 그렇다 보니 그 본인의 무력 수위에 대해서는 인간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가 특수한 권능을 가졌을 뿐 그리 강하지는 않을 것이라 여기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점성술’, 그리고 그 본인에게 부여된 특수한 ‘임무’ 때문에 직접 전선에 나서 싸우는 일이 웬만해선 없을 뿐. 그는 특정한 조건만 갖춰지면 72마왕 사이에서도 수위권에 들 정도로 강력한 힘을 구사할 수 있었다.

    상위 마족들은 저마다 혈통에서 비롯된 권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권능이라는 게 하나의 마족에게 하나만 부여되는 것은 아니었다.

     극히 드물긴 하지만, 다수의 권능을 다루는 마족도 분명히 존재했다. 비프론즈가 바로 그런 마족이었다.

     그는 점성술과 관련된 권능 외에 한 가지 권능을 더 가졌다. 그리고 그 권능은, 어떤 의미에선 로엘의 흑마법과 굉장히 유사한 종류의 것이었다.

     바로, ‘강령술(降靈術)’.

     그의 몸에서 뭉클뭉클 솟아난 검은 안개가 주위를 뒤덮었다. 바닥 이곳저곳이 쩍쩍 갈라지더니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팔들이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이내, 그의 전방에 이십여 구의 언데드가 자리 잡고 섰다. 하나하나의 크기가 3미터에서 5미터에 달했다.

     놈들은 마치 오우거나 트롤이 연상되는 우락부락한 몸통에 공룡의 그것과 같은 머리통을 지니고 있었다. 섬뜩한 핏빛 안광을 뿌리는 게 퍽 인상적이었다.

     비프론즈가 눈을 번뜩이며 손을 꽉 쥐자, 그의 주변을 떠다니던 검은 안개가 언데드들의 동체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덜컥, 하고 언데드들이 일제히 신형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위 언데드?”

     로엘이 미간을 좁히며 그 광경을 지켜보는 가운데, 비프론즈가 불러낸 언데드 하나가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쩌저저저저적.

     그 손 위쪽으로, 막대한 질량을 자랑하는 얼음덩이가 생성되었다. 어딜 어떻게 봐도 권능의 발현이었다.

    “?!”

     일개 언데드가 고위 마족이나 발현하는 게 가능할 법한 권능을 발휘한다니! 로엘의 상식선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알지 못했지만, 비프론즈가 소환한 언데드들에는 근방에서 목숨을 잃은 고위 마족과 군단장들의 혼이 담겨 있었다. 비프론즈의 고유한 능력이 바로 이것이었다.

    ‘벌써 이렇게.’

     비프론즈의 안색이 일순 어두워졌다.

     생각보다도 훨씬 많은 언데드가 생성되었다. 성벽 쪽의 전투 현황이 그만큼 힘겹게 돌아가고 있다는 반증일 터.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는 데만큼은 그 전황이 도움이 될 터였다.

     그의 권능은 ‘영혼’이라는 불가침의 영역에 간섭하는 종류의 것인 만큼 짧은 시간밖에 유지되지 않는다. 대신 상황만 받쳐주면 압도적인 파괴력을 발휘하는 게 가능했다.

     전장에서 아군이 죽어 나갈수록 그가 이 자리에서 행사할 수 있는 힘은 더욱 강해질 터였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조금 위험해 보이는데.’

     로엘은 자세한 내막까진 알지 못했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출격시킨 언데드들이 갈려나가고 있었다. 강력하기 짝이 없는 권능의 집중포화에 휘말려서.

     물론 소모된 언데드 정도야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었다. 아공간에 축적해둔 재료는 차고 넘쳤으니까.

     그러나 지난 시간 동안 전쟁터를 전전하며 길러온 감각이 고해오고 있었다. 이 상황은 위험하다고.

     로엘은 그 감각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어쩐지 느낌이 안 좋단 말이지.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곤란하기도 하고.’

     분명 그는 시간을 끌수록 적측 전력이 강성해지게 된다는 사실까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이 계산에 얽히면서, 그는 본의 아니게 현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이쯤에서 비장의 수를 활용해야겠군. 이목이 좀 집중되겠지만…….’

     어차피 전투가 장기화돼도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빠르게 전투를 마무리 짓고 움직이는 게 나을 듯했다.

     그가 통신 아티펙트를 조작하더니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잠시 후.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어디선가 날아온 다섯 줄기의 빛의 기둥이, 비프론즈와 그를 호위하던 언데드의 무리를 통째로 집어삼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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