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4화. 끝과 시작(5) (243/249)

 244화. 끝과 시작(5)

“바알 님!”

“크륵! 바알 님이시다!”

“우아아아아아아!”

 마왕 바알.

 그가 길을 지나가자, 주위 마족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환성을 내질렀다.

“감사합니다, 바알 님! 저희는 당신 덕분에 살아남았습니다!”

 도저히 전멸을 피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그 상황에 마치 구세주처럼 등장해 마족군을 구원한 영웅. 그가 바로 바알이었다.

 그라면 굳이 이런 위험지역까지 올 것 없이 그냥 마계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안위를 챙기기보다 후방의 아군을 지원하러 나섰다. 인기가 높을 수밖에.

 바알은 주위 마족들에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내, 그가 영주성 안으로 들어서 모습을 감췄다.

 현재 마족군은 인류 문명의 잔재인 성벽을 의지해 추격대를 상대하고 있었다. 반대로 그 자신들도 성벽 내부에 갇혀버리고 말았지만.

 성내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있는 것이라 해봐야 성벽과 영주성 정도뿐.

 과거 그들 마족군이 이곳 영지를 점령했을 때 거주구를 비롯한 문명의 잔재를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업자득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성벽도 이래저래 무너진 곳이 많아 수시로 별동대의 습격을 받는 실정이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터라 포기할 수도 없었지만.

“오셨습니까.”

 바알이 영주성 집무실 내로 들어서자, 한 마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책상 위에 너저분하게 흩어진 보고서들로 미루어보아 아군 전력 현황을 검토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바알은 응접용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수고가 많군. 비프론즈.”

“수고랄 것도 없습니다.”

 마왕, 비프론즈가 쓴웃음을 흘리며 바알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바알이 거침없이 자신을 하대함에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두 마왕은 애초부터 주종 관계였다.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후우.”

 비프론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 혹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 탓에 상황이 여기까지 내몰리고 말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바알 님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군요.”

“그렇군. 안타깝게도 저들이 생각하는 숭고한 의지 같은 건 내게 없는데 말이지.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그저…….”

 바알의 시선이 집무실 한쪽 벽면에 놓인 대형 금고를 향했다. 그 시선을 알아챈 비프론즈가 재차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 제가 모자란 탓입니다.”

“아니. 불가항력이었을 뿐이지.”

 바알이 금고에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

 비프론즈는 최선을 다 했다. 이 경우는 그를 뒤쫓아 온 인류의 영웅들이 대단한 것이었다.

 비프론즈의 권능은 점성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가 작정하고 군대를 운영해 달아나고자 하면, 그것을 뒤쫓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그에게 ‘임무’가 맡겨져 있었던 것이고.

“그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찾았나?”

“안타깝게도 찾지 못했습니다.”

 비프론즈는 면목 없다는 듯 재차 고개를 숙였다.

 매일 밤마다 천체를 관측하며 권능을 발현, 미래를 점쳐보고 있는 그였다. 그러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마치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불투명한 미래만이 점쳐졌다.

 그 원인에 대해선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추격대를 이끌고 있는 다섯 지휘관 때문이었다.

 무슨 인과의 법칙을 벗어난 존재들이라도 되는 것인지, 그들에 관련한 일에서만큼은 비프론즈의 권능이 무용지물이었다. 정말로 그럴 리야 있겠냐마는.

“곤란하군.”

 바알이 그렇게 말하며 상체를 소파에 깊숙이 묻었다.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반드시 이곳의 병력을 이끌고 마계로 무사히 귀환해야 했다. 그런데 그게 정말로 쉽지가 않았다.

 비프론즈와 마찬가지로 점성술에 관련한 권능을 가진 또 다른 마왕 ‘푸르카스’는, 다행히 후방에서 보급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와 그의 세력은 마계로의 후퇴 명령이 떨어지자 가장 먼저 엘레노어 대륙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무사히 ‘임무’를 완수해냈다.

 그러나 비교적 전방에서 활약하던 비프론즈의 군세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다른 마왕도 아닌 비프론즈이니 알아서 잘 퇴각할 것이라 여겼거늘. 이게 웬걸?

 갑자기 등장한 천적들로 인해 비프론즈는 그 자신의 장기를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했다. 금세 추격대에 따라잡혀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급히 구원을 온 바알 덕분에 그래도 한시름 덜었지만, 여전히 상황이 좋지 못했다.

“시간을 길게 끌어선 안 돼. 이쪽은 물자가 부족하다. 그리고 저들에게 언제 지원군이 충원될지도 알 수 없고.”

“그렇습니다. 이젠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군. 저들도 우리가 성벽에서 뛰쳐나오는 순간을 노리고 있을 텐데.”

“차라리 저쪽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해온다면 그나마 방법이 날 텐데요.”

“저들도 그걸 아니까 포위망을 유지한 채 산발적인 기습만 가해오는 것이겠지.”

 비프론즈의 중얼거림에 바알이 피식, 하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추격대가 먼저 공세를 취하고 마족군이 그것을 한 차례 막아내는 그림이 나올 수만 있다면, 무사히 마계로 복귀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포위망에 공백이 생겨나기만 되었다. 그렇게만 되면 마족 최강의 무장인 바알을 앞세워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 있었다.

 애초에 막아내는 그림을 연출하는 것 자체가 힘들진 않겠느냐고?

 맞는 말이긴 하지만, 힘듦의 정도가 다르다. 적어도 성벽 바깥에서 좁혀드는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보단 훨씬 가망 있을 터.

 당연한 말이지만 추격대 측도 이 사실을 안다. 게다가 그들은 이쪽과 달리 조급해할 이유도 없었다. 분명 이쪽이 버티지 못하고 성벽 밖으로 뛰쳐나오는 타이밍을 노리고 있을 터.

 쾅!

“바알 님! 습격입니다!”

 상념에 잠겨 있던 바알의 귓가에, 갑작스레 문을 열고 등장한 부관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습격?”

“예! 평소의 산발적인 기습과는 다릅니다! 놈들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바알의 눈에 놀란 감정이 담겼다. 그가 비프론즈와 한 차례 시선을 교환했다.

 바라마지않던 기회가, 왔다.

“놈들의 지휘관들이 공적을 세울 욕심에 일을 서두른 모양입니다.”

 비프론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바알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저들의 전력은 이쪽을 상회한다. 그러니 지휘관들이 지원군과 공적을 나누기 싫다는 생각에 일을 서둘렀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더욱이 지금은 대부분의 마족이 마계로 되돌아가 버린 시점이다. 인류군 지휘관이 ‘공적’을 세울 수단이 몇 남지 않은 상황이라는 뜻. 지휘관이 조급한 판단을 내릴 이유가 차고 넘쳤다.

 바알이 사납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야 그 조급함을 이쪽에서 마음껏 이용해주마!

“먼저 가겠다.”

“조심하십시오.”

 콰장창!

 텅! 텅! 텅! 텅!

 바알이 단숨에 창문을 부수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곧바로 막대한 오라를 발끝으로 집중, 허공을 박차며 성벽 쪽으로 내달렸다.

 그가 저 멀리 성벽 바깥으로 보이는 적들의 군세를 바라보며, 진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 * *

 물론 바알과 비프론즈가 세운 가정은 잘못되었다.

 추격대를 이끄는 지휘관들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공적을 세울 욕심에 조급해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두 마왕의 예측이 완전히 틀린 것은 또 아니었다. 의외로 핵심에 근접하기도 했다.

“가자. 지원군이 오기 전에 우리 선에서 끝낸다.”

 로엘의 말에 나머지 각성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지원군이 오기 전에 가진 병력만으로 승부를 보고자 했다.

 공적 따윈 아무래도 좋지만, 이 일에 동원되는 지휘관이 많아지는 것은 곤란했다. 조용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레인이었다.

 스르륵.

 그가 그림자로부터 공간검을 꺼내 들었다. 평소와는 달라진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중력 조작 아티펙트’를 병행해서 활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순수한 본인의 내력 조작 능력만으로 공간검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었다.

“후.”

 검 표면에 검강이 덧씌워졌다.

 이전이었다면 이것을 그냥 휘두르거나 의념을 실어 강화시킨 뒤 사출하는 정도로 그쳤을 터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달랐다.

 쿠구구구구궁.

 검을 타고 흐르는 기운과 대기 중의 마나가 공명했다. 거대한 기파가 휘몰아치고, 대지가 흔들리는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쿠콰콰콰콰콰콰콰콰!

 대기 중의 마나가 검 표면에 빨려 들어가듯 몰려들었다. 마치 그 마나와 융합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검강의 크기가 점점 불어났다.

“……저게 무슨.”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르우벤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거대한 공간검이, 덧씌워진 검강에 의해 그 크기가 두 배가량 증폭되었다. 공간검의 실제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생각한다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인 본인의 내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의 내력이 막대하다고 해도 이런 무지막지한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그는 대기 중에 분포된 정제되지 않은 기운에 의형강기를 공명시켰다. 그 막대한 자연지기에 의지를 심어 검 표면으로 끌어모았다.

 그렇게 끌어모은 기운을 초월적인 제어 능력을 발휘해 본인의 내력과 융화시키고, 안정화시켰다.

 주위 자연의 기운을 결집, 본인의 내력과 융화시켜 활용한다.

 통상적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통 그런 짓을 시도했다간 99.9퍼센트 확률로 폭사해서 죽고 만다. 오로지 레인이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콰우우우우우우.

 이번엔 다시 검강의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압축되어갔다. 마치 무형검(無形劍)이 생성되는 것처럼.

 소음이 잦아들어 갔지만, 주위에 휘몰아치는 기운은 한층 더 거세어졌다. 레인의 옷가지와 머리칼이 광폭한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렸다.

 막 성벽 위에 다다라 그 장엄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 바알은,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위기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짜릿하게 자극했다.

 후우우웅.

 소음이 잦아들었다. 주위를 휘몰아치던 바람도 사그라들었다. 그 압도적인 기운의 폭풍이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

 높게 치켜들어진 공간검의 표면에는, 새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기운의 응집체가 고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

 정적이 흘렀다. 양측의 병사들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레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리고, 레인이 공간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이 미친!”

 바알이 황급히 신형을 날렸다.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는 게 늦어지면, 그대로 죽는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검에서 쏟아져 나온 기운이, 성벽의 한 축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폭음이 울리고, 먼지구름이 치솟아 올랐다.

“허.”

“이건 정말이지.”

 서서히 먼지구름이 가라앉고, 양측 병사들의 시야에 파괴의 현장이 비쳐 들어왔다.

 성벽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성벽의 한 축이 통째로 소멸해 버렸다. 그 위에 자리 잡고 있던 마족들이 함께 자취를 감췄음은 물론이다.

 시골 영지에서 볼 법한 일반적인 석제 성벽 따위가 아니었다. 항마의 마법진이 새겨진 벽돌을 중첩하고 중첩해서 만들어낸, 강력한 항마 장벽이었다. 그 장벽을 일격에 무너뜨려 버린 것이다.

 지금껏 대륙 역사상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는 게 가능했던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존재가 몇이고 존재했다면 항마 장벽은 전략거점으로 취급받지도 못했겠지.

“…….”

 그 기적과도 같은 힘을 행사한 주인공, 레인은, 평온한 신색을 유지한 채 유유히 무기를 바꿔 들었다. 공간검 대신 잘 벼려진 장검 한 자루가 그의 손에 쥐여졌다.

 마족들도, 추격대도, 심지어 다른 각성자들마저도 두려움과 경외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레인은 가만히 팔을 들어 올려, 성벽이 통째로 소멸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간을 검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진군.”

 별다른 연설도, 사기 진작을 위한 독려도 없었다. 그저 짧은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

 그럼에도 병사들은 확 하고 가슴에 불길이 이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전장을 뒤덮었다.

 막아서는 이가 존재치 않는 공백지대를 향해, 기병대가 질풍처럼 내달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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