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끝과 시작(4)
로엘과 르우벤이 한참 유적에서의 일을 처리하고 있던 그 시각.
인류군의 일부가 마왕 ‘바알’과 일부 마족군이 고립된 영지를 포위하고 있었다.
포위망을 구성하는 병력을 이끄는 이들은 각성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진해서 특정 마왕과 그 휘하 병력을 추격하겠다고 나섰고, 추격대의 통솔권을 얻어냈다.
포위망은 순조롭게 구성되었다. 이전에 각성자들의 지휘를 받은 적 있는 특수기병대들이 추격대에 자진해서 지원해온 덕분이었다. 그들은 바람같이 내달려 도주 중인 마족군을 따라잡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났다. 갑작스레 마왕 바알과 그 휘하 군단장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추격대에 습격을 가해온 것이다.
마왕 바알은 여타의 마왕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게다가 그 휘하 군단장들조차 다른 군단장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순조롭게 마왕군을 몰아치던 추격대가 그로 인해 크게 흔들렸다. 진작 마계로 달아났을 거라 여겼던 마족 최강의 무장이 난데없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결국 각성자들의 분투로 어떻게든 승리하고 마족군을 펠라키 산맥 인근 영지로 몰아넣긴 했다. 본래 계획대로 놈들을 전멸시키는 것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전황이 고착화되었다. 추격대도, 마왕군도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실정.
추격대는 이대로 단숨에 놈들을 끝장내버리고 싶어 했고, 마족군은 틈을 찾아 포위망을 뚫고 마계로 귀환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렇게 눈치싸움이 한창인 와중, 르우벤과 로엘이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물론 그 사실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거기다 레인마저 갑자기 칩거 선언을 했다.
“무슨 소리야. 칩거라니.”
“시간이 조금 필요해. 며칠 안 걸릴 거다. 내 개인 막사에 다른 사람들 못 오게 통제 좀 해 줬으면 한다.”
“네가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우둔하지 않다는 것은 안다. 그 일이 일시적인 전력의 공백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모양이지?”
“어.”
일말의 주저도 없는 레인의 답변에 바르바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트란이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럼 나와 바르바젠이 그동안 별동대를 이끌고 놈들을 압박하고 있을게. 놈들이 전력 공백을 눈치챌 틈 없도록.”
“고맙다.”
꽤나 무리한 부탁임에도 흔쾌히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는 두 사람에게 레인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참으로 든든한 동료들이었다.
그리고, 이틀이 흘렀다.
그동안 카트란과 바르바젠은 틈만 나면 기병 일부를 이끌고 마족군을 습격하러 다녔다. 마족군 측에서 아군 진영을 염탐하려 들면 철저하게 차단했고, 신출귀몰한 움직임으로 놈들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즈음에 로엘과 르우벤이 전선에 복귀했다. 바르바젠과 카트란은 그제야 별동대의 운영을 멈추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갔던 일은 잘 처리한 모양이군.”
“어. 애써준 덕분에. 레인은?”
“개인 막사에 틀어박혔다. 중요한 일이 있다면서.”
바르바젠의 설명에 로엘이 미간을 좁혔다. 자신과 르우벤이 전선을 잠시 이탈한 것을 뻔히 아는 그 녀석이, 칩거를 선언했다?
로엘이 의문을 떠올린 그때, 갑자기 거대한 파장이 네 각성자를 덮쳤다.
후웅!
“……!”
“이건!”
그 파장은 딱히 위협적인 기운을 내포하고 있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위기감을 선사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네 각성자의 얼굴에 놀라워하는 감정이 떠오르게 만들기엔 충분한 정보를 내포하고 있었다.
“저 녀석, 설마.”
르우벤이 레인이 칩거하고 있는 막사 쪽을 돌아보며 침음을 흘렸다. 괴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가다니.
이미 레인은 대륙 최강 클래스의 강자였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간다니, 대체 얼마나 더 강해질 심산이란 말인가!
후웅!
후우웅!
파장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 뒤로 몇 시간 간격으로 계속해서 막사 주위를 몰아쳤다.
파장에 담긴 웅혼한 기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어졌고, 파장이 주위를 잠식해 들어가는 범위도 시간이 지날수록 넓어져 갔다.
그리고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파장이 더 이상 몰아치지 않게 되었다.
“끝난 건가?”
“모르지.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인지도.”
아예 레인의 개인 막사 바로 앞에 막사를 치고 옹기종기 모인 각성자들이 한 마디씩 주고받았다. 각각 기대감과 흥분, 호기심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침상에 다리를 쭉 뻗고 기대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기울이던 로엘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녀석이라면 오래잖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겠지.”
* * *
체내를 순환하던 기운을 단전으로 갈무리한 뒤, 레인은 명상에 잠겼다.
그의 의식이 내부 깊숙한 곳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어느 순간, 그는 주위 사방이 온통 흰 공간에서 눈을 떴다.
“심상 공간인가.”
레인은 곧바로 이 공간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전생에 한 번 겪어봤던 장소였다.
명암도, 색채도 존재하지 않는 단조로운 세계. 하다못해 그림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레인 본인의 의식만이 존재하는 세계였다.
바로 이곳에서, 전생의 레인은 벽을 넘어섰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감회가 새로웠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전생엔 이 벽을 넘는 데 다섯 번의 실패를 겪었다. 이번엔 그런 과정 없이 단숨에 넘어서 보이리라.
뚜벅. 뚜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레인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존재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존재는 흐릿하게 일렁이는 형상을 띠고 있었는데,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그 모습이 또렷해져 갔다.
“그런가.”
레인이 후, 하고 숨을 불어냈다.
“이번에 내가 넘어서야 할 벽은, 너였군.”
“…….”
어느새 레인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사내가 빙긋, 하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눈이 부시도록 잘생긴 사내였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마치 야만 민족의 그것과도 같은 피부색. 몸에 걸친 중원식 무복과 허리춤에 걸린 명검.
레인이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전생의 내가 그렇게 웃었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말이지.”
전생의 자신. 이름은 백리극.
이번에 레인이 넘어서야 할 벽의 정체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기억을 각성한 이후로, 레인이 목표로 삼은 기준점은 항상 백리극이었다.
그는 전생의 자신과 현생의 자신을 수없이 비교해왔다. 그 열등감 때문에 수시로 괴로워했고, 스스로를 채찍질했으며, 자만하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해왔다.
전생에 그가 마주한 벽은 그와 적대 관계에 놓인 어느 대문파였다. 그 당시에는 혼자 힘으로 거대 문파를 무너뜨릴 만한 힘을 갖는 것이 목표였다.
그 당시의 그는 심상 공간에서 무수히 많은 고수들의 협공을 받았다. 그 협공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섯 번의 실패를 겪었고.
이번에 마주하게 된 벽은 그때와 비교해 규모가 상당히 초라했다. 겨우 한 명의 사내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난이도는 전생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닐 터였다.
“빡세네. 하긴 이 공간은 전에도 그랬지.”
레인은 실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손을 한 차례 떨어냈다.
그래. 그랬다.
지금 자신이 백리극을 마주하면서 느끼는 이 감정. 이 감정을 전생에도 느꼈었다. 일개 개인인 자신에게 거대 문파를 홀로 쳐부숴야 한다는 난제가 주어졌던 그때도.
어느새 그의 손에 검 한 자루가 쥐여 있었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법칙인 것처럼, 굉장히 자연스럽게 생성되었다.
익숙한 물건이었다. 르우벤에게서 선물 받아 지금까지도 애용하고 있는, 검 자체의 성능에 충실한 아티펙트.
“…….”
마주 선 백리극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전생에 십대고수라 불리던 어느 늙은이를 죽이고 손에 넣었던 절세보검이었다.
두 사람은 검을 늘어뜨린 채 한동안 서로를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움직여 검을 휘둘렀다.
레인은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떨어져 내리는 검격을. 백리극은 아래서 위로 비스듬히 올려치는 검격을.
두 사람의 검격이 맞부딪쳐, 폭음을 자아냈다.
콰아아아아앙!
* * *
“쿨럭. 컥.”
레인이 죽은 피를 한 사발이나 뱉어냈다.
심상 공간 속의 전투임에도 감각이 생생했다. 이것이 진짜 부상이 아닌, 어떤 의미에선 착각에 불과한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레인은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검에 기대어 서서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레인의 눈에, 저편에서 잔잔한 시선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백리극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모습도 그리 성치는 않았다. 격전 끝에 무복은 걸레가 되었고, 입가에 선혈이 흘렀으며, 왼팔이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내 쪽이 손해로군.”
겉으로 보이는 피해는 백리극 쪽이 컸지만, 레인은 심대한 내상을 입었다. 종합적인 전투력의 하락이란 측면으로 놓고 보면 레인 쪽이 손해였다.
“…….”
백리극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전생에 심상 공간에서 만났던 대문파 소속 무인들은 굉장히 시끄러운 놈들이었건만, 이놈은 무슨 벙어리라도 되는 것인지.
쾅!
레인이 힘주어 진각을 밟았다.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고통이 다리를 타고 올라오자, 정신이 조금은 또렷해졌다.
‘이번에 끝낸다. 반드시.’
여차하면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는 절대 벽을 넘어설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
레인이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 벽을 넘어서지 못하면 앞으로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시 이 공간으로 들어올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백리극이라는 벽은 분명 높고 단단했다. 그렇지만, 그는 레인의 기억 속 그대로의 인물일 뿐이었다.
기억 속 마지막 모습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그대로의 실력이었다. 정말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확실히 역량적인 측면으로 보면 백리극 쪽이 우월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레인은 백리극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리고 백리극이 경험하지 못한 시간을, 세월을 보내며 그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다.
그건 단순히 강함이나 역량과 같은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바로 거기에 승기가 있었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싸움으로부터 그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훅.
백리극이 서 있던 자리에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 바로 다음 순간, 그는 레인의 코앞에 다가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 표면에 의형강기가 휘감겨 기형적인 병기의 모습으로 화했다.
레인은 물러나지 않고 이화접목의 묘리를 살려 그 공격을 흘려냈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검을 들지 않은 손에 힘을 주었다.
콰드드드드!
내력이 듬뿍 실린 두 사람의 주먹이 맞부딪쳐 불쾌한 소음을 자아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연격, 연격, 연격.
두 사람은 서로를 똑바로 응시한 채 계속해서 초수를 교환했다.
피가 튀고, 살점이 튀고, 심지어 사지가 날아다니는 살벌한 접전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눈에는 일말의 동요도 엿보이지 않았다.
레인은 싸움에 몰입했다. 자신을 잊고, 상대를 잊었다. 주위 상황을 잊고 목적, 목표와 같은 거창한 것들도 잊어버렸다. 오직 전생의 자신과 주고받는 공방에만 집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촤악!
레인이 정신을 차렸을 땐, 백리극의 몸이 사선으로 갈라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크으.”
정신이 듦과 동시에 막대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는 한쪽 눈과 오른팔, 왼손 검지와 약지, 그리고 오른 다리 발목 아래쪽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지금까지 부족한 신체 부위를 의형강기로 보충해가며 싸워왔다.
그의 신형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시야가 흐려졌다.
쓰러진 자세 그대로, 그가 슬쩍 웃었다.
어찌 되었든 이겼다. 승리했다. 전생을 각성한 이후로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 그것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지금 이 순간 증명해냈다.
어둠으로 물들어가는 시야 한쪽 구석에, 마찬가지로 쓰러진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백리극의 얼굴이 위치해 있었다.
어쩐지 그가 환히 웃고 있는 것 같다고, 레인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전생의 난 그런 표정을 지어본 적이 없다니까.”
그렇게 말하는 레인의 얼굴에는, 백리극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웃음이 그려져 있었다.
쿠구구구구구궁.
이내, 백색으로 가득한 심상공간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막사 바깥으로 나선 레인의 곁으로 다른 각성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각각 다른 질문을 해오는 동료들을 둘러보며, 레인은 훗 하고 웃음을 흘렸다.
이후 로엘의 막사로 자리가 옮겨지고, 이런저런 대화가 이어진 끝에 작전 회의가 시작되었다.
레인은 가장 먼저 손을 들고 의견을 제시했다.
“이대로 그냥 몰아붙여도 충분하다고 본다. 지금의 아군 전력이라면 충분할 테니까.”
다른 각성자들의 시선이 몰려드는 가운데, 그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어보였다.
“작전 최대 변수인 바알은, 나 혼자서 맡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