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1화. 끝과 시작(2) (240/249)
  •  241화. 끝과 시작(2)

    “이젠 거의 이겨가는 판국이긴 하다만, 아직 전시인데? 이렇게 멋대로 탈영했다가 돌아와도 돼?”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지. 딱히 들켜도 상관없기도 하고. 어차피 곧 떠날 곳인데 뭘 그렇게 눈치를 봐.”

    “그것도 그렇네?”

     르우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이외에도 묻고 싶은 말이 상당했지만, 그는 그것을 굳이 꼬치꼬치 캐묻지 않기로 했다. 로엘이 이 시점에 쓸데없는 행동을 할 리가 없다고 믿었기에.

    “그런데 왜 굳이 날 데려가? 다른 녀석들도 있잖아.”

    “네가 아니면 안 되거든.”

    “……뭐야. 방금 그 발언 소름 돋았어.”

    “…….”

     르우벤이 팔을 감싸고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로엘이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응시했다.

    “알겠으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좀 마라.”

     르우벤이 큭큭 웃으며 로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앞서나갔다. 참 한결같은 성격의 소유자라는 생각을 하며, 로엘이 그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 *

     두 각성자를 태운 본 와이번이 창공을 가로질렀다.

    “구경 좀 하자니깐.”

    “알겠으니까,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봐.”

     로엘은 르우벤의 요청에 따라 타임 트레블러를 꺼내고 그것에 마력을 주입, 떠오르는 문구를 보여주었다.

    [아티펙트 기동을 위한 조건 달성 ? 1/3]

    “이야. 진짜 채워졌네.”

     르우벤은 감탄사를 흘리다 말고 아래쪽 항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남은 시간 : 6개월]

    “그런데 이건 좀 위험한 것 아니냐? 이제 반년밖에 안 남았는데.”

    “괜찮아. 첫 번째 조건이 시간을 좀 많이 잡아먹는 종류의 것이었을 뿐이니까. 두 번째 조건, 세 번째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는 미리 파악해 뒀고.”

     로엘이 다시 아공간에 회중시계를 수납하며 그렇게 말했다. 르우벤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차례 쭉 기지개를 켰다.

    “아~, 얼른 돌아가서 밀리아 보고 싶다.”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거다. 그보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슬슬 고도 낮출 거니까 균형 잘 잡아.”

     로엘이 르우벤을 독려하며 본 와이번을 조종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도 다시 보고 싶은 얼굴이 많았다. 연인인 플로라와 재회해 회포를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이쪽이야 십 년 만의 재회지만 저쪽은 평소처럼 하루 만에 다시 보는 얼굴이란 거겠지.’

     그때 가서 감정 조절에 실패해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겠다고, 로엘은 생각했다. ‘27세 프로젝트’가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일이 있어서야 쓰겠는가.

    [캬아아악!]

     본 와이번이 빠른 속도로 고도를 낮췄다. 이내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거대한 호수가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왔다.

    “대호수? 여기서 뭘 하려고?”

    “바로 뛰어내릴 거야. 젖지 않게 마법으로 방벽 좀 쳐줘.”

     풍덩!

     두 사람이 타이밍을 맞춰 본 와이번에서 뛰어내려 물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르우벤이 생성한 장벽이 주위에 둘러쳐졌다.

    “그러고 보니 이 채로는 갈 수가 없나.”

     로엘이 중얼거리며 아공간을 열었다. 지난번에 이곳을 찾아왔을 땐 플로라가 있어 편하게 이동했지만, 지금 그녀는 이곳에 없었다.

     물속 깊은 곳까지 가라앉아야 하건만, 르우벤이 생성시킨 둥근 장벽은 오히려 물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래서 로엘은 마충 두 개체를 꺼내 장벽에 들러붙게 했다. 거대 언데드 두 개체 정도면 가라앉기에 충분한 무게가 더해질 터였다.

     쿠르르르르르.

     호수 깊숙이 가라앉던 와중, 르우벤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관상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구만.”

    “…….”

     말은 않았지만 로엘도 공감했다. 장벽 안쪽에 있다 보니 마충의 징그러운 배와 다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였다.

     똑같은 장소를 향해 똑같이 모험하고 있건만, 플로라와 함께 했던 그때와 크게 다른 감상이 드는 건 왜일까. 역시 함께 움직이는 인물이 시커먼 사내놈이라는 것이 문제인 걸까.

    “다 왔군.”

     이내 바닥이 보였다. 어두운 시야는 아티펙트를 이용해 밝혔다.

     로엘이 기억을 더듬으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영역 지배로 바위틈에 숨겨진 아티펙트를 작동시켰다.

     쿠구구구구구구.

     바닥이 크게 진동하더니 숨겨져 있던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이 열린 문을 통과해 안쪽으로 지체 없이 진입해 들어갔다.

    “자. 지금부터 네 역할이 중요해.”

     로엘이 르우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곳을 찾아와야 함을 깨달았었던 때, 로엘은 문득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 분명 하르넴의 유적에 진입하기 위해선 이 통로를 지나는 수밖에 없을 텐데, 여기서 모순이 생겨난 것이다.

     분명, 이곳 통로에는 수많은 함정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부식되고 노화된 함정들이었지만 아무튼.

     그로부터 비롯된 의문 한 가지. 시간 여행을 온 로엘 자신이 먼저 이 통로를 지나가 버리면, ‘미래’에 이 통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로엘은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원래 시대에 그가 경험한 이 비밀통로엔 ‘침입자의 흔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곳 통로가 하르넴의 유적 내부처럼 자가 복원력이 충만한 곳도 아니고, 누군가가 사전에 침입했다면 그 흔적은 어떤 식으로든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함정이 발동된 흔적이라도 남게 될 테니까.

     그렇기에 로엘은 그 당시 그런 결론을 내렸었다. 이 통로에 들어선 것은 제작자 이외엔 자신과 플로라가 처음인 모양이라고.

    ‘그렇지만 그게 아니었지.’

     그 통로에, 머나먼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로엘 본인이 직접 침입해야만 하게 되었다. 과거와 현재를 잇기 위해서.

     그런데 그가 겪은 미래에는 그로 인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게 나왔다.

     르우벤과 페어를 짜서 마족과의 전쟁을 수행하던 어느 날. 신들린 움직임으로 적을 베어내는 르우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로엘은, 순간적으로 굉장히 가능성이 높은 가정을 떠올렸다.

     그 가정이란…….

    “뭘 하면 되는데?”

    “뭐 대단한 건 아니고.”

     르우벤은 빙긋,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마검 꺼내 들고 앞장서서 쭉 걸어가면 돼.”

     * * *

     로엘이 세운 가정이 옳다는 것은 금세 증명되었다. 마검의 소유주인 르우벤과 함께 움직이자 어떠한 함정도 발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 비밀통로의 끝에는 하르넴의 유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통로에 설치된 함정들의 양식은 유적 내부에 설치된 것들과 굉장히 흡사한 종류의 것이었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혹시나 싶었다.

     하르넴의 유적 내부에서 ‘마스터키’의 역할을 했던 마검. 그 마검이 이곳 통로에서도 마스터키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마검이 있다면, 이곳 통로를 프리패스로 통과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그런데 그게 제대로 적중했다.

    “덕분에 편하게 가고 좋네.”

    “야,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었다는 이야기는 미리 해줬어야지.”

    “덕분에 편하게 가고 좋네.”

    “말을 돌릴 거면 성의 있게라도 하던가.”

     르우벤은 무언가 항변의 말을 쏟아내려다가 이내 힘이 쭉 빠진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안전을 확인한 두 사람은 그대로 빠르게 내달려 통로를 주파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통로였지만, 두 사람의 이동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오래지 않아 유적으로 통하는 회전문 앞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로엘은 회전문 앞에 서서 마력을 주입했다.

     쿠르르릉.

     회전문, 그리고 회전문에 연결된 대지가 소음을 일으키며 빙글 돌았다. 벽 너머로 이동되었다.

    “진짜 여기로 이어지는 길이었네.”

     동공 내부의 광경을 확인한 르우벤이 신기하다는 듯 회전문 쪽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로엘은 그런 르우벤을 내버려 두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전에 타임 트래블러의 안내에 따라 ‘그 글귀’를 발견했던 바로 그 벽 앞에 섰다.

    “역시 없군.”

     픽, 하고 웃음을 흘린 로엘이 아공간에서 마충 한 개체를 꺼내고, 그 등 위에 올라탔다. 마충이 벽 가까이 붙으니 얼추 높이가 맞았다.

     그가 아공간에서 특수한 처리가 된 조각칼 하나를 꺼내 들고 내력을 주입, 벽에 글귀를 새겼다. 의아한 얼굴로 다가온 르우벤이 그 글귀를 소리 내어 읽었다.

    “방금 지나온 통로의 존재. 기억하고 있을 것? 그게 무슨 의미야?”

    “그런 게 있어.”

     로엘은 유적의 자가 복원력에 의해 글귀가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특수한 조치까지 취해둔 뒤, 장비를 정리하고 마충의 등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

     이전에 저 글귀를 보고 혼란에 빠졌던 기억이 났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시곗바늘이 존재하는’ 타임 트래블러를 꺼내 들고, 그것에 모종의 조작을 가했다. 회중시계로부터 뿜어져 나온 마력의 실이 벽에 새겨진 글귀에 잠시 닿았다가 회수되었다.

    “자, 이제 여기는 됐고. 바로 움직이자.”

    “그래.”

     다시 르우벤이 앞장서 길을 나아갔다.

     유적의 공략 난이도는 그야말로 극악.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쾌속하게 유적을 주파했다. 이미 그들을 유적을 공략한 적이 있고, 마스터키를 확보한 상태였으니까!

     쿵! 쿵! 쿵! 쿵! 쿵!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양옆으로 물러나 길을 터주는 조각상들. 줄 맞춰 서서 서로를 마주 보던 조각상들이, 일제히 오른팔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지축을 울리며 달려들던 청동골렘이 르우벤이 마검을 들이밀자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며 되돌아갔다.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언데드 뱀이 두 사람을 단숨에 집어삼킬 듯 크게 벌린 입을 닫고 공동의 한쪽 구석에 얌전히 똬리를 틀었다.

    [······.]

     유적의 마지막 관문을 지키는 본 드래곤의 경우엔 아예 두 사람에게 반응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묻은 채 조용히 잠들어 있기만 했다.

     두 사람은 그대로 제2 유적의 공략자에게 주어질 보상이 잠들어 있는 공동으로 들어섰다.

    “뭔가 아깝네. 아무것도 챙기면 안 된다니.”

     르우벤이 입맛을 다셨다.

     이곳 유적에 잠든 아티펙트들은 하나하나가 진국이었다.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인과율을 어그러뜨리지 않으려면. 이쪽 시대로 와서 얻은 게 많다는 걸로 위안 삼아.”

     로엘은 르우벤을 잡아끌어 공동과 연결된 여섯 통로 중 하나로 향했다. 통로 너머엔 게르반의 실험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라.”

     그곳에서, 로엘은 의외의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전에 여기 공략했을 땐 책상 위에 저런 상자가 없었는데.”

    “그래?”

    “어.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

     로엘은 책상 위에 놓인 자그마한 상자로 다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상자의 뚜껑은 열려 있었는데, 그 내부에는 열 개가 넘는 분량의 ‘단환’이 들어 있었다.

    “좋아.”

     로엘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랜 시간 게르반의 유산을 탐독, 분석해온 그는 단숨에 이 단환이 어떤 물건인지 알아보았다.

     르우벤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뭔데?”

    “젊음의 비약.”

    “엥?”

    “제조법까진 모른다만, 이거 하나 만드는 데 갈려 들어가야 하는 목숨이 얼마나 많은지는 대충 알지.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얻었네.”

     로엘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분명 이 상자는 과거 그들이 유적을 공략했을 당시엔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특이한 물건이 있었다면 로엘이 잊었을 리가 없다.

     즉, 이 상자는 인과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라도 챙겨가야 할 물건이라는 뜻이었다!

     르우벤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그거 직접 쓰려고? 네 말대로라면 엄청 꺼림칙한 물건인 것 같은데. 거부감 안 들어?”

    “전혀.”

     로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게르반 본인이 직접 섭취했을 정도로 안정성이 검증된 물건이었다. 거리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가 중요한 부분이지.”

     로엘은 상자 뚜껑을 덮고 아공간에 보관한 뒤, 연구실 한쪽에 놓인 책장으로 다가가 그것을 힘주어 밀었다. 책장이 밀려나며 그 뒤가 드러났다.

    “엥?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원래 여기에 제3 유적 입구가 있지 않았나?”

     르우벤이 당황한 목소리를 흘렸다. 반면 로엘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야 그렇겠지.”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아공간으로부터 다수의 언데드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언데드의 종류가 평소와 달랐다. 그 모두가 이족보행형 하위 언데드였다. 각각 곡괭이나 삽, 마력폭탄 등등을 손에 쥐고 있었다.

    “제3 유적은, 지금부터 내가 건설할 예정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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