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대회전(4)
인류가 설계한 전쟁의 흐름은 이러했다.
시작은 공중 병단. 마도 비행선의 압도적인 위용을 과시해 마족군 공중 병단을 끌어들여 불리한 전투를 수행하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족군 본대의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다. 선수를 취하는 건 그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결과 인류군은 공성전이 아닌 회전임에도 별다른 위화감 없이 수비적인 자세를 고수할 수 있게 된다. 그로써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게 되고.
여기까지 오게 되면 그 뒤는 간단하다. 마족군과의 전투가 시작되면, 천천히 인류군이 밀리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다.
전쟁의 양상이 장기전으로 흘러감에 따라 마족군이 인류군을 압도하는 상황은 그동안 무수히 있어 온 것이다. 모두가 그러한 전쟁의 양상에 익숙해져 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마족군을 유적이 자리한 곳까지 유인한다. 놈들이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실상 인류군 측에서도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은 이것이 작전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하니, 마족군 측에선 위화감을 느낄 건덕지가 없다. 몇몇이 직감에 의거해 무언가를 느끼더라도 그것이 대군을 물릴 명분은 되지 못할 테고.
이 작전에서 인류군에게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마족군이 다급해지도록 공중전에서 크게 압도할 것. 이 부분은 마도 비행선과 카트란의 투입으로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둘째는 별동대가 투입되기도 전에 인류군 진영이 무너지는 일이 없을 것. 이 문제 또한 결집된 인류의 힘을 최대한 활용해 해결해냈다.
이제 남은 건 작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두 별동대가 얼마나 큰 전과를 올리는가. 그들이 전장의 판도를 뒤엎을 만큼의 활약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뿐이었다.
“마, 막아!”
“크아악!”
레인과 로엘이 이끄는 별동대는 단숨에 마족군의 진영을 헤집어놓았다.
레인을 비롯한 최상위 강자들이 키메라 기병대의 주위를 누비며 상위 마족을 척살하고, 기병대는 그들이 만들어준 틈을 따라 거칠게 질주했다.
로엘은 주위를 면밀히 살피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아공간을 열었다.
[커르르릉!]
[컹! 커르르르르!]
투투투투투투! 쾅! 콰앙! 콰과과광!
쏟아져 나오는 헬 하운드의 무리. 어떻게든 기병의 돌진을 막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던 마족군의 대열이 쏟아지는 포화에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헬 하운드들은 그대로 별동대를 보호하듯 진형을 갖추고 움직였다. 최상위 언데드의 무리가 위기 상황이 닥치면 자살 특공을 펼쳐서라도 기병대를 보호하니, 마족의 보병들로선 도저히 별동대의 질주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이쯤에서 한 번 빠진다.”
한창 마족군을 분쇄하며 진격하던 와중, 로엘이 짧게 지시했다.
“예!”
두두두두두두!
그러자 기병대가 일제히 기수를 돌렸다. 곧바로 방향을 선회해 마족군 진형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별동대.
어차피 별동대로는 이 엄청난 대군을 완전히 꿰뚫을 수가 없다. 아예 놈들의 진형을 양분시켜버릴 수 있다면 물론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 정도 화력이 나오지 않는다.
특히 마왕과 군단장들이 대거 결집해 별동대의 발을 묶기 위해 몰려들기라도 했다간 곤란했다. 그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 치고 빠지고를 반복할 필요성이 있었다.
물론 마족의 최고위 전력 중 대다수는 본대와의 전투에 열중하고 있거나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그러니 그들이 갑작스러운 별동대의 기습에 어떻게 제대로 대처하겠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마왕 ‘아스타로드’의 존재만 아니었다면, 인류측 수뇌부도 그렇게 생각했을 터였다.
마족군에는 군대 전체를 아우르는 정보체계를 구축한 마왕, ‘아스타로드’가 있다. 그녀는 실시간으로 정보를 모으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마왕들의 동의를 구해 아군에 지시를 내린다.
보통의 군대였다면 사전에 예상하지 못한 별동대의 기습이 중앙 사령부에 전해지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마족군은 예외였다. 그러니 그것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했다.
“크아악!”
“이 빌어먹을 인간 놈들! 쿠악!”
별동대는 마족군 진형을 빠져나가는 길에도 수없이 많은 마족들을 분쇄하고 지나갔다.
별동대에게 주어진 임무는 굉장히 심플했다. 놈들에게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면 되었다. 그들은 그 임무에 충실하게 행동했다.
“전속력으로 달려라! 체력의 분배는 신경 쓰지 말고! 일단 마족군의 진영을 빠져나간 뒤 포션으로 보충하면 된다!”
마왕 아스타로드가 실시간으로 정보를 수립, 별동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움직일 수 있는 고위 전력을 동원해 그들을 쌈 싸 먹을 포위망을 구축하려 든다. 그렇다면 거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당연히 놈들의 진영 안쪽으로 깊숙하게 진입하는 것을 피하고, 계속해서 방향을 바꿔 치고 빠지기를 반복해야 한다. 그렇게 놈들을 정신없이 몰아쳐야 한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도록!
촤르르르륵! 촤아악!
최선두였던 레인은 어느새 최후방을 맡고 있었다. 그가 휘두르는 사슬낫이 뒤를 노리는 마족들을 무자비하게 쓸어냈다.
인류군은 금세 마족군 진형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그대로 한동안 질주해 놈들에게서 멀어진 후, 각자에게 배부된 포션을 키메라와 나눠 마셨다.
“자, 다시 간다! 방향은 동남쪽으로 잡는다!”
“동남쪽이다! 전속력으로 달려라!”
짧은 휴식을 취한 뒤, 곧바로 내달리는 별동대. 레인이 다시 최선두에 자리 잡았다.
오래지 않아 그들의 눈앞에 한껏 당황한 마족들의 모습이 다시 들어왔다. 별동대를 막기 위해 투입된 고위 전력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파검.”
레인이 양손에 들린 검에 내력을 한계까지 주입, 그것을 크게 휘둘렀다.
“그아악!”
“워어어어억!”
산산이 부서진 검의 파편이 전방에 자리 잡은 모든 것을 꿰뚫고 지나갔다.
“거창! 거차아아앙!”
뒤이어 몰아치는 키메라 기병대.
콰드드드드드드드득!
마족군의 진형 일각이 순식간에 붕괴되어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화했다.
* * *
제국의 초대 황제가 발굴한 유적, 아크레온.
이 유적으로부터 지상으로 향하는 통로는 두 개가 존재했다. 유적의 입구와 출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미 공략이 완료된 지금에 이르러선 어느 쪽이 입구고 어느 쪽이 출구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유사한 형태의 통로들이기도 했다.
레인과 로엘이 이끄는 별동대가 마족군의 서쪽에 자리 잡은 통로에서 뛰쳐나왔다면, 바르바젠과 르우벤이 이끄는 별동대는 마족군의 동쪽에 자리 잡은 통로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로 들이받는다!”
“놈들의 진형을 분쇄해라!”
레인과 로엘이 이끄는 별동대가 언데드와 키메라 기병으로 구성된 것에 반해, 르우벤과 바르바젠이 이끄는 별동대는 야만 민족의 늑대 기병과 탑승형 마도 병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콰르르르르르르!
컹! 컹! 커르릉! 컹!
마법 합금으로 뒤덮인 마도 전차가 앞쪽에 장착된 드릴을 회전시키며 무식하게 돌진하고, 그 뒤를 늑대 기병이 뒤따르며 온갖 아티펙트를 소모해 광범위한 테러를 벌였다.
“하핫! 기분이 아주 끝내주는구만!”
르우벤이 대범위 마법을 뿌리며 쾌활한 웃음을 터뜨렸다.
앞쪽에는 인류군의 본진이 있어 교전 중이고, 양옆으로 인류군 별동대가 치고 빠지며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마족군 수뇌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를 상상하니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너무 흥분하진 마라. 이제 슬슬 한 번 빠질 때가 되었으니.”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마족들을 살육하던 바르바젠이 르우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도 알아! 물러난다! 기수를 돌려라!”
“예!”
“기수를 돌려라!”
르우벤의 외침에 별동대가 일제히 방향을 전환했다. 레인과 로엘이 이끄는 별동대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마족군의 진영을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살육을 벌였다.
“그건, 그렇고. 로엘 녀석이 뭔가 꾸미던 것 같은데 그쪽은 잘하고 있으려나?”
“그쪽은 따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두 명이니까.”
객관적으로 비교했을 때, 아무래도 별동대를 구성하는 인원의 질은 르우벤과 바르바젠이 가세한 쪽이 높았다. 돌진형 마도 병기, 거기에 고대의 아티펙트가 대거 동원되었기에.
사실 처음에는 양측에 균등하게 전력을 배분하려 했었다. 그러나 로엘이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그것을 반대했다.
[사실 나한테 괜찮은 계책이 하나 있거든.]
르우벤과 바르바젠 측에 전력을 몰아주며, 그는 그렇게 첨언했었다.
“그 녀석이 그런 표정을 지을 땐 꼭 뭔가 악랄한 계획이 동반되곤 했는데 말이지.”
르우벤이 그렇게 말하며 킬킬거렸다. 무표정이었던 바르바젠이 결국 피식, 하고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크아아악!
아아악!
그 와중에도, 마족들이 내지르는 비명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이 이끄는 별동대는 그렇게 피와 시체로 가득한 길을 만들어내며 유유히 마족군의 진영을 빠져나갔다.
* * *
레인과 로엘이 이끄는 별동대는 그야말로 맹활약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치고 빠지며 마족군을 헤집어놓았다. 마족군 입장에서 가장 싫을 법한 위치를 골라 돌진, 귀신같은 타이밍에 그들의 진영에서 빠져나오길 반복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활약이 언제까지고 수월하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을 압박하는 마족군 최고위 전력이 점점 눈에 띄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충분한 숫자가 모였다고 판단한 그들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별동대를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막아라!”
“놈들의 움직임을 막아! 한 번 포위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놈들을 전멸시킬 수 있단 말이다!”
물론 별동대가 그들에게 쉽게 잡혀주지는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은 급하게 구성된 포위망에 걸려들 정도로 빈약한 전력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그들이 느끼는 압박감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이 더욱 심해질 터.
로엘은 다시 한차례 포션으로 체력과 부상을 회복하고 돌진하는 별동대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슬슬 지쳐가는군. 포션으로 체력을 회복한다 해도 엄연히 한계가 있으니…….’
그가 무언가 결심한 듯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큰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이번엔 동쪽으로 그대로 직진이다!”
“예!”
지금까지 로엘의 뛰어난 판단력과 상황 예측 능력에 힘입어 최소의 피해만으로 막대한 전과를 세워온 별동대였다. 그들은 로엘의 명령에 일말의 지체도 없이 큰 목소리로 화답했다.
두두두두두두!
“놈들이 온다!”
“하하! 네놈들의 운도 여기까지구나! 하필 이쪽으로 달려들다니!”
그런데 이번엔 운이 나빴는지, 별동대가 돌격한 경로상에 마왕과 군단장을 비롯한 고위 마족이 대거 포진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당한 수모를 갚기 위해 벼르고 벼려온 듯, 곧바로 유기적으로 움직여 별동대를 포위하려 들었다.
로엘이 급히 소리쳤다.
“레인! 너는 최대한 놈들의 공격을 막아! 기병대는 지금 당장 기수를 돌려라!”
빠르고 냉정한 판단.
이대로 달려들었다간 뚫느냐 못 뚫느냐는 둘째 치고 별동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지체 없이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놓칠 줄 아느냐!”
“이미 늦었다!”
마침 마수기병이 별동대 요격을 위해 지원을 왔다.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포위망을 빠져나간 별동대를 곧바로 추격해 들어갔다. 마왕과 군단장을 비롯한 고위 마족들이 가세했다.
“흡.”
촤르르르륵!
레인의 사슬낫이 거칠게 허공을 휘저었다. 그 자신도 달아나고 있으면서 요령 있게 추격자들의 발을 묶었다.
“가소롭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왕과 군단장들이 밀어닥치자 견제도 힘들어졌다. 사슬낫이 놈들에게 닿기도 전에 튕겨 나오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레인이 쯧 하고 혀를 차며 사슬낫을 거두고, 그림자에서 뽑아낸 투척 무기들을 연속해서 내던졌다.
양측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져 갔다. 기병대는 급히 방향을 선회하느라 달리는 속도가 느려졌고, 마수 기병과 상위 마족의 움직임은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이대로 뒤를 잡히면 그대로 끝장! 별동대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고 만다!
얼마나 내달렸을까, 후방에서 레인을 비롯한 초강자들이 바로 지척까지 도달한 마족군과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을 무렵.
선두에서 달려가던 로엘이 눈을 빛내며 크게 선언했다.
“좌우로 산개하라!”
“예!”
한순간에 별동대가 진형을 무너뜨리고 좌우로 흩어져버렸다. 다만 헬 하운드들은 오히려 방향을 돌려 마족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무슨?!”
“병력을 산개시킨다고?! 지휘관이 미쳐버리기라도 한 건가!”
“언데드 따위로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그와 동시에 인류군 초강자들도 각자 큰 기술을 날려 마족들을 떨쳐내고 자리에서 몸을 빼냈다. 그와 교대하듯 언데드들이 일제히 추격대를 덮쳐 들어가고…….
콰과과과과광! 콰직! 콰르르릉!
마왕과 군단장들의 권능에 순식간에 모조리 박살이 났다. 애초에 무리하기 짝이 없는 자살 특공이었다.
“어?”
그런데 그 직후, 전방 허공이 일렁이며 변화를 일으켰다. 분명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그곳에, 갑자기 거대한 실루엣이 잔뜩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가운데에 위치한 초거대 ‘언데드’의 머리 위에는, 한 학사풍 중년인이 올라타 있었다.
“하하. 어찌어찌 성공하긴 했습니다만, 부탁받은 대로 완벽하게 감춰두는 게 진짜 힘들더군요! 이거 마력 파장이 세도 너무 세지 않습니까!”
그가 다른 별동대 구성원들과 산개해 달려 나가고 있는 로엘을 향해 손을 흔들며 그렇게 외쳤다.
이 쾌활한 학사풍 중년 사내의 정체는, 바로 시간의 현자 ‘파프닐’이었다.
“허억!”
“하, 함정에 빠졌다!”
파프닐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언데드의 정체는 다름 아닌 ‘베히모스’. 로엘이 이 시대에 와서 새롭게 제작한 것들까지 합쳐 그 개체 수만도 열이나 되었다.
그 베히모스들이 일제히 입을 크게 벌리고 발포 준비마저 마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발포 준비 과정에서 일어나는 막대한 기파의 흐름 때문에라도 들켰겠지만, 그 부분을 파프닐이 ‘시간 동결’ 마법으로 커버해 주었다.
베히모스의 기척은 물론이고 주위 마력의 흐름까지 모조리 감추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시간 마법이 얼마나 사기적인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두두두두두두!
인류군 별동대가 산개한 직후인지라, 베히모스가 입을 벌리고 있는 방향에는 마족군 추격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만이 베히모스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열 줄기의 빛의 기둥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추격대를 향해 쏟아져 나갔다.
“이런 젠장!”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