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4화. 적극적인 개입(4) (233/249)
  •  234화. 적극적인 개입(4)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인류군은 굳이 무리해가며 마족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수비하는 입장이었고, 전투가 장기화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했으니까.

     그렇다 해도 인류측은 이번 전투로부터 얻은 성과가 많았다. 적측 공중병단 절반을 격추시켰고, 특정 마왕의 목숨을 거뒀으며, 무엇보다 계속된 패배의 와중 승리를 얻어냈다.

     여전히 전황은 밝지 않았지만 군의 사기가 올라갔다. 전장에 활기가 감돌아 그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전후, 병사들이 전쟁의 뒷수습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와중.

     레인은 로엘에게 배정된 숙소를 찾아갔다. 시간의 현자, 파프닐을 대동하고서.

    “어쩐 일이야?”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어서.”

     레인은 파프닐을 로엘에게 소개시켰다.

    “반갑습니다. 로엘이라고 합니다.”

    “하하. 네.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 모두 타인과의 교류를 그리 어려워하지 않는 성향이었다. 금세 훈훈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얼마 전까지 어느 유적에 갇혀 지내다가 탈출한 사람인데, 인류와 마족 사이에 전쟁이 터졌다는 걸 알게 되고 전장에 가세하게 됐다네. 우리와 비슷한 케이스야.”

     레인이 파프닐의 내력에 대해 가볍게 설명했다. 그는 다섯 각성자가 자신들을 소개할 때 사용하기로 한 설정과 굉장히 흡사한 사연을 보유한 인물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각성자들은 가짜고 그는 진짜라는 것일까.

    “유적에 고립이라니,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말도 마세요. 어쩌다 고대 용족이 건설한 유적 따위에 갇혀서.”

     로엘의 눈에 일순 이채가 어렸다.

     고대 용족의 유적이라. 특별한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레인이 타인을 소개시켜 주겠다며 데려왔을 때부터 무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비슷한 상황의 동지분을 뵙게 되니 기쁘군요. 식사라도 함께하시겠습니까?”

     로엘은 곧바로 편하고 친근한 태도를 가장했다. 이런 상대와 친분을 쌓아둬서 나쁠 게 없었다.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인데,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파프닐은 파프닐대로 넉살 좋게 대꾸했다.

     정작 파프닐을 로엘에게 데려온 장본인인 레인은 적당히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이런 종류의 자리는 영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숙소 바깥으로 나선 레인은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파프닐이 시간 마법을 다룬다는 이야기까진 안 해줬군.’

     로엘이라면 오래지 않아 알아낼 터였다.

    ‘시간 마법’, 그리고 ‘용족’. 이 두 가지에 모두 관련되어있는 인물이다. 분명 그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리라.

    그를 지켜보다가 신용해도 좋을 인물이라는 판단이 서면 타임 트래블러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것도 좋겠지.

    ‘그건 그렇고, 문제는 나로군.’

     레인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표정을 굳혔다.

     결국 글라시아 라볼라스는 잡지 못했다. 악착같이 추격해서 팔 한쪽을 날려버리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푸르푸르를 잡은 것만 해도 상당한 성과이긴 하지만.’

     사실 마왕 중 유일하게 휘하 세력을 가지지 않은 글라시아 라볼라스보단 푸르푸르가 중요한 인물, 아니 마물이긴 했다.

     그렇지만 성에 차질 않았다. 전생이었다면 둘 모두 잡았을 텐데.

     그렇기에 그는 생각했다. 전생의 경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아니, 그 시절의 자신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실마리는 잡았다.’

     어차피 지금 이상의 경지로 향하는 문은 무슨 특별한 수련을 한다고 열리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그동안은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있었다. 아니, 일부러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해왔다.

    ‘그게 이번에 성과를 얻었지.’

     전생의 레인 이외엔 그 누구도 개척하지 못한 절대의 영역. 레인은 이번에 그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단초를 손에 넣었다.

    ‘그 감각’은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두 마왕과 격전을 벌이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과의 전투에서는 답답함만을 느꼈다.

     그가 그 감각을 느꼈던 것은, ‘시간 마법’이 그 자신의 몸에 적용되었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는 그 순간, 한 치 앞도 살필 수 없는 어둠에 뒤덮인 공간에 빛이 번쩍인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다.

     안타깝게도 그 빛은 정말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이미 나아갈 길은 확인해 둔 상황.

     이제는 어둠 속에서 방향감각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며 차근차근 나아가는 일만이 남았다. 길을 잃지 않는 ‘요령’은 전생에 익혀 두었으니 경지에 오르는 것도 시간문제이리라.

    ‘차라리 잘 됐다.’

     레인은 이곳 과거에 오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본인의 성장이라는 측면만 놓고 보면 10년이라는 시간을 추가로 번 것이 아닌가.

     10년이면 충분했다. 전생의 자신을 따라잡고 뛰어넘는 데엔. 방향성을 찾은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레인의 얼굴에 살짝 기대감이 어렸다. 전생의 기억을 각성하고부터 계속해서 열망해왔던 일이 아닌가.

     이제는 정말로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왔다.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이내 자취를 감췄다.

     * * *

     인류군과 마족군 사이의 전쟁은 금세 재개되었다.

     다섯 각성자가 포함된 군대는 어느 날은 승리했고, 어느 날은 패배했다. 아무래도 근본적인 전력의 열세로 인해 패배의 비율이 높았다.

     인류군의 전선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각지에서 몰려드는 마족에 대응하기 위해 다섯으로 쪼개졌던 군대는, 대산맥과 같은 지형적인 요소가 적은 동쪽으로 전장의 무대가 옮겨가면서 다시 합쳐졌다.

     인류군이 고전하는 것과는 반대로 다섯 각성자의 위상과 입지는 점점 높아져만 갔다. 몇 번에 걸친 전투의 와중에 그들이 세운 전공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안 그래도 전력이 모자란 인류군은 그들을 크게 중용했다. 로엘과 바르바젠의 뛰어난 정치력이 그 과정에서 여러모로 힘을 발휘했다.

     인류의 전선이 밀리고 밀려, 결국 대륙의 4할 가까이가 마족의 손에 떨어지게 된 시점.

     다섯 각성자가 한자리에 모여 회합을 가졌다.

    “끄으. 이건 뭐 여기 온 이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 전투, 전투로구만. 아주 삭신이 쑤셔 죽겠다.”

    “그런데 전부터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문제가 있었는데.”

     여느 때처럼 가벼운 잡담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르우벤의 앓는 소리를 깔끔하게 무시한 카트란이 제법 진중한 표정으로 화제를 꺼냈다.

    “이곳의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원래 시대로 되돌아가게 되면, 우리 나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 말에 각성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로엘에게로 몰렸다.

     모두들 지금까지 언급하진 않고 있었지만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화제였다.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기도 했다.

     로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부분에 대해선 이전에 타임 트레블러를 획득한 유적에서 얻어낸 정보를 토대로 가정을 세웠고, 최근 시간의 현자 파프닐에게서 확신을 얻었다.

    “당연히 여기서 보낸 시간만큼 나이를 먹어서 가는 거지. 십 년 꽉 채우면 서른일곱이 되는 건가.”

    “젠장. 역시 그런가.”

    “사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곤란하지. 고정된 시간 축으로 되돌아간다고 우리들의 시간마저 되감겨지면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리니까.”

     다들 어렴풋이나마 짐작은 하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야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원래 시간 축으로 돌아가면 이곳에서 보낸 시간만큼 늙은 육신이 젊어지고 수명도 되돌아온다!’ 같은 편리한 상황이 있을 턱이 있나.

     게다가 정말로 육신의 젊음이 되돌아온다면, 과연 그것으로 끝날 리가 있겠는가.

     이곳에서 올린 경지는? 얻은 정보는? 앞으로 획득할 아티펙트들은?

     과연 형편 좋게 그것들만은 남아서 원래 시대에서도 활용할 수 있게 될까? 그럴 리가.

     분명 달갑지 않은 사실이긴 하지만, 이곳에서 먹은 나이가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굉장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들에게 제안해 두고 싶은 일이 있다.”

     로엘이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각성자들이 상체를 조금 더 가까이 숙여 관심을 드러냈다.

    “되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스물일곱인 거다. 여기서 먹은 나이는 없는 것으로 치자고. 우리 다섯이 입을 다물기만 하면 완벽범죄야.”

     설마 했던 은폐 제안!

    “아무리 그래도 나이를 먹게 되면 티가 날 텐데.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카트란이 현실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러자 로엘이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방법을 찾아봐야지. 어차피 레인이나 바르바젠의 경우엔 나이를 먹어도 외견적으로 티가 안 날 테니 괜찮다고 치고.”

     레인에겐 괴물 같은 육체제어 능력이 있고, 바르바젠은 반인반마에 가까웠다. 10년이 아니라 100년이 흘러도 두 사람의 얼굴에 주름이 지는 일은 없으리라.

    “나도 일단 안 늙어. 주술 문신으로 노화를 억눌러두고 있거든.”

     르우벤이 손을 들고 자랑했다.

     본래 주술 문신은 수인족 전용이지만, 그는 모종의 유적에서 고대의 주술 문신을 습득해 몸에 새겨두었다. 그중에는 노화를 억제하는 고위 주술도 있었다.

    “부럽네, 아주 그냥.”

     로엘이 앓는 소리를 냈다. 실상 가장 문제가 되는 게 자신임을 깨달은 것이다.

     알고 보면 카트란도 굉장한 무예의 천재다.

     10년이면 그의 경지가 오르기엔 충분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경지가 오르면 자연스럽게 노화를 감출 수 있게 될 테지.

    “방법을 찾아야 해. 방법을…….”

     로엘이 어두운 아우라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것도 잠시.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튼. 우리가 작정하고 입을 다물면 나이에 관한 건 얼마든지 감출 수 있을 거야. 갑자기 오른 경지나 달라진 분위기 같은 것에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것을 시간 여행에 결부시킬 수 있는 자는 없겠지.”

    “그렇긴 하다만, 역시 주변 사람들을 모조리 속이자니 조금 저항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

    “잘 생각해, 카트란. 한 살 아래 연인이었던 이레닐이 한순간에 열한 살 연하가 되는 거라고.”

    “…….”

     카트란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일지라도 저항감이 들 수밖에 없는 상상이었다.

    “이견 있는 사람?”

     로엘의 물음.

     당연하다고 할까,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로엘이 탁자를 한 차례 탕, 하고 두드렸다.

    “좋아. 결정됐군.”

     통합 제국의 실세 다섯이 대형 사기를 기획하는 순간이었다.

    “이 이야기는 이쯤 하고.”

     로엘은 쿡쿡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지금부터가 본론이었다.

    “이제 슬슬, 인류군의 실세로 자리 잡을 때가 된 것 같다.”

    “그렇지. 지금까진 아무래도 일개 장수 포지션이라 활동의 제약이 컸으니까. 슬슬 스케일을 키울 때가 됐지?”

     르우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타이밍도 좋았다. 연이은 전쟁으로 입지와 명성은 충분히 쌓였고, 더 이상 후방에서 저들끼리 물고 뜯을 여유가 없게 된 귀족들과도 조만간 접촉할 수 있을 듯했다.

     능력은 충분히 인정받았다. 무력부터 지력까지. 이미 군 내에서 다섯 각성자에 대한 신뢰는 두터웠다. 슬슬 부족한 기반을 채워도 좋을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영웅은 전쟁의 시대에 가장 쉽게 탄생하는 법이라던 로엘의 말대로였다. 다섯 각성자의 위상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 가고 있었다.

    “일단 대부분의 일은 나와 바르바젠이 처리할 테지만, 너희들의 도움을 빌릴 일도 많을 거다. 재깍재깍 도와줘야 해.”

     계획은 이미 어느 정도 세워두었다. 첫 타깃으로 삼을 부패한 귀족도 심혈을 기울여 선별해 두었고.

    ‘이쪽’일에 있어서 로엘과 바르바젠만큼 능통한 사람은 대륙에 몇 없었다. 설사 마도 문명 부흥기라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지.”

     레인과 르우벤, 카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척하면 척 아니겠는가. 그동안 그들이 손발을 맞춰 온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그때그때 통신으로 넣어줄 테니, 일단 이것 하나씩 받고 내용 전부 외워둬. 앞으로의 기본적인 행동 지침을 적어뒀으니까.”

     로엘이 아공간에서 종이 세 장을 꺼내 배부했다. 바르바젠은 이미 모든 계획을 아는 터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

     레인이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종이에 적힌 내용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본격적인 시작인가.”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각성자들이 과거에 떨어진 지도 5년이 지났다.

     바깥으론 전쟁을, 내부로는 정쟁과 암투를. 갖은 고생 다 해가며 활동한 끝에, 다섯 각성자는 결국 계획한 바를 대부분 이뤄냈다.

     마족군이 엘레노어 대륙의 6할 가까이를 집어삼킨 시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