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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화. 적극적인 개입(1) (230/249)

 231화. 적극적인 개입(1)

 콰릉! 콰르르릉! 콰과과과과광!

 로엘이 제단 아래로 내려서자마자, 세상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상황입니까?”

“응? 유적이 존재의의를 다해서 붕괴하고 있는 건데?”

“…….”

 로엘이 혀를 찼다. 이런 건 좀 진작 말해줄 것이지.

“동료들을 걱정하는 거라면, 뭐 지금이라도 불러와 줄게. 그 정도 서비스쯤이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유적의 관리자가 호의 어린 태도를 보인다는 게 다행이었다.

 이곳 유적을 구성하는 요소 중엔 가치 있는 것들이 많았지만, 그것들을 챙길 틈까진 없을 듯했다. 안타깝게도.

 공간 자체가 붕괴하는 주위 광경을 지켜보다 보니 그것들이 정말로 실재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긴 했지만.

 잠시 포탈을 열어 그 너머로 모습을 감췄던 관리자가, 이내 레인과 르우벤을 데리고 돌아왔다. 로엘은 꾸벅, 하고 묵례했다.

“감사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르우벤의 물음에 로엘은 나중에 설명하겠다며 이야기를 뒤로 미뤘다. 일단 시시각각 무너져 내리고 있는 유적에서 탈출하는 게 우선이었다.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만, 그럴 여유가 없군요.”

“뭘 더 물어보려고? 내가 봤을 땐 이미 웬만한 건 스스로 다 깨달은 것 같은데?”

“그런가요.”

 로엘이 볼을 긁적였다. 그사이에 여인은 세 각성자의 눈앞에 포탈을 생성시켰다.

“자. 유적 바깥과 연결된 통로를 구축해 뒀어.”

“저희 이외에 이곳 유적에 침입한 마족들은…….”

“다 죽겠지?”

 여인이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로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세 각성자가 포탈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사념체 여인은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후련한 얼굴로 마치 흩어지듯 자리에서 사라졌다.

 쿠쿵! 쿠콰콰콰쾅!

 이내, 유적이 자리 잡고 있던 네파림 산맥의 한 축이 통째로 무너져내렸다.

 * * *

 세 각성자가 무너져내리는 산맥의 한 축을 본 와이번에 탑승한 채 내려다보았다.

 르우벤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로엘에게서부터 전해 듣고, 머리를 쥐어 싸맸다.

“여기서 타임 트래블러를 또 하나 얻었다고? 으아, 되게 복잡하네. 무슨 상황이야 대체.”

“글쎄. 복잡할 것 없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히 방향성이 정해진 듯하고.”

“방향성?”

“어. 우리가 원래 시대로 되돌아가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지, 대충 감을 잡았거든.”

 로엘은 그렇게 말하며 타임 트래블러에 저장된 기록을 떠올렸다.

[아티펙트를 재기동하기 위해선 3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아티펙트 기동을 위한 조건 달성 - 0/3]

전에는 이 항목을 달성하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단편적인 추측 정도만 내어놓았을 뿐.

 그러나 지금은 대충 알 것 같았다. 유적의 관리자가 언급한 ‘인과율’이라는 단어가 가정에 힘을 실어주었다.

“쉽게 말해 과거를 현재와 이어야 하는 거지.”

“……?”

 레인도, 르우벤도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단번에 알아듣기는 힘들겠지.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그냥 적당히 뭘 하면 되는지 정해졌다고 생각하면 돼.”

“새롭게 얻었다는 타임 트래블러로 그냥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레인이 물었다. 그러자 로엘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 아티펙트를 이용한 ‘여행’은 과거로만 가능하거든. 그것도 ‘여행자’ 본인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 축으로만. 그렇다고 기록되어 있더라고.”

 그리고 미래로의 여행이 가능하다 해도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인과율’이라는 건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무려 고대 용족의 사념체씩이나 되는 유적의 관리자가 괜히 그것의 위험성을 그렇게 강조했겠는가.

 단순히 생각해 봐도 문제 되는 점이 한 가지. ‘또 다른 타임 트래블러’를 이용해 미래로 갔는데, 그곳에 ‘또 다른 자신’이 있다면? 과연 ‘내가 두 명이 됐네?’라는 정도로 끝나게 될까?

 아마 ‘여행자’ 본인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축으로만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항목은 그 때문에 달린 것이겠지. 로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우선 항목을 달성하기 위한 조건 2가지 정도는 대충 알 것 같아. 나머지 한 가지도 방향성이 정해진 이상 오래지 않아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가. 그럼 지금부터 우리는 뭘 해야 하지?”

“우선 나머지 두 사람과 합류해야지. 그러고 난 뒤엔 전에 세웠던 계획대로 마족을 대륙에서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태기로 하고. 다만.”

 로엘은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당초 계획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본격적으로 개입해야 할 것 같다. 10년이라는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으니까.”

 로엘은 그렇게 말하며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일정을 정리했다.

 그래.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지금까진 ‘어차피 머나먼 과거의 일이니 너무 깊숙하게 개입할 필요는 없겠지’라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 시대 일에 적당히 개입하면서 원래 시대로 되돌아갈 방법을 찾는다?

 멍청하기 그지없는 계획이었다. 애초에 과거의 일, 미래의 일을 구분 지은 것부터가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했다.

 정말로 어쩌면. 만약의 이야기이지만. 극단적이다고도 할 수 있는 생각이지만.

 이 시대 사람들이 마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건 ‘다섯 각성자의 개입이 있었던 덕분’인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그 승리의 요소에 각성자들의 존재는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역사대로라면 승리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직접 역사의 주역이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지.

 그러니, 지금부터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 * *

 인류군과 마왕군이 맞붙고 있는 최전선. 아파에르 영지.

 세 각성자는 그곳에서 나머지 두 각성자와 재회했다.

“무사히 돌아왔군.”

“좀 위험한 상황이 많긴 했다만. 어찌어찌.”

 가볍게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뒤, 카트란과 바르바젠을 따라 영주성 내에 위치한 귀빈실로 이동했다. 그사이 이러저러한 일이 있어서 귀빈 대접을 받고 있었다는 모양이었다.

 다섯 각성자가 원탁에 둘러앉아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와중, 하녀가 찾아와 인류군 총사령관의 대면 의사를 전하고 갔다. 휴식을 취하고 내일 보자는 전언이었기에 선선히 수락해 주었다.

 로엘이 말했다.

“마침 잘됐네. 슬슬 연줄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이쪽을 이용하고 싶다면야.”

“이곳에 있으면서 느낀 건데, 인류군 측 인력난이 굉장히 심하더군. 고급 전력은 아무리 많아도 모자란 모양이야.”

“그래?”

“조금 이야기하면 복잡한데, 전선 후방에서는 이 와중에도 파워게임이 한창인가 봐. 기가 막힐 노릇이지.”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이곳도 마족이 침공해 오기 전까진 기나긴 평화기가 유지되고 있었다니까.”

 카트란의 설명에 바르바젠이 첨언했다.

 로엘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그렇다면야 이쪽의 입장에선 나쁠 게 없다.

 그 틈을 파고들 수만 있다면 전쟁의 주역으로 단숨에 부상할 수 있을 터였다. 전쟁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이용하면 입지를 확보하는 것도, 그리고 권력자들에게 접근해 그들을 이용하는 것도 가능할 테니까.

 물론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로엘은 자신이 있었다. ‘그쪽’ 방면의 스페셜리스트인 바르바젠이 아군으로 있는 만큼 더더욱.

“이곳 총사령관의 성격은 어때?”

“성격? 그리 오래 봐오진 못했지만, 강직해 보였다. 다혈질이기도 하고. 후방의 귀족들에 대한 욕설을 입에 달고 살더군.”

“딱 좋네. ‘교섭’의 여지도 많고. 일단은 좀 지켜봐야겠지만.”

“상당히 적극적이군. 이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럴 만한 이유가 생겼거든.”

 로엘은 후후, 하고 웃으며 다른 각성자들과 앞으로의 계획을 주고받았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자리를 파한 뒤엔 몸을 씻고 푹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다음 날. 다섯 각성자는 이곳 인류군을 통솔하고 있는 대귀족, ‘라바른 드 퀘이사’ 후작과 대면할 수 있었다.

 * * *

 며칠 뒤, 인류군의 전선으로 마족의 대군이 밀어닥쳐 왔다. 각성자들이 시민을 구출했던 도시를 비롯한 주위 영지를 완벽히 장악하고 다시 진군을 시작한 것이다.

 인류군에 비상이 걸렸다. 안타깝게도, 사기는 형편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지금의 전선은 인류군이 밀리고 밀려서 구축하게 된 것이었다. 이번 충돌에서도 밀리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근방 영지에는 대피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애초에 승리를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였다.

“데뷔 무대 한 번 최악이네.”

 르우벤이 쓴웃음을 흘렸다.

“왜? ‘그래서’ 좋은 건데. 더욱 돋보일 수 있는 거잖아.”

 로엘이 능청스럽게 그것에 대꾸했다.

 어떤 의미에선 인류 측 전력이 크게 부족한 시점이라 다행이기도 했다.

 만일 전력이 부족하지 않았다면, 전선의 인류군이 이것저것 재고 있을 처지가 아니지 않았다면 그 대열에 합류하는 절차가 굉장히 까다로웠을 터다. 아무리 각성자들이 피난민을 구출해왔고 뛰어난 실력을 입증했다고 해도.

“하여간 로엘 네 사고방식은…….”

 레인이 로엘을 응시하며 혀를 찼다. 그게 전투 전 긴장을 풀기 위한 일종의 농담임을 알지 못하는 건 또 아니었지만.

“이번 전투가 중요해. 우리의 가치를 극대화할 기회니까.”

“좋아. 그럼 다들 각자 위치에서 잘 싸우고, 살아서 다시 모이자.”

 다섯 각성자가 흩어져서 자신들에게 배정된 위치로 향했다. 레인의 경우엔 병력의 최선두에서 장수의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었고, 반대로 로엘의 경우엔…….

“어서 오시오.”

“덕분에 한시름 놨소. 공중 병단의 규모가 작아서 그동안 공중전에선 맥을 못 추고 있었는데, 이제야 얼추 해볼 만하겠군.”

“그대와 같은 실력자가 그동안 알려지지 않고 묻혀 있었다니. 대륙이 넓기는 넓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인류군의 공중병단을 지원해, 마족군의 옆구리를 칠 계획이었다.

* * *

“크하하하! 인간 놈들의 진영이 코앞이다!”

“지금껏 해왔던 대로 하면 된다! 놈들을 죽이고 그 살을 씹어라! 적들을 유린하고 그들이 세운 문명을 불태워라!”

“그워어어어어어!”

 밀려드는 마족의 대군. 지휘관들이 내지르는 외침이, 대군을 구성하는 마족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귀를 어지럽힌다.

 그와 맞서는 인류군. 교단에서 파견된 사제들이 축복을 통해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고, 선봉장들이 각자 손에 든 무기를 곧추세워 마족군을 가리켰다.

 선봉장쯤 되면 모두 초인, 초월자의 영역에 이른 강자들이었다. 확실히 문명 수준이 높은 시대인 만큼 다양한 종류의 강자가 분포해 있었다.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독려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의 가족 친지들이 뒤에 있다! 그들이 무사히 피난을 마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이 이상 밀려날 수 없다는 각오로 싸워라!”

 레인은 그런 지휘관들의 독려에도 얼굴에 그늘이 가득한 인류군을 쭉 둘러보았다. 뚜둑거리며 목을 풀길 한 차례.

“후우.”

 그가 숨을 골랐다. 그동안 그렇게나 준비해온 놈들과의 전쟁을 이런 식으로 먼저 경험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건만.

 얼마 전에도 놈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게릴라전을 벌였지만, 이번 전투는 그와는 완전히 성질이 달랐다.

 오와 열을 맞춰 진군해오는 놈들의 대군으로부터 거대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추격대에게 쫓겼던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쿠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마족군의 선두에 위치한 초대형 마수들이 인류군을 향해 돌진하며 포효를 터뜨렸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인류군의 선두에 선 무인들이 마주 달려 나가며 오라 가득 실린 포효를 내질렀다. 레인이 사자후를 터뜨려 기세를 보탰다.

 이내, 양측의 군세가 부딪쳐 격렬한 충돌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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