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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화. 타임 트래블러(Time traveler)(3) (228/249)
  •  229화. 타임 트래블러(Time traveler)(3)

     포탈 너머엔 발 디딜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떨어져 내릴 뿐.

    ‘젠장. 이동식 포탈은 느낌이 안 좋아서 웬만해선 빠지지 않으려 했는데.’

     로엘이 바닥이 보이질 않는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저 멀리서 이 와중에서도 한창 레인, 르우벤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발레포르의 모습이 들어왔다. 빌어먹을 마왕 놈 같으니.

     그들뿐 아니라 다른 마족들도 많았다. 얼추 백여 명은 되어 보였다. 겨우 이동식 포탈 한 번 등장했다고 이 인원 전부가 휩쓸려버린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유적은 심상치가 않아.’

     타임 트래블러의 가리킴, 그리고 직감만을 믿고 들어온 유적이건만.

     이 유적은 정말로 상식을 초월하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바깥의 마족 대군보다도 위험하다고 느껴질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이 시대 유적이 죄다 이런 건 아니겠지.’

     이 시대에 발견되지 않았을 뿐, 르우벤이 공략했다는 유적 중에도 고대의 것이 꽤 있었다. 지금 들어와 있는 이 유적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하리라.

    “헉?!”

    “저게 뭐야!”

     그런 와중 주위 마족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념에서 깨어난 로엘이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수십, 아니 수백개는 되어 보이는 포탈의 향연. 로엘이 그중 한 포탈로부터 비롯된 흡인력을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최악이로군.’

     상정했던 위험 상황 중 최상에 랭크될 만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인원을 분산시키겠다는 건가.’

     슈욱! 슈욱! 슈우욱!

     로엘이 그런 생각을 함과 동시에 각성자들, 그리고 마족 전원이 각기 다른 포탈로 빨려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 * *

    “여긴?”

     로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포탈 너머로 나오자마자 함정이 발동되거나 가디언이 튀어나오는 상황을 상정했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의외로 평화로웠다.

    “이런 공간도 있었나.”

     기감을 끌어올려 주위를 탐색해 보니 어떠한 기운도 감지되지 않았다. 언데드를 풀어 함정이 있는지도 확인해 보았지만, 마찬가지로 어떠한 문제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주위는 마치 은하수와도 같은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새까만 배경에 흰색 빛이 수없이 반짝이고 있는. 공동의 형태는 둥근 반원형으로, 둘레를 따라 열 개의 포탈이 열려 있었다.

    ‘안전지대라고 봐도 되겠지.’

     유적 내 안전지대.

     운이 좋았다. 휴식을 취하고 태세를 정비할 수 있는 장소에 떨어지게 되다니.

     로엘은 우선 레인과 르우벤에게 통신을 넣어 보였다. 먼저 르우벤의 경우엔…….

    [야, 여긴 미쳤어! 최고위 언데드인 리치가 막 돌아다닌다고!]

     제대로 꽝을 뽑은 듯했다.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면 레인의 경우엔 특색이 넘치는 장소로 옮겨진 듯했다.

    [여긴 혹한 지대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어디 설화에서나 나올 법한 설인이 돌아다니는군.]

    “괜찮겠어? 나나 르우벤은 아공간으로 식량을 보급하지만 너는…….”

    [괜찮아. 여기 설인 하나 잡아다 먹어봤는데, 독성이 좀 짙긴 해도 딱히 문제 될 정도는 아니었어.]

    “벌써 먹어봤냐.”

     이 생존의 달인에 관해선 잠시 관심을 접어둬도 좋을 듯했다. 지구의 어느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생존 전문가 아저씨도 이 녀석에 비할 정도는 아니겠지.

    “그럼 지금부터 나는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인데.”

     로엘이 잠시 고민했다.

     언뜻 열 개의 포탈로 인해 선택지가 열 가지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실질적인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않느냐.

     실상 저 포탈들 너머에 뭐가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데 포탈이 하나건 열 개건 백 개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로엘의 선택은, ‘들어가지 않고 이곳에 남는다’는 쪽이었다.

    ‘주먹구구식으로 돌아다니며 길을 찾는 것보단 이 수상쩍은 공간을 조사하는 쪽이 더 소득이 있겠지.’

     이 살벌하기 그지없는 유적에서 ‘무풍지대’라니. 무언가 냄새가 났다.

     어차피 몸으로 때워가며 유적을 공략하는 건 레인과 르우벤이 맡아줄 테니 자신은 이쪽을 맡는 게 좋으리라.

     생각을 정리한 로엘이 공동 내부를 은하수처럼 빼곡히 메운 흰 빛, ‘룬 어’들을 쭉 돌아보았다.

     * * *

     그로부터 이틀이 흘렀다.

    “후.”

     로엘이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그동안 알아낸 사실을 적은 노트를 눈으로 훑었다.

    [1. 이 유적을 건설한 것은 인간이 아니다. 용(龍)이다.]

     첫 번째 항목에서 로엘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만한 유적을 제작하려면 신화에 등장하는 용 정도는 되어야겠지.’

    [2. 이곳 던전을 지키는 가디언들은, 과거 용의 권속이었던 존재들이다.]

    ‘용아병이나 리치의 존재를 알게 되고 혹시나 싶었는데, 정말이었을 줄은.’

     용아병, 그리고 리치. 그 둘 모두가 ‘용의 권속’으로 고대 서적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존재들이었다.

    [3. 이 유적은 ‘어떠한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보관이라.’

     이 부분이 의문이었다.

     이만한 유적을 건설한 목적이 겨우 보관이라니. 대체 그 보관된 물건이라는 게 뭐길래 이렇게 거창한 유적까지 건설했단 말인가.

     이외에도 알아낸 자잘한 정보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 패스. 일단 지금 시점까지 알아낸 쓸 만한 정보는 이게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정작 유적을 공략하기 위한 단초는 발견하지 못했군.’

     로엘은 잠시 갈등했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정보를 얻어볼까, 아니면 이제라도 포탈 너머로 이동해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움직일까.

     통신을 통해 르우벤과 레인의 안위는 주기적으로 전해 듣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아직까진 무사한 것은 물론, 천운이 따라줬는지 합류하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

     잠시 고민하던 로엘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역시 조금 더 이곳을 조사하는 게 좋겠다고.

     이곳을 나가면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나간다고 일행과 합류할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고.

     지금껏 이 공동에서 얻어낸 정보가 상당하다. 정말로 어쩌면 유적 공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끝까지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일행과 합류해야 한다면 이쪽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저쪽에서 이쪽을 찾아오는 게 옳았다. 이쪽이 안전지대니까.

    ‘여유롭게 휴식을 취할 틈은 없지.’

     나머지 두 사람도 지금 한창 악전고투하고 있을 텐데, 이쪽이 여유롭게 움직일 수는 없다. 로엘은 눈을 한 차례 비비고 다시 작디작은 룬 어를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여기는?”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 로엘의 고개가 확 돌아갔다.

    “엇! 너는!”

     포탈을 타고 한 마족이 넘어오고 있었다. 기억에 있는 인물이었다. 분명 발레포르 휘하 군단장 중 하나였을 터.

    “쯧.”

     로엘은 혀를 차며 아공간을 열었다. 헬 하운드와 마충이 쏟아져 나와 로엘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 그 건방진 인간 흑마법사로군. 잘 만났다.”

     마족 사내가 호전성을 드러내며 권능을 끌어 올렸다.

     그의 권능은 굉장히 심플한 종류의 것이었다. 바로 육체강화.

     그러나 심플하다고 해서 위력이 약한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마왕 간에도 실력의 격차가 있듯 군단장 간에도 격차가 있는데, 이 마족 사내의 경우엔 거의 마왕에 근접하는 수준의 강자였다.

    ‘귀찮게 됐군.’

     로엘이 혀를 찼다.

     싸운다면 못 이길 것도 없었다. 저쪽이 꽤나 지쳐 보이는 모양새인 데 반해 이쪽은 그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해왔으니까. 그냥 단순 전력만 해도 이쪽이 약간 위였고.

     그렇지만 장소가 좋지 않았다. 다수의 언데드를 부리는 로엘이 전장으로 삼기에 이 공간은 너무나 협소했다. 잘못했다가 동귀어진이라도 당하게 되면 그게 무슨 낭패인가.

     그렇다고 포탈을 타고 장소를 옮기자니 이곳 안전지대가 너무 아쉬웠다. 다시 되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로엘은, 문득 떠올렸다.

    ‘아니지. 이 상황에서 더 긴장하고 있는 건 저쪽일 터.’

     그리고 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저 이름 모를 대머리 거한 군단장에게선 근육뇌의 느낌이 난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여유가 생겼다. 로엘이 입가에 미소를 내걸며 말했다.

    “잠시 이야기를 좀 나눴으면 싶군.”

    “……?”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었으면 한다.”

     * * *

     마족 사내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무슨 개수작이란 말인가.

    “웃기지 마라. 겁을 먹기라도 한 모양이지?”

    “그런 게 아니야. 너도 지금까지 이 유적에서 살아남는 동안 느꼈을 텐데. 이곳 유적에서 인간과 마족 사이의 충돌 같은 건 사치스러운 행위라는 걸.”

    “…….”

    “심플하게 말할까. 나는 이 유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인간이건 마족이건 일단 힘을 모아야 한다고 본다.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대립하지라도 않아야 하고.”

     마족 사내는 무언가 공감하는 바가 있는지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 또한 모시는 마왕의 명령을 따라 이곳까지 오긴 했지만, 이런 정체 모를 유적에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보다시피 난 마법사다. 전위를 맡아줄 녀석이 있으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이제 곧 이 안전지대를 벗어나 움직여야 하는데, 혼자선 조금 불안한 면이 있다. 동맹을 요청한 건 그런 까닭이다.”

    “내가 널 어떻게 믿고?”

    “당연히 믿기 힘들겠지. 그렇지만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내가 이 상황이 두려워서 네게 이런 제안을 건네고 있는 것 같나?”

    “…….”

     마족 사내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인정하긴 싫지만 현 상황에서 전력의 우위는 저쪽에 있었다.

    “언제까지고 동맹을 유지하자고는 하지 않겠다. 동맹은 유적을 벗어나기 전까지만. 대신 이쪽이 먼저 동맹을 제안한 만큼 지금까지 알아낸 유적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 주지.”

    “정보?”

     마족 사내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닌 척해도 관심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로엘이 빙긋, 하고 웃었다. 걸려들었군.

    “그래. 이곳 공동에 빼곡히 새겨진 룬 어들이 보이지? 난 지난 며칠간 이 장소에서 여러 가지 정보를 모았다. 그걸 전해주마.”

     마족 사내는 잠시 고민했다.

     역시 눈앞의 인간을 믿을 수는 없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그는 적이 분명했으니까. 그 정도 사리 분별도 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은 멍청하지 않다.

     그렇지만, 어쩐지 저 ‘정보’라는 건 중요할 듯싶다. 그러니 일단 제안을 수긍하는 ‘척’하며 정보를 빼낼 필요성은 있지 않을까. 체력이 회복되는 대로 배신하면 그만이니까.

     생각을 정리한 마족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로엘이 곧바로 아공간에서 물과 식량을 꺼내 내던졌다.

    “먹어. 동맹을 받아준 대가로 주는 선물이다.”

    “!”

     그야말로 며칠만의 제대로 된 식사였다. 마족 사내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웠다.

     언뜻 부주의한 행동인 듯싶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의 권능은 신체 컨디션을 최고조로 유지시키는 종류의 것이기도 했으니까. 설사 음식에 극독이 들어있다 해도 별다른 문제는 없을 터였다.

     아니, 독이 들어있다면 오히려 좋았다. 상대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니까.

    “후.”

     모든 음식을 먹어치운 마족 사내가 숨을 골랐다. 독은 들어있지 않았다.

    “다 먹었으면 바로 정보를 전해주지. 잘 들어.”

    “그 언데드는 그대로 두는 건가?”

    “치울 수야 없지.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방금 전까지 내겐 널 믿으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말한 적 없어. 그냥 서로의 이해가 일치해서 한시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자는 요청을 받은 거라 여기면 돼. 서로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고, 배신을 염두에 두는 것도 당연한 거다.”

    “마냥 믿으라고 하는 것보단 낫군.”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는 마족 사내.

     로엘은 그에게 지금껏 얻은 정보를 전해주었다. 최대한 있어 보이게 포장해서.

     굳이 허위정보를 전하진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을뿐더러, 상대가 룬 어를 읽을 줄 알면 낭패를 당하게 될 테니까.

    “과연.”

     마족 사내가 침음을 흘렸다. 로엘의 화법은 무언가 묘하게 사람을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로엘이 공동에서 얻어낸 정보와 레인과 르우벤이 힘들게 몸을 움직여 얻어낸 정보가 더해지니 별 대단한 내용은 없음에도 굉장히 그럴듯하게 들렸다.

     로엘은 한창 정보를 전하던 와중, 지나가듯 말했다.

    “그리고 이 공간은 중계지점의 역할을 하는 게 확실해 보이더군. 다른 곳들과는 다르게 포탈 너머에 어떤 공간이 자리 잡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봐서. 볼 수 있어도 전부 거기서 거기였지만.”

    “확인할 수 있다고?”

    “그래. 포탈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집중해서 보면 흐릿하게 그 너머가 보인다. 직접 확인한 사실이야.”

     그 말에 호기심이 동한 마족 사내가 한쪽에 위치한 포탈로 다가가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그리고, 로엘이 사악한 얼굴을 한 채 그 뒷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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