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타임 트래블러(Time traveler)(2)
로엘은 곧바로 레인에게 지시했다.
“레인. 비기스트 꺼내.”
“뭐?”
“여력 남기는 건 걱정하지 말고, 일단 저쪽을 뚫어.”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다만.”
촤르르르륵.
레인이 사슬낫의 길이를 줄여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순식간에 그림자 속으로 사슬낫이 빨려 들어갔다.
“일단 그 말대로 하지.”
그리고, 그림자로부터 거대한 검 한 자루가 밀려 올라왔다.
두 마왕이 흠칫, 하고 반응했다. 지금껏 그들 추격대를 무던히 괴롭혀 온 최고 원흉 중 하나가 바로 저 거검(巨劍)이었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
검 표면에 압축되는 거대한 기파. 그것을, 레인이 로엘이 가리킨 방향으로 크게 휘둘러 사출했다.
콰드드드드드드!
순식간에 갈려 나가는 마족의 병력. 세 각성자가 단숨에 신형을 날렸다.
“쫓아라!”
“저 기술은 체력을 크게 낭비시키는 종류의 것이다! 포위망을 유지한 채 계속해서 압박해라! 놈들은 독 안에 든 쥐다!”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으니 기세가 죽을 만도 하건만, 마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포위망을 견고히 했다. 상당히 독기에 차 있었다.
로엘이 마력포를 내쏘며 외쳤다.
“계속 뚫어! 저쪽 능선까지만 가면 돼!”
“능선? 저쪽에 뭐가 있길래? 설마 저쪽의 유적 내부로 들어가려고?”
르우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잘못하면 오히려 막다른 길로 몰리는 결과가 나올 텐데.”
레인이 앞을 가로막는 외눈박이 마족을 베어내며 중얼거렸다.
“그것도 그렇지만,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유적으로 뛰어드는 것 자체도 위험해. 하물며 이 시대의 유적은…….”
“거기까지만. 나머지는 들어가고 나서 걱정해. 지금 우리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까.”
로엘이 두 사람의 걱정을 일축했다.
그 자신의 말처럼 선택지가 없으니 어쩔 수 없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저 안쪽으로 들어가면 상황을 타개할 모종의 방도가 생겨날 거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타임 트래블러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유적을 가리킨 것은 아닐 테니까.
“크륵?”
“저것들 설마!”
오래지 않아, 세 사람은 햇빛이 쨍쨍한데도 기이할 정도로 내부가 엿보이지 않는 ‘문’을 앞두게 되었다. 문 테두리는 벽돌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벽돌 하나하나에 복잡해 보이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흡.”
마족들이 한껏 당황에 찬 외침을 토해내는 가운데, 세 사람이 일제히 유적 내부로 뛰어들었다.
“…….”
문 안쪽으로 한 발을 내딛은 순간, 로엘은 자신이 무언가의 흡인력에 의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세 각성자가 안쪽으로부터 불어온 세찬 바람으로 인해 한 차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땐, 굉장히 이질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 *
“저 녀석들, 뭐야? 제정신인가?”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여길 들어가다니.”
두 마왕이 침음을 흘렸다.
세 각성자는 알지 못했지만, 그들이 침입한 유적은 악명이 굉장히 높았다. 오죽하면 대륙 최악의 유적으로 꼽힐 정도였다.
아직 고대 마도 문명의 자취가 상당히 남아 있는 이 시대. 그런 시대에 ‘가장 위험한’ 유적으로 손꼽히는 유적이 평범할 리가 없었다.
워낙 심상치 않은 유적이라 지금껏 공략을 시도한 집단은 많았다. 명성 높은 용병대, 트레저 헌터 클랜은 물론이고 통합 제국에서 직접 파견한 탐사대까지 유적 내부에 발을 들였다.
물론 그들 중 살아서 다시 유적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대륙 최악의 유적이라는 타이틀은 붙지도 않았겠지.
지금이야 마족과의 전쟁으로 인해 그런 것 없지만, 본래는 공략 불가능 판정이 내려져 인간의 진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출입을 제지하는 병력까지 배치되어 있었을 정도였다.
세 각성자는 그런 위험천만한 유적에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않고 무작정 뛰어든 것이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놈들은 잡았나?”
이내 또 다른 마왕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물음에 유적 앞에 서 있던 마왕들이 말없이 입구를 엄지로 가리켰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놈들이군.”
“어떻게 할 거냐. 추적할 생각인가?”
“제정신으로 하는 질문인가? 어차피 죽을 놈들이다. 여기서 멈춰야 해.”
추적을 그만둬야 한다는 갈색 머리칼 여마왕의 주장에 나머지 마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이런 데에서 쓸데없이 전력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단 한 마왕만 빼고.
“아니, 난 들어가겠다.”
그의 정체는 그림자 군주 ‘발레포르’.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검은 뿔과 꼬리. 심지어 복장과 피부색조차 검은 사내였다.
그는 지금은 죽고 없는 마왕 ‘하우레스’와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무리하지 말고 돌아가는 게 어떠냐. 발레포르. 말했듯, 어차피 죽을 놈들이다.”
“놈들은 내 손으로 직접 죽일 것이다.”
“그러다 네가 죽어.”
“죽지 않는다. 이깟 유적 따위엔.”
발레포르는 명백히 이성이 마비되어 있었다.
“…….”
다른 마왕들은 그를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서로의 지위가 동등한지라 이래라저래라할 수도 없었고, 애초에 발레포르는 마왕들 사이에서 기피 받는 존재였다. 하우레스만은 예외였지만 지금은 그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발레포르는 자신을 따라 움직일 병력을 추려냈다. 그 휘하의 병력은 물론, 허무하게 군주를 잃은 하우레스 휘하 병력까지 추격대에 포함되었다.
“들어간다.”
발레포르를 선두로 그들 전원이 차례차례 유적 내부로 발을 들여놓았다.
나머지 마왕들이 고개를 내저으며 각자 휘하 병력을 정비, 추격 종료를 선언했다.
* * *
유적 내부로 들어선 각성자들은 그야말로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그르르르르륵!]
주위를 새까맣게 뒤덮은 이형의 괴물들.
마치 녹아내린 것만 같은 검은 동체. 눈, 코, 입, 귀가 신체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붙어 있어 그로테스크하기 그지없었다.
거기다 유적 자체도 굉장히 괴랄했다. 마치 공간 자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꿀렁이며 모습을 변화시켰고, 이곳저곳에 포탈이 자리 잡고 있어 빨려 들어갔다간 대체 어디로 떨어지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더욱 기가 막힌 건, 이 칠채색 파스텔 톤 공간 내부는 중력도, 시간도 제멋대로라는 것이었다.
어느 지점에선 제멋대로 몸이 반전되기도 했고, 또 어느 지점에선 몸이 두 배로 빨라지거나 느려지기도 했다. 다만 유적 내 괴물들만큼은 그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게 굉장히 짜증 나는 점이었다.
“크으. 둘러싸였다.”
“이 녀석들, 생긴 건 무슨 쓰레기를 뭉쳐 놓은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강해?”
“쯧, 웬만해선 포탈을 이용해 달아나고 싶진 않았는데.”
로엘이 혀를 차며 한쪽에 위치한 포탈을 가리켰다.
언뜻 아무런 규칙도 없이 생성되고 소멸되길 반복하는 것으로 보이는 포탈이지만, 의외로 특수한 규칙성이 있었다. 로엘은 수없이 많은 포탈 중, ‘특정한 주기’에 맞춰 생성되는 포탈만큼은 안전하다는 것을 파악해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포탈 너머로 웬 용암이 끓는 바닥이 존재한다든가 하지만 않을 뿐, 위험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말하자면 최악이 아닌 차악 정도라고 할까.
슈욱!
단숨에 포탈 너머로 전송된 세 각성자.
레인은 주위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일단 참격부터 날리고 봤다. 이곳 유적은 포탈을 넘어가면 높은 확률로 기다렸다는 듯 괴물들이 습격해오곤 했으니까.
콰지직!
아니나 다를까, 무언가를 부수는 감촉이 전해져 왔다. 금세 회복된 기감으로 파악되는 놈의 기척.
이번엔 이형의 괴물이 아니었다. 거대한 언데드였다.
로엘은 딱 보는 순간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일반적인 언데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격을 갖췄으며, 거대한 크기에 용의 머리를 가진 최강의 ‘호위병’.
“용아병(龍牙兵)!”
주위의 배경도 바뀌었다. 어딘가의 동굴 같은 느낌이 났다.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웠고, 공기는 축축하고 눅눅했다. 그렇지만 주위 공간이 제멋대로 구불거리는 건 그대로였다.
“진짜 미쳐 돌아가는 곳이네. 하르넴의 유적도 장난 아니었다만, 여긴 거기보다도 더한 것 같아.”
르우벤이 치를 떨었다. 용아병이라니, 신화에나 등장할 법한 녀석들 아닌가.
[크와아아아아아!]
방금 전 레인의 검격에 허리가 박살 난 용아병이 거대한 포효를 내질렀다. 그리곤 언데드답게 덜그럭거리며 금세 부서진 부위를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크롸아아아아아아!]
그뿐만 아니었다. 마치 포효에 호응하듯 멀리서부터 거대한 다수의 언데드가 내지르는 포효가 들려왔다.
“젠장할.”
“이 유적, 끝이 있기는 한 건가?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 건지조차 모르겠어.”
“…….”
그야말로 끔찍한 유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하르넴의 유적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라도 있었지.
달려드는 용아병들을 레인과 르우벤, 그리고 언데드들이 막아서는 사이, 로엘이 냉정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 유적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요동치는 공간도, 본 적도 없는 마법이 발동되는 함정도, 그 개체의 강함이 상상초월인 가디언들도 아니었다. 다름 아닌 ‘포탈’이었다.
“온다.”
로엘이 생성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주위의 포탈들을 둘러보다, 무언가 알아차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좌측에서 ‘이동식 포탈’이 밀려오고 있어! 빨리 길 뚫어!”
“우아아아!”
르우벤이 마검의 힘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콰아아아아아앙!
뭉클거리는 시커먼 기운에 둘러싸인 마검이 휘둘러지자, 전방에 위치한 모든 것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다 검 표면에 흡수되었다.
“흡.”
레인이 일순 신형을 비틀거리는 르우벤을 들쳐 메고 로엘과 함께 몸을 날렸다.
콰르르르르르!
그리고 그들이 방금까지 서 있던 공간을, 거대한 반구형 포탈이 전차처럼 밀고 지나갔다.
“위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포탈에 빠졌다간 그냥으론 끝나지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야, 저기 공중에 대형 포탈 생긴다!”
“또 갑자기 무슨 대형 괴수가 떨어져 내리는 거 아니겠지?”
하나의 위기를 피해도 계속해서 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유적 탐색의 스페셜리스트인 르우벤, 뛰어난 판단력의 로엘, 강력한 무력의 레인이라는 조합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나가떨어졌을 터였다.
세 사람은 주위의 용아병들을 상대하면서도 새롭게 생성된 포탈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가끔 대형 포탈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 괴수가 튀어나오곤 했으니까.
“여기 있었구나! 버러지들!”
그런데, 이번에 등장한 적은 대형 괴수가 아니었다.
“발레포르?!”
“여기까지 쫓아온 건가!”
콰가가가각!
발레포르가 떨어져 내리며 교차해 내지르는 쌍검을, 레인이 검을 휘둘러 맞받았다. 거슬리는 쇳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다.
그것도 잠시, 발레포르의 신형이 마치 녹아내리듯 자취를 감췄다. 마족 최강의 암살자로서의 권능을 발휘해 그림자 속에 자신의 모습을 감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휘하 군세도 모습을 드러냈다. 포탈을 타고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들 또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여러모로 고초를 겪었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각성자들은 알지 못했지만, 숫자도 이미 3분의 1 이하로 줄어든 상태였다.
“그르르르륵! 죽여라!”
“카학! 하우레스 님을 죽게 한 죄를 묻겠다!”
순식간에 난전이 벌어졌다.
세 각성자는 이를 악물고 전투에 임했다. 안 그래도 정신없는 와중이건만 또 다른 변수까지 등장할 줄이야.
인간과 마족, 그리고 언데드가 한데 뒤엉켜 내지르는 소음이 공동 내부를 가득 메웠다.
혼란의 와중, 그림자 속에서 기회를 노리던 발레포르가 슬금슬금 르우벤의 주변으로 다가갔다. 단숨에 뒤에서 덮쳐 목을 그을 요량이었다.
‘기회!’
마침 르우벤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용아병과 마족들을 떨쳐내기 위해 큰 모션을 취했다. 발레포르는 그림자 속에서 단숨에 뛰쳐나와 르우벤의 목을 향해 쌍검을 휘둘렀다.
“이런 빌어먹을!”
투웅!
로엘이 몸을 날려 발레포르에게 그대로 충돌했다. 상황이 워낙 급박한지라 언데드를 대신해서 부리지도 못했다.
한데, 로엘의 시선이 향해 있는 방향은 발레포르나 르우벤이 있는 쪽이 아니었다. 엉뚱한 방향이었다.
“이놈! 방해하지 마라!”
“야, 이 빌어먹을 새끼야.”
발레포르가 신형을 뒤틀어 로엘을 공격하려 하고, 그에 놀란 르우벤과 레인이 발레포르를 제지하려 달려들고, 로엘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순간.
콰르르르르르르!
순식간에 밀어닥쳐온 반구형 이동식 포탈이, 그들을 포함해 경로상에 놓인 모든 침입자를 집어삼켜 버렸다.
용아병만을 남겨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