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타임 트래블러(Time traveler)(1)
로엘은 아공간으로부터 타임 트래블러를 꺼내 들었다.
‘시간 여행이라니. 말 그대로 타임머신이잖아. 일개 아티펙트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하다고?’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아티펙트의 성능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토록 많은 아티펙트를 활용하는 르우벤마저도 ‘마검’을 손에 넣기 전까진 일개 초인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로엘이 보아온 아티펙트 중, 정말로 규격 외의 물건이라고 할 만한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마검’.
성검의 경우엔 마검, 혹은 마기를 다루는 대상 한정으로만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아티펙트이니 예외였다.
그런데 이 회중시계의 성능은 어떤 의미에선 그 마검조차도 가볍게 상회할 정도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도저히 일개 아티펙트라고는 믿기질 않는 수준.
‘아니, 딱히 아티펙트라는 요소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지.’
대체 시간의 현자, 이 자의 정체가 뭐길래.
“쿠워어어! 여기에 인간이 모여 있었나!”
상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상황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로엘은 이쪽을 발견하고 달려드는 다섯 눈의 근육질 거한에게 마력 탄환을 난사, 벌집으로 만들어 버렸다. 회중시계는 다시 아공간 내부에 수납했다.
‘일단 상황이 마무리되고 나서 다른 녀석들과 상의해 봐야겠군.’
* * *
도시 내부의 마족들이 모두 죽거나 달아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과거에 와 있다는 거지?”
“어쩐지 간혹 생존자와 마주쳐도 대화가 통하질 않더니만.”
“르우벤. 혹시 가진 아티펙트 중에 통역 마법이 담긴 아티펙트도 있어?”
“어, 있어. 잠시만.”
르우벤이 인벤토리 툴에서 팔찌형 아티펙트를 다섯 개 꺼냈다. 지금껏 써먹을 데가 없어 장물 취급을 받고 있던 물건이었다. 각성자 모두가 그것을 배부받았다.
“이걸로 언어의 문제는 대체로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문자까지는 무리겠지만.”
르우벤이 생색을 냈다. 그러자 로엘이 아티펙트를 착용하며 대답했다.
“괜찮아. 글은 내가 쓸 줄 아니까. 아무튼 고마워. 도X에몽.”
“뭐야. 그 호칭은 무슨 의미야. 어쩐지 기분이 나쁜데.”
“그건 그렇고.”
로엘은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어떻게 생각해?”
“솔직히 아직도 믿기가 좀 힘드네. 믿지 않을 수도 없지만.”
“믿고 안 믿고의 문제는 일단 비생산적인 이야기이니 넘어가고. 우리가 정말로 마도 문명 부흥기에 오게 된 거라면,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바르바젠이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무사히 원래 시대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곳에서 얻어 갈 수 있는 게 많을 테니까.”
그의 말에 나머지 각성자들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이 시대의 문명은 미래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질 않는 수준이다. 제한시간 내에 아티펙트가 제시한 ‘조건’의 달성을 이뤄낼 수 있다면, 상당한 소득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시간의 현자가 그 아티펙트를 남겨둔 의도를 모르겠군. 단순 우연인지, 후인에게 기연을 줘서 단련시키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 이외의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지.”
“그래도 일단 이 상황 자체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문제가 되는 건 역시 조건의 달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로엘이 검지를 세운 손을 얼굴 높이까지 치켜들어 시선을 주목시켰다.
“앞으로의 기본적인 행동 방침은 이렇게 잡는 게 좋을 것 같아. ‘인류측에 가세해서 마족의 침공을 막는 데 힘을 보탠다’.”
“이유는?”
“이걸 봐.”
로엘은 아공간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마력을 주입, 그 위로 떠오른 항목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전에 입력되어 있던 시간축으로의 이동이 완료되었습니다.]
“이걸 보고 뭔가 드는 생각 없어?”
“……?”
“우리가 다른 시점도 아닌 ‘마족과의 전쟁이 한창인 와중’의 마도 문명 부흥기에 오게 된 게, 과연 우연일까?”
“일리 있는 말이군. 시간의 현자가 굳이 ‘특정 시점’을 지정해 둔 것엔 무언가의 이유가 있을 거란 건가.”
“확실히 괜찮은 생각이네.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움직이느니, 그런 식으로 가정을 세우고 움직이는 편이 효율적이겠지.”
바르바젠과 카트란은 단숨에 로엘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었다.
“그래서, 저쪽의 생존자들은 어떻게 할 거지?”
레인이 물었다.
민감한 사안인지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들을 살린 것까진 좋은데, 이 뒤가 문제였다.
생존자들로부터 로엘이 정보를 취합한 결과, 이미 마족의 대군은 대륙의 3분의 1 이상을 집어삼킨 상태였다. 지금도 쉬지 않고 정복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현재 이곳 근방 영지는 산맥을 우회해 북쪽에서부터 밀고 들어온 마족의 대군에 대부분 점령당해버린 상태였다.
물론 다섯 각성자가 제 한 몸 지켜가며 인류의 진영으로 향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생존자들을 이끌고 가게 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무리 그들이라도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이곳 도시에 침입해 들어온 마족들은 제대로 된 전력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야, 이미 병력이 빠져나간 무주공산을 약탈하러 들어온 소규모 병대에 불과했으니까. 마왕이 하나 끼어 있긴 했지만.
“뭘 고민해. 데려가야지. 두고 가면 다 죽는데.”
르우벤은 별다른 고민 없이 답변을 내어놓았다. 그다운 발언이었다.
“당연히 데려가야지.”
그리고 로엘도 같은 의견을 내었다. 나머지 각성자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몰렸다.
“뭐야, 왜 그렇게 봐.”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네가 합리적이지 않은 판단을 내리는 일은 드물 텐데.”
“너희들, 대체 나를 어떤 이미지로 보고 있는 거냐.”
로엘은 한 차례 혀를 차곤 말을 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당연히 보호 목적이고. 두 번째는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지.”
“입지?”
“앞으로 우리는 인류의 세력에 힘을 보태게 될 테니까. 이왕이면 그냥 찾아가는 것보다 극적인 연출을 가미하는 게 우리의 가치와 명성, 입지를 높이는 수단이 될 거다.”
“그렇군. 마족에 의해 점령당한 영토에서 극적으로 생존자들을 구출해 인류의 진영에 합류시킨 ‘영웅’. 그런 종류의 타이틀이 필요하다는 거지?”
카트란이 자신이 이해한 게 맞냐는 듯 되물었다.
“맞아. 기반 세력도 뭣도 아무것도 없는 우리가 이곳에서 영향력을 떨치려면 적어도 그런 식의 선전이라도 해야지.”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쉽게 되겠어?”
“원래 영웅이 가장 쉽게 탄생하는 때는 전쟁의 시대인 법이지.”
“그럼 정해졌군.”
각성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딱히 실리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저들을 두고 갈 생각은 없었다.
“생존자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향한다.”
* * *
각성자들은 아직 인류의 전선이 유지되고 있는 남쪽을 향해 시민들을 이끌고 이동을 시작했다.
생존자 중에는 마지막까지 영지에 남아 마족에게 저항하던 병사들과 그 지휘관도 있었다. 그들에게 시민들의 통제를 맡겼다.
이동의 와중에 숫자가 꽤 불어났다. 마족을 피해 숨어있던 인간들이 피난 행렬을 보고 합류한 것이다.
물론, 피난이 순탄치는 않았다. 마왕 하우레스와 그 휘하 병단이 몰살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마족들이 추격대를 편성, 그들의 뒤를 쫓았으니까. 그 병력에 포함된 마왕만 무려 넷이었다.
인간에 비해 신체 능력이 월등한 마족의 군대가 작정하고 쫓아오니 금세 양측의 거리가 줄어들어 갔다.
결국, 각성자들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인원을 나누자.”
“무슨 소리야?”
“나, 레인, 르우벤. 이렇게 셋은 뒤로 빠져 본대의 주의를 끈다. 나머지 둘은 그대로 피난 행렬을 이끌고.”
로엘의 발언에 카트란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위험할 텐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이대로는 다 죽어. 일단 나나 레인, 르우벤은 ‘대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 능하니 충분히 놈들의 주의를 끌 수 있을 거다. 아니, 반드시 끌어 보이도록 하지.”
로엘은 피난 행렬을 쭉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언데드 공중 병단을 사용할까 생각해보긴 했다만, 역시 안 돼. 인원이 너무 많아. 일부밖에 구할 수 없을 거다. 그러니 지금부턴 카트란 네가 고생을 해 줘야겠어.”
“내가?”
“어. 인류의 진영에 다다를 때까지, 네 능력으로 피난민 전원의 신체 리미트를 해제시켜서 이동속도를 높이도록 해. 지금의 너라면 어떻게든 가능하겠지.”
아마 그 반동으로 피난민들이 시달리게 될 후유증이 상당하겠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피난민들을 최대한 많이 살릴 방안은 역시 이것뿐이었다.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아냐?”
카트란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로엘의 말마따나 지금의 그라면 피난민 전원을 그 자신의 ‘영역’에 집어넣어 강화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다만 그것을 오랜 시간 유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해야 돼. 무조건.”
“후우. 알겠어. 어떻게든 해 볼게.”
“물론 우리가 주의를 끈다고 해도 피난민을 습격하는 병력은 존재할 거야. 별동대를 보내오든, 일이 잘 안 풀려서 아예 군대를 분산시켜오든. 그건 바르바젠 네가 막아야 해.”
“그러지.”
바르바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엘은 레인과 르우벤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견 있어?”
“없어.”
“나도. 바로 이동할 거지?”
“어.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까.”
로엘의 아공간에서 본 와이번 세 개체가 튀어나왔다.
[캬아아아악!]
각각 그 위에 올라탄 각성자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결론적으로 말해, 로엘의 작전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추격대의 발을 묶고 그들의 주의를 피난민 행렬에서 멀어지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추격대를 이끄는 지휘관들은 어차피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피난 행렬 추격보단 차후 방해가 될 확률이 높은 인류의 초강자를 제거하는 일에 집중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몇 개의 별동대를 구성해 피난 행렬을 쫓도록 지시하긴 했다. 그 정도는 바르바젠과 카트란이 힘을 합치면 무리 없이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다만 그로 인해 레인과 로엘, 르우벤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거대한 군세가 작정하고 포위망을 구축, 압박해 오니 아무리 그들이라도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도주 경로는 어느새 네파림 산맥 안쪽까지 이어진 상태였다.
“젠장.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
촤르르르르륵!
레인이 사슬낫을 거칠게 휘두르며 욕설을 내뱉었다. 사방에서 달려들던 사족 보행형 마족들이 단숨에 육편이 되어 흩날렸다.
“포위망이 너무 두터워. 공중도 틀어막혔고.”
르우벤이 마검으로 앞을 가로막는 마족들을 썰어내며 첨언했다.
상황이 정말로 심각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포위망에 갇힌 채 말라죽을 판이었다.
“찾았다. 쥐새끼들.”
“더는 달아나지 못한다.”
그런 그들의 앞에, 이번엔 설상가상으로 마왕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둘이나.
“미치겠네.”
르우벤이 혀를 차는 사이, 로엘이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여기서 마왕과 충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저들에게 붙들렸다간, 그사이에 포위망이 완전히 굳혀져 버리기라도 했다간. 그때는 정말로 끝장이었다.
‘활로는 어디냐.’
그런데 이번엔 저쪽에서도 제대로 작정하고 나선 모양이었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
로엘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위를 계속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째깍.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반갑기 그지없는 이명이 귓가에 들려왔다.
로엘은 급히 아공간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고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곧바로 생성되어 한쪽 방향을 가리키는 시곗바늘.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은 비교적 포위망이 옅은 쪽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또 다른 포위망이 구축되어 있었기에 별다른 의미는 없어 보였다.
‘뭔가가 있는 건가? 저쪽에?’
로엘이 내력을 눈에 집중시켰다. 언뜻 활로가 아닌 듯해 보이는 방향이지만, 어쩌면 무언가 있을 지도 모르잖은가.
이내, 그는 근방 지형지물에 교묘하게 가려져 있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