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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화. 서장 (225/249)
  •  226화. 서장

     의식을 잃은 다섯 각성자 중, 가장 먼저 깨어난 것은 레인이었다.

    “……?”

     주위는 칠흑과도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물론 어둠 따위가 레인에게 문제 될 리가 없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장소가 바뀌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로엘 직속 공방에서 다른 각성자들과 회합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다른 녀석들은?’

     기감을 돋워보자, 다른 각성자들의 기척을 찾을 수 있었다. 모두가 축축한 바닥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모양새였다.

    ‘여긴 어디지?’

     이번엔 주위를 둘러보았다.

     축축하고 울퉁불퉁한 돌바닥. 그리고 그 표면에 맺힌 이끼. 천장에는 종유석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그 끝에 이슬방울이 맺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딘가의 동굴인가.’

     레인이 미간을 모으며 우선 나머지 각성자들을 흔들어 깨웠다.

    “으윽. 뭐야?”

    “여긴?”

     자리에서 일어난 각성자들은 주위를 둘러보곤 당혹한 신음을 흘렸다. 대체 의식을 잃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광구(光球 - Light ball)>.

     우선 르우벤이 아티펙트를 이용해 시야를 밝혔다.

     각성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로엘에게로 몰렸다. 아니, 정확히는 로엘의 손에 쥐여진 ‘시간의 현자의 유산’으로 몰렸다. 그 아티펙트가 지금 이 상황이 벌어지게 된 원인이니까.

    “…….”

     로엘은 한참을 심각한 표정으로 아티펙트를 들여다보다가, 다른 각성자들에게 아티펙트 위로 떠오른 정보를 보여주었다.

    [‘타임 트래블러(Time traveler)’가 기동 중입니다.]

    [사전에 입력되어 있던 시간 축으로의 이동이 완료되었습니다.]

    [아티펙트의 기동 가능 횟수가 1회 남았습니다. 재기동시, 원래의 시간축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아티펙트를 재기동하기 위해선 3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아티펙트 기동을 위한 조건 달성 - 0/3]

    [제한 시간 : 10년]

    [제한 시간 내에 재기동이 이뤄지지 않을 시, 아티펙트는 파괴됩니다.]

     레인의 표정이 확 찌푸려졌다.

    “해석 좀 해줬으면 하는데.”

     그는 룬 어를 읽을 줄 몰랐다.

    “해석은 할 수 있는데, 이게 뭔 소리인질 모르겠다.”

     르우벤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전에 입력된 시간 축으로의 이동? 재기동을 위해서 조건을 달성해야 한다니? 제한 시간은 또 뭐란 말인가.

    “조금 당혹스럽긴 하지만, 일단 한 가지 짚어두고 가자. 지금의 상황은 누구의 탓이라거나 그런 게 아니야.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없도록 하자고.”

    “동의한다.”

     카트란이 진중한 얼굴로 말하자 바르바젠이 동의했다. 로엘은 두 사람이 자신을 배려해 주고 있음을 눈치채고 살짝 미소 지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상황부터 파악해야겠지. 아티펙트에 떠오른 정보만으론 한계가 있으니 우선 밖으로 나가자.”

     르우벤의 의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 바깥으로 나온 일행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깎아지른 듯 아찔한 경사를 자랑하는 절벽이었다.

    “일단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인 건 알겠네.”

    “우선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위치부터 파악하자고.”

     파악! 팍! 팍!

     일제히 신형을 날려 몇 번 절벽을 딛고 재도약하는 것으로 정상에 오른 다섯 각성자. 주위를 둘러보던 그들의 눈에, 멀리서부터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는 연기가 보였다.

    “보니까 인공적인 화재인데.”

    “인간이 있다면 지리를 물을 수 있겠지. 가자.”

     재차 이동. 이번엔 아예 르우벤의 본 드래곤을 타고 움직였다.

     이동의 와중, 레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연기의 근원지로 다가갈수록 저것이 단순한 화재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거, 생각보다 화재의 규모가 훨씬 큰데.”

    “전쟁이라도 벌어진 건가? 지금의 통합 제국에서 반란 같은 걸 일으킬만한 세력은 없을 텐데.”

    “지금 눈치챘는데, 여기 네파림 산맥이야. 저쪽은 구 루벨트 왕국령이고.”

    “구 루벨트 왕국령이면 제도와 그렇게 멀지도 않잖아. 저만한 규모의 분란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일행이 속도를 더욱 높였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산맥을 주파해 인간의 ‘도시’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카트란이 당혹한 신음을 흘렸다. 그가 제국의 군단장으로 취임해 각지를 돌아다닌 시간만 4년이 넘었다. 그가 알기로, 네파림 산맥 인근 영지 중에 이만한 규모의 도시가 구축된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도시의 존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그런 게 아니라…….

     화르르르륵!

    “꺄아아악! 사, 살려줘!”

    “아악! 아아악!”

    “크라하하하하!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도시 전역이 불타오르고 있으며, 시민들이 무참하게 살육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악어와도 같은 머리에 인간의 육신을 지닌, 그 크기만 3미터에 달하는 괴물이 어느 여인을 산 채로 씹어 삼키고 있었다.

     다섯 개의 눈을 지닌 대머리 사내가 거대한 도끼를 휘둘러 달아나는 시민을 무참히 토막 내고 있었다.

     온몸이 날카로운 비늘로 둘러싸인 데다 뿔과 꼬리까지 달린 여인이 어느 시민을 붙잡아 순식간에 미라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도시 전역에 온갖 이형의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괴물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다섯 각성자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마족.”

     바르바젠이 섬뜩한 안광을 토해냈다. 그의 시선은 도시의 모든 마족들 중 가장 강력한 기세를 내뿜고 있는 한 청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청년은 새빨간 머리칼과 눈동자, 뿔과 꼬리를 지니고 있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옷을 걸쳤으나,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이 도시의 모든 마족을 통솔하는 인물이 바로 그인 듯했다.

    “지금부터 무슨 일을 해야 할지는 명확하군.”

     레인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일단 여기를 정리하고, 그 뒤에 정황을 파악하도록 하지.”

     나머지 각성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르우벤을 제외한 네 각성자가 본 드래곤의 등 위에서 뛰어내렸다.

     바르바젠의 한쪽 눈이 악마의 그것과도 같은 형상으로 변했다.

     카트란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레인이 그림자로부터 사슬낫 아티펙트를 받아 손에 쥐었다.

     로엘이 아공간을 열어 그 내부에 잠든 언데드들을 쏟아냈다.

     학살의 서막이 올랐다.

     * * *

    [커르르르릉!]

    [퀴이이익!]

    [캬아아아아아아!]

     콰앙! 투두두두두두두! 콰르르르르!

    “쿠왁! 이, 이것들은 뭐냐!”

    “부, 분명 이곳 근방의 병력은 모두 철수했을 터인데!”

     도시 전역에서 살육과 방화, 약탈을 저지르던 마족들이 갑작스러운 언데드의 습격에 당혹한 외침을 토해냈다.

     마충들이 대로를 가로질러 마족들을 깔아뭉개고, 헬 하운드들이 도시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마족들을 주살했으며, 본 와이번들이 공중을 선회하며 마족들을 불태웠다.

    “쿠워어어어!”

     외눈박이 거인의 형상을 한 마족이 헬 하운드 하나를 덥석 붙잡았다. 그대로 으스러뜨리기 위해 손에 힘을 주려는 찰나.

     우뚝.

     마족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헬 하운드가 신형을 뒤틀어 마족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저벅저벅.

     거리를 가로질러 모습을 드러낸 카트란이, 외눈박이 거인의 입가에 덕지덕지 묻은 ‘인간이었던 것들의 잔해’를 응시하며 섬뜩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목.”

    “우, 워억!?”

     쿠웅!

     외눈박이 거인이 무릎을 꿇고 손을 바닥에 짚었다. 그 자세 그대로 자신의 목을 카트란이 있는 방향으로 들이밀었다.

     촤악!

     거인의 목이 떠올랐다. 연녹색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거인의 부릅뜬 두 눈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쿠륵! 이게 무슨!”

    “엔로스바란 님이 저렇게 허무하게!?”

     주위 마족들이 경악한 외침을 토해내는 가운데, 카트란이 또다시 명령했다.

    “이 자리에 있는 전원, 스스로 배를 가르도록.”

     * * *

     한편, 바로 옆 광장에선 레인이 사슬낫을 휘두르며 대규모 살육을 벌이고 있었다. 기기묘묘한 각도로 휘어져 날아드는 사슬낫에 마족이 수십 단위씩 갈려 나갔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주위에 늘어진 수많은 인간의 시신에 레인의 입에서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시신 중에는 어린아이, 노인, 심지어 임산부까지 있었다.

    “이놈! 멈춰라! 나 군단장 아가르단이 너를……!”

    “뭐.”

     콰직!

     급히 광장 안쪽으로 뛰어든 한 마족의 안면을, 레인이 무릎으로 걷어찼다. 단숨에 우득, 하고 고개가 뒤로 넘어가며 꺾였다.

     그러나 마족 사내는 죽지 않았다. 고위 마족이 가지는 고유의 권능을 발휘해 반격까지 했다. 단숨에 주위 사방에 냉기가 몰아치며 쩍쩍 얼어붙기 시작했다.

     아무리 갑작스런 기습에 피해를 입었다지만 그는 ‘마왕’을 보필하는 군단장 중 하나. 인간의 기준으로 치면 초인의 그것에 육박하는 수준의 강자였다.

    “발악하지 말고, 죽어.”

     물론 레인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레인이 사슬낫을 휘둘러 마족 사내의 몸을 칭칭 휘감았다. 그리곤 단숨에 그것을 잡아끌었다.

     콰드드드드드득!

     단숨에 마족 사내의 육신이 수십 토막으로 갈려 나갔다. 냉기의 폭풍이 사그라들었다.

    “이, 이럴 수가!”

    “우웍! 아가르단 님!”

     촤르르르륵!

     사슬낫이 재차 허공을 갈랐다. 공중에서 일자로 빳빳하게 고정된 사슬낫에, 검강이 덧씌워졌다.

     레인이 신형을 크게 뒤틀었다. 그 재앙과도 같은 참격을 맞받게 된 이들은, 급히 광장으로 뛰어들어 오던 군단장 직속 병대였다.

     콰드드드드드드!

     단숨에 수백에 달하는 생명이 갈려 나갔다.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 힘든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광경에, 주위 마족들의 얼굴에 공포심이 어렸다.

     * * *

     적발 적안의 마족 청년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인간을 응시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알 수가 없군. 넌 대체 누구지? 인간의 강자 중 너 같은 녀석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겁 없이 홀로 모습을 드러낸 인간을 응징하기 위해 달려간 군단장과 휘하 병대는, 이미 몰살을 당했다. 온몸이 갈가리 찢겨서.

    “인간인 주제에 권능을 발현한다라. 거기에 그 권능, 어딘가 글라시아 라볼라스의 권능과 닮았단 말이지. 열화판이긴 하지만.”

     마족 청년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휘하 마족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그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요조차 드러나지 않았다.

    “너.”

     인간, 바르바젠은 청년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마족의 언어로.

    “하우레스로군. 내가 아는 하우레스와는 뭔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그렇다.

     청년의 정체는 72마왕의 일원이자 불의 지배자인 ‘하우레스’였다.

     바르바젠이 전생에 ‘먹어치운’ 마왕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나에 대해 아나?”

     흥미로워하는 마왕의 목소리. 바르바젠은 대답 대신 섬뜩하게 웃으며 권능을 발현했다.

     죽은 군단장과 휘하 병대의 시신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혈액. 부글거리며 한데 뭉친 혈액의 소용돌이가, 그대로 날아가 하우레스에게 직격했다.

     쿠콰콰콰콰콰!

    “이번엔 크로셀의 권능?”

     오른손 위에 권능을 덧씌워 혈액의 소용돌이를 받아치며, 하우레스가 중얼거렸다.

     바르바젠의 입이 죽 찢어졌다. 마치 상대와의 재회가 너무 기뻐 견딜 수 없다는 듯, 그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하우레스의 측면으로 순식간에 달려든 그가, 온통 ‘눈’에 휩싸인 팔을 내질렀다. 갈퀴처럼 구부린 손끝에 하우레스가 익히 잘 아는 어느 권능이 담겨 있었다.

     이번만큼은 하우레스도 여유로운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의 두 눈에 믿을 수가 없다는 감정이 실렸다.

    ‘내 권능까지!?’

     마치 짐승의 발톱과도 같은 형상의 검게 타오르는 불길이, 하우레스의 안면에 작렬했다.

     콰아아아앙!

     * * *

     다른 각성자들이 한참 전투를 치르는 사이, 로엘은 생존자들을 한데 모아 그들을 보호했다.

     안타깝게도 그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언데드들이 도시 곳곳을 누비며 마족을 죽이고 생존자를 구출하고 있었지만, 이미 대부분의 시민이 죽고 극소수의 인간만이 살아남은 상황이었다.

     로엘은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정확히는 주위 사방에 늘어선 인간의 거주지를 둘러보며.

    ‘이 건물들의 건축 양식. 본 적이 있다.’

     그래, 본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역사서’에서.

     그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이 보호하고 있는 한 노인에게 물었다. ‘고대어’로.

    “어르신. 혹시 지금이 몇 년도인지 아십니까?”

    “몇 년도냐고?”

     노인이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서도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내어놓았다.

     노인의 답변을 전해 들은 로엘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노인이 똑같이 고대어로 답변해 왔다는 것도 기가 막힌 일이었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확실하다.’

     지금 이 순간, 스스로 세우고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가설에 확신이 더해졌다.

     참으로 빌어먹게도.

    ‘여기는, 과거다. 시간의 현자의 유산이 우리를 과거로 보낸 거야.’

     그렇다. 로엘을 비롯한 각성자들은, 지금 과거에 와 있었다.

     그것도 마족과의 전쟁이 한창인 ‘마도 문명 부흥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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