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전후(戰後)(4)
“……!”
로엘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가 아공간을 열어 시간의 현자의 유산, ‘타임 트레블러(Time traveler)’를 꺼내 들었다.
“왜 그래?”
“잠시만요.”
플로라의 의아한 얼굴을 뒤로하고 아티펙트를 살피는 로엘. 이내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아티펙트 기동을 위한 조건 달성 - 4/5]
시곗바늘 움직이는 소음이 들리기에 다섯 번째 조건이 충족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눈앞에 떠오른 항목으로부턴 이전과 달라진 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로엘은 혹시나 싶어 플로라에게 물었다.
“혹시 시곗바늘 움직이는 소리, 들리지 않았나요?”
“시곗바늘 움직이는 소리……?”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반문하는 플로라.
로엘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방금 전의 이명은 자신에게만 들렸다는 것을.
‘그렇다면 소음의 근원지는 이 아티펙트가 분명할 텐데.’
시곗바늘 움직이는 소리는 ‘조건 달성’ 시에만 들려오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로엘이 미간을 모으며 아티펙트 위로 떠오른 항목을 요모조모 살폈다. 그렇지만 역시 바뀐 점은 보이지 않았다.
‘알 수가 없군.’
결국, 그는 아티펙트를 다시 아공간에 수납하기로 했다.
어쩌겠는가. 아티펙트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작동하는지도 명확히 밝혀진 게 전혀 없는데.
대체 이 아티펙트는 무슨 목적으로 제작된 것일까. 하다못해 시곗바늘조차 없어 평범하게 시간을 확인하는 용도로도 사용하지 못하…….
“어라.”
아티펙트를 쥐고 옮기던 로엘의 손이 멈칫했다.
“시곗바늘?”
분명 없었을 터인 시곗바늘이 흐릿하게 생성되어 있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시곗바늘이었다.
로엘이 살짝 감탄사를 흘렸다. 아티펙트 위로 떠오른 항목만 살피느라 정작 아티펙트 자체의 외적인 변화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아티펙트에 마력을 주입해 보았다. 그러자 흐릿하게 남은 형상마저 사라져 가고 있던 시곗바늘이 금세 또렷해졌다.
휘릭.
온전한 형상을 이룬 시곗바늘이 회전했다. 3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로엘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챘다.
‘나침반, 아니 네비게이션의 역할을 하는 건가.’
과연 시계를 수평으로 눕혀 손에 올린 채 빙글빙글 돌려 봐도 시곗바늘은 정확히 한쪽만을 가리켰다. 마치 이쪽으로 가라고 유도하듯.
[캬아아악!]
로엘이 와이번을 조종해 방향을 선회시켰다.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그 시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면 뭔가 있는 거야?”
“글쎄요. 어쩌면 고대의 유물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죠.”
“오!”
플로라의 눈빛이 반짝였다. ‘숨겨진 유물’이라는 말에는 어딘가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시곗바늘을 주시하며 이동하길 잠시. 로엘은 시곗바늘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가 싶더니 다시 반대쪽을 가리키며 재생성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가 곧바로 본 와이번을 선회시켜 시곗바늘이 ‘사라졌었던’ 위치로 되돌아갔다.
“여기가 목적지인가 보네요.”
“아무것도 없는데?”
“잠시.”
로엘이 수평으로 눕혀 뒀던 시계를 세로로 세웠다. 그러자 사라졌던 시곗바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은, 아래쪽이었다.
“조금 도와주시겠어요? 호수 안쪽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그래.”
두 사람이 동시에 본 와이번에서 뛰어내렸다. 플로라의 염력 장벽이 주위를 둥글게 뒤덮었다.
풍덩!
* * *
“일단 계속 아래쪽으로 내려가야겠네요.”
“알겠어.”
두 사람의 신형이 천천히 물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내 사위가 짙은 어둠에 잠겼다.
로엘이 아공간에서 빛 계열 마법이 담긴 소모성 아티펙트를 꺼내 발동시켰다. 주위가 밝아지고, 아름다운 수중 생태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빛에 이끌린 물고기들이 염력 장벽 주위를 맴돌았다.
“꽤 깊네.”
“아무래도 계속해서 내려가야 하나 보네요. 정말로 확신을 지니고 탐사하는 게 아닌 이상 발견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모양이에요.”
기대감이 높아졌다. 이미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을 가능성이 낮다는 뜻이 아닌가. 게다가 이렇게 공을 들여 숨겨놓을 장소, 혹은 물건이라면 필시 그 가치가 대단하리라.
물론 경계심을 늦추진 않았다. 위험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바닥이 보이는데.”
“도착한 모양이네요.”
로엘은 또다시 시곗바늘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바닥을 쭉 훑었다. 분명 이곳에 무언가 있을 터.
플로라의 염력이 사방을 두드리고, 로엘의 언데드 ‘마충’이 주위를 헤집고 다녔다. 오래지 않아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오.”
마충 한 개체가 지나가면서 무너뜨린 거대한 돌무덤 안쪽으로, 무언가의 마법진이 새겨진 보석 같은 것이 보였다. 곧바로 플로라가 염력을 이용해 돌무더기를 치워 냈다.
“어때?”
“마력을 흘려 넣으면 발동하는 종류의 물건인 것 같네요. 함정일지도 모르니 일단 염력 장벽을 조금 두껍게 해두실래요?.”
“응. 잠시만.”
장벽이 강화되고, 로엘이 펼친 영역 지배의 범위에 보석이 들어왔다. 보석에 새겨진 마법진이 푸른 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바닥이 진동했다. 플로라가 염력 장벽째로 신형을 바닥으로부터 띄웠다.
쿠르르르르르르르.
바닥 한편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무언가의 입구로 보이는 ‘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봐도 인공적으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는, 화려한 장식이 새겨진 철제문이었다.
“들어갈 거지?”
“네.”
로엘은 손도 대지 않았는데 저 스스로 열리는 문을 응시하며 플로라의 물음에 답했다.
문 안쪽에는 투명한 막이 펼쳐져 물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험 삼아 먼저 집어넣어 본 언데드가 아무런 저항 없이 막을 통과해 들어갔다.
로엘과 플로라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문 안쪽으로 진입,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언가의 통로 같네.”
“일직선으로 이어진 통로네요. 별다른 특색은 없고, 널찍하고.”
로엘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으로 통로가 향하는 방향을 가늠해 보았다.
‘이 방향이면, 구(舊) 노러츠 왕국령인가?’
일단 나아가 보기로 결정한 두 사람이 주위를 경계하며 걸음을 옮겼다.
통로는 어두웠다. 빛 계열 마법이 담긴 아티펙트가 아니었다면 시야를 확보할 수조차 없었을 터였다.
걸음을 옮긴 지 얼마나 지났을까.
통로의 한쪽 외벽에 조금 의심스러운 홈이 패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바닥에 남은 흔적으로 미루어보아, 본래는 감쪽같이 가려져 있던 것이 오랜 세월이 흐르며 풍화된 모양이었다.
플로라가 원거리에서 염력으로 그것을 자극해 보았다.
쿠쿠쿵! 쿵! 콰과과과광! 콰르르르르릉!
일차로 바닥이 덜컹, 하고 열리고 그 내부에 세월에 풍화된 창의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으론 천장에서 함정에 딱 맞는 크기의 석벽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계 마법과 전격 계열 마법이 순차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와. 함정 한번 끔찍하네.”
플로라가 실없는 감탄사를 내뱉을 무렵, 로엘은 미간을 살짝 모았다.
‘뭐지?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양식의 함정인데.’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이 통로를 가장 효율적으로 주파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뒤로도 통로를 나아갈 때마다 온갖 함정이 나왔다. 악랄하기 그지없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다만 통로 자체가 세월의 흐름에 상당히 풍화되었고, 거기에 로엘과 플로라가 노련하게 대처하기도 했기에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가 된 것은, 통로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거 대체 언제까지 가야 해?”
“그러게요.”
로엘이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플로라의 얼굴에는 이미 지겹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건 길어도 너무 길지 않은가. 오로지 함정밖에 존재하지 않는 원 패턴 통로라 돌파 자체에 그렇게 큰 어려움은 없지만, 이렇게까지 길면 체력과 정신력의 소모를 무시할 수가 없게 된다.
잠시 고민하던 로엘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역시, 이런 때엔 돈으로 밀어붙여야겠죠.”
“돈으로?”
딱.
로엘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아공간 내부로부터 마충 다섯이 쏟아져 나왔다.
[퀴이이이익!]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 이곳 통로는 키메라나 가디언은 없고 함정만이 일정 구간마다 존재하는 원 패턴 던전이니, 그냥 이 녀석들로 밀어버리면 되겠죠. 함정이고 뭐고 다 몸으로 때우고 지나가라고. 그러다 부서지면 새로운 녀석 꺼내고.”
다섯 마충이 일렬로 늘어서자 통로가 꽉 들어찼다. 그대로, 진격.
쿠르르르르르르르르!
쾅! 콰르르르! 꽈르르릉!
콰득! 콰과과곽! 쇄액! 쿠콰콰콰쾅!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소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로엘이 곧바로 신형을 날리고, 플로라가 헛웃음을 흘리며 그를 뒤따랐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쾌속하게 통로를 주파하기 시작했다. 함정에 빠지거나 타격에 부서진 마충의 빈자리를 새로운 마충으로 메꿔가며.
* * *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두 사람은 결국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통로의 끝에 다다랐다. 통로의 끝에는, 마력 구동식 회전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로엘이 기감을 돋워 주변을 체크하고, 플로라가 염력으로 주위 이곳저곳을 건드려 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해,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제서야 두 사람이 회전문 앞에 나란히 서서 마력을 주입했다.
쿠르르릉.
회전문, 그리고 회전문에 연결된 대지가 소음을 일으키며 빙글 돌았다. 벽 너머로 이동된 것이다.
로엘과 플로라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장소에 서게 되었다.
“유적이다!”
“…….”
플로라가 환호했다. 반면 로엘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황당한, 동시에 허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쩐지 함정의 구조양식이 낯설지가 않더라니.”
낯익다고 생각하면서도 떠올리지를 못했다. 과거에 경험했던 ‘그것들’과는 달리 잔뜩 풍화된 함정들인지라 머릿속으로 매치가 되질 않았던 것이다.
“왜 그래?”
“돌아가죠.”
“돌아가자고? 어째서? 기껏 여기까지 와서 유적 공략 안 해?”
“안타깝게도, 여기 이미 공략된 유적이에요. 정확히는 제가 포함된 네 명의 그룹이 여길 털었었죠.”
“뭐?!”
플로라의 경악한 외침을 뒤로하고, 로엘이 자신이 들어온 비밀통로를 돌아보았다.
“이전에 왔을 땐 유적 첫 번째 지하 공동에 저런 비밀통로 같은 게 존재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대체 여기가 어디기에?”
“여기가 바로 그 대영웅 하르넴의 유적이에요.”
“……!”
“제대로 낚였네.”
그렇다. 이곳은 바로 과거 세 각성자와 밀리아가 힘을 합쳐 공략했던 영웅과 악마의 유적이었다.
로엘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제대로 시간과 돈, 체력을 낭비했다. 이게 무슨 생고생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때.
째깍.
시곗바늘 움직이는 소음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로엘이 미간을 모으며 아공간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회중시계에 마력을 주입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시곗바늘이 생성되어 공동의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로엘이 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겨 시곗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위치를 올려다보았다.
이내 로엘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벽화들 사이에서 누군가 일부러 새겨 놓은 듯한 글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룬 어였다.
[방금 지나온 통로의 존재. 기억하고 있을 것.]
“대체 뭐야.”
로엘은, 이제는 시곗바늘이 사라진 회중시계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시간의 현자. 그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 물건을 남겨두었단 말인가?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미래를 대비해가는 나날.
통합 제국은 순조롭게 안정화되어 갔다. 강력해져 갔다. 다가올 암울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준비를 착착 갖춰갔다.
어느새 다섯 각성자의 나이도 스물일곱에 다다랐다.
마족의 대륙 침공까지는, 이제 단 3년밖에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