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전후(戰後)(1)
푹.
주사기가 혈관을 파고 들어갔다. 조금씩 비워져 가는 내부의 액체.
이내, 나노머신의 주입을 끝마친 로엘이 이나벨의 팔에서 바늘을 뽑아냈다.
“되었습니다.”
“묘한 느낌이군. 누군가에게 생사여탈권을 넘기는 기분은.”
이나벨이 바늘 자국 위로 포션을 한 방울 흘리며 중얼거렸다.
“의외로 덤덤하시군요.”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기괴한 물건까지 집어 넣어가며 나를 구속하려 든다는 건, 반드시 나를 살려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까. 포로로 잡힌 적측 수괴의 신분에 이 정도 대우면 과분하지.”
“그걸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군요.”
로엘이 큭큭 웃었다.
역시 범인과는 크게 다른 사고방식을 지닌 여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 줄이야.
“자, 이제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군.”
“물론 답변해 드려야죠. 우선, 제국이 ‘연합군’이 아닌 공작님에게 초점을 맞춰 전쟁을 준비한 것은 맞습니다.”
“역시 그렇군.”
“저, 아니. ‘저희’는, 오래전부터 대륙을 통합하기 위한 준비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공작님의 존재에 대한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위험인물이라는 판단을 내렸지요.”
“우연히?”
“네. 우연히.”
그렇다. 지독한 우연이다.
회귀자의 존재, 그리고 그 회귀자로 인한 고급 정보의 홍수. 이것만큼 기막힌 우연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뭐 우연이라곤 해도,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는 행운 같은 거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사실 공작께서 부친을 암살하고 본격적으로 정치계에 뛰어드셨던 때. 그즈음에 몇 번이고 그쪽을 실각시키기 위한 수작을 부렸었지요.”
“!”
부르클린 공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과거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협했던 정체 모를 세력의 정체가 밝혀져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정말로 놀란 부분은, ‘부친을 암살했다’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견제를 별다른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전부 물리쳐버리시더군요. 제국이 공작님을 본격적으로 경계하기 시작한 게 아마 그즈음부터였을 겁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공작님께서 생각하시고 계신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라고 해두지요.”
“무서운 인간이로군. 너, 아니 ‘너희’라고 해야 하나.”
로엘은 빙긋, 하고 웃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가 본론입니다만.”
“?”
“공작님을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살려두고, 활용하려는 이유에 대해섭니다. 잠시 손을 좀 내밀어 주시겠습니까?”
이나벨이 의아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로엘은 아공간에서 ‘운명의 현자’의 유산을 꺼내 그 손 위에 얹어주었다.
파앗!
아티펙트의 마지막 사용 횟수가 차감되었다.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크리스탈.
그 순간, 이나벨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영상’이 있었다.
* * *
대륙 곳곳에 72개의 문이 열린다. 그 문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마족의 군세.
마족의 대군은 강력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한 인간의 군대를 무참히 깨부수고, 그들의 국가를 철저히 유린했다.
인간도, 아인종도. 그들의 한 끼 식사 거리로 전락했다. 그들이 구축한 문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피와 살육, 그리고 투쟁으로 점칠된 마족의 문명이 자리를 잡았다.
마족의 대군이 내지르는 포효가. 그들이 짓밟고 지나간 인간의 백성들이 내지르는 절규가.
그 모든 광경이 수없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며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던 와중.
갑자기 장면이 전환되었다.
뒤늦게 시작된 인류의 반격.
영웅의 등장, 그리고 활약.
치열한 혈전. 그리고, 수많은 죽음.
피가 강이 되어 흐르고 양측의 전력은 계속해서 줄어만 가는 가운데, 양측의 운명을 가를 마지막 결전이 다가왔다.
끝내 승리를 거머쥔 세력은 인류. 이후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한 마족의 대군을, 인류는 무자비하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모든 마족이 그들의 세상 ‘마계’로 자취를 감추고, 대륙 전역에 자리 잡은 ‘포탈’이 사라졌다. 대륙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 평화는 너무나도 많은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대륙은, 그리고 인류는 이 전쟁으로 인해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었다.
또다시 장면이 전환되었다.
이번에는 웬 늙수그레한 노인의 얼굴이 비쳐 졌다. 노인은 담담한 어조로 무언가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대어가 아닌 룬 어로 긴 이야기를 들어놓는 노인. 그는 때론 무언가의 자료를 가져다 보여주며 자신의 말을 증명했고, 때론 ‘그들’의 위험성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했다.
노인은 오래지 않아 모든 설명을 끝마쳤다. 그는 잠시간 뭐라 표현하기 힘든 표정으로 이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영상이 종료되었다.
* * *
“감상이 어떻습니까?”
“그런가. 제국은 이걸 대비하고 있었군. 날 살려두려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고.”
로엘은 미소 띤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이해했다는 뜻이었다.
“이것 참.”
이나벨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제야 자신이 왜 그토록 처참하게 패배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들’에게 있어 자신은, 그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거쳐 가야 할 하나의 장애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있는 미래가, 향해 있는 시선의 높이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이길 도리가 없지 않은가.
“말씀드렸죠. 저희는 공작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공작님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다고.”
“…….”
“공작님이 원하시는 것, 모두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가문의 명성을 대륙 전역에 떨치고 싶다? 그렇게 할 수 있게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쥐고 싶다? 쥐여드리겠습니다.”
“…….”
“대륙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 달성할 수 있도록 충분한 무대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체내에 주입된 나노머신?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얼마든지 제거해 드리겠습니다.”
이나벨은 눈앞의 사내가 내뱉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그것이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것 또한.
“부귀, 영화, 권력, 명성, 위업. 그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그 재능을 발휘하십시오.”
로엘은 말했다.
누구보다 적에게 잔혹한 방식의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재능을 지닌 여인에게.
같은 인간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서 누구보다 잔인할 수 있기에, 마족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서는 그보다도 더욱 잔인해질 수 있는 여인에게.
인류를 동등한 지적 생명체로 여기지 않고 온갖 반인륜적인 짓을 태연히 저지르는 마족들에게 그들의 방식대로, 혹은 그보다 더한 방식으로 되갚아 줄 수 있는 여인에게.
대(對) 마족전 최강의 책사에게.
“마족과의 전쟁에서.”
인류의 승리를 위해 공헌하라고.
* * *
연합군의 항복을 받아낸 제국군은 그 여세를 몰아 바트레인과 노러츠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각지의 영주들이 반발했지만, 그들의 힘으로는 제국군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두 왕국을 평정한 제국이 다음 타깃으로 삼은 국가는 르페인이었다. 남은 세 국가 중 지리상 홀로 외롭게 떨어져 있는 국가였다.
제국군은 군세를 넷으로 나눠 그중 셋을 진격시켰다. 서, 남, 북쪽에서 한꺼번에 몰아치는 제국군에 의해 르페인 왕국은 순식간에 궁지에 몰렸다.
그런데 그때만을 노렸다는 듯, 벨리아 왕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토우런트 왕국군이 국경을 넘어 구(舊) 바트레인 왕국령으로 진격해 왔다. 제국의 신경이 르페인 왕국에 집중된 사이 그 뒤를 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레인과 카트란이 이끄는, 조금은 빈약하다고도 할 수 있는 수비군이 그들의 앞길을 철통같이 가로막았기 때문에.
물론 아무리 그 두 사람이 이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병력이 부족한 만큼 수비군이 언제까지고 왕국군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정도면 제국이 르페인 왕국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르페인을 완전히 평정한 제국군은 곧바로 기수를 돌려 토우런트 왕국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방어를 뚫고 진군해 영토를 확보하려 했던 토우런트와 벨리아의 연합군은, 공세를 거두고 국경지대 안쪽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이번엔 제국군이 진격해 국경을 두드렸다.
양측 군대의 격차는 압도적이었다. 토우런트와 벨리아의 연합군은 그야말로 악전고투했다.
다행히 토우런트 왕국은 북쪽으로는 펠라키 산맥이, 동남쪽으로는 대호수가 위치해 있는 탓에 제국과 인접해 있는 영토가 한정적이었다. 그렇기에 르페인 왕국과는 달리 어떻게든 제국군을 막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하염없이 이어질 듯했던 양측의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제국 측에서 일단 군대를 물린 것이다.
그리고, 연합군의 힘겨운 저항을 한순간에 무위로 돌려버리는 강력한 한 방이 후방에서 터졌다. 바로 대수림과 인접한 벨리아의 국경지대로부터.
* * *
로엘은 이전에 엘리제와 대화를 나누면서 간단히 언급했던 계획을 그대로 실행했다.
[대수림을 경유해서 벨리아 왕국의 뒤를 친다.]
다만 이왕 하는 것, 계획에 살을 조금 덧대기로 했다.
제국군의 본대는 토우런트 왕국의 국경을 두드리게 했다. 그리고 수인족에게 벨리아 왕국 국경까지 진군해 긴장감을 조성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로써 벨리아 왕국의 전력은 완전히 두 곳에 집중되게 되었다. 토우런트 왕국의 국경, 그리고 벨리아 북서부 국경.
덕분에 로엘이 이끄는 제국군은 손쉽게 벨리아의 남동부 국경을 돌파할 수 있었다. 왕국 내부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된 것은 물론이었다.
벨리아 왕국에 침입한 제국군은 군대의 통일성이 낮았다. 움직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빼돌릴 제국군의 숫자를 제한한 탓이었다. 나머지 전력은 이곳저곳에서 충원했다.
우선 회유에 성공한 바트레인 군의 일부를 동원했다. 엘프의 왕국, 엘븐하임을 방문해 그들의 여왕과 추가적인 교섭을 나누고 정령 병단을 지원받기도 했다.
그 병력에 로엘의 언데드와 전투팀이 더해지니 꽤 괜찮은 수준의 군대가 완성되었다. 적어도 병력이 여기저기 분산된 벨리아 왕국을 꿰뚫는 창으론 충분할 정도였다.
경악한 벨리아 왕국 상층부는 급히 북부의 병력을 불러들여 제국군을 막으려 했다. 그 와중에도 병력 ‘전부’가 아닌 ‘일부’를 불러들이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 로엘을 웃게 만들었다.
제국군은 본래 작전과는 다르게 왕국군을 피하지 않고 그들과 정면으로 맞붙었다. 안 그래도 분산된 군세를 또다시 분산시켜 보내줬는데, 이걸 격파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양측은 드넓은 평야 지대에서 마주해 회전(會戰)을 벌였다.
벨리아 군은 군대의 통일성이 낮은 제국군을 보고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했다. 비슷한 규모의 군세라면 군대의 통일성이 높은 쪽이 회전에서 유리한 게 당연하니까.
그런데, 제국군이 여기서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바로 ‘이나벨 펠 부르클린’이라는, 회전의 스페셜리스트를.
그녀는 신들린 지휘 능력을 발휘, 벨리아 군을 무참하게 격파해 버렸다. 마치 제국군과 회전을 벌이지 못했던 한을 풀려는 것처럼.
이후 제국군은 보무도 당당하게 수도로 진격, 왕궁을 점령하고 왕족을 확보했다. 사실상 벨리아 왕국이 끝장나는 순간이었다.
* * *
벨리아 왕국의 수도를 점령한 제국군은 며칠간 휴식을 취한 뒤, 토우런트 왕국으로 진격해 왕국의 후방을 교란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토우런트의 국경을 수비하는 연합군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들 중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는 벨리아 군의 전투 의지가 크게 꺾여버렸으니 당연했다.
동쪽에선 강대한 전력을 자랑하는 제국군의 본대가 쉴 새 없이 성벽을 두들기고, 서남쪽에선 로엘이 이끄는 제국군이 온갖 분탕질을 치는 상황. 이쯤 되니 토우런트 왕국도 버틸 도리가 없어졌다.
오래지 않아, 제국군은 토우런트 왕국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대로 군세를 밀고 내려가 벨리아 왕국의 모든 영지를 평정하는 데엔 추가로 보름이 소요되었다.
때는 11월. 어느새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다가왔다.
대륙통합 전쟁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