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바트레인의 여공작(5)
추가 지원군이 도착했다.
이번 지원군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공간의 현자 ‘엘리제 파르테인’.
“마침 잘 오셨습니다. 포로의 처리가 곤란하던 참이었거든요.”
로엘이 웃는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엘리제 파르테인은 특유의 무감정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포로들을 가둬둔 임시 수용소를 향해.
수용소 내부엔 노러츠의 국왕을 비롯한 왕족, 그리고 고위 귀족들이 있었다. 초인과 초월자를 비롯한 최상위 전력들도 약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엘리제 파르테인은 그들 중 왕족만을 먼저 골라내 공간문에 밀어 넣었다. 인원수가 마냥 적지만도 않은 탓에 모두 옮기려면 며칠은 걸릴 듯했다.
이후 두 사람은 왕궁 내부에 마련된 응접실로 이동, 테이블에 마주 앉아 찻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눴다.
“재진격은 언제부터야?”
“이틀 뒤입니다. 병사들의 휴식과 정비가 마무리된 뒤엔 바로 움직일 겁니다.”
“빠르네.”
“아공간으로 보급 문제를 대부분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로엘이 빙긋 웃었다.
시간 싸움의 와중이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엠페러 아이즈에서 정보를 보내왔던데.”
“저도 전해 들었습니다. 벨리아 왕국 말이죠?”
벨리아 왕국. 여태까지 사국 동맹이 제국을 막아내 주기만을 바라며 웅크리고 있던 겁쟁이 국가. 엠페러 아이즈에서 그 벨리아 왕국이 모종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을 전해왔다.
사국 동맹이 무너지고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이다. 그런데 벌써 움직임이라니. 어지간히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토우런트 왕국과 연수하려고 하는 모양인데.”
로엘은 훗, 하고 웃었다. 그 정도 변수쯤이야 딱히 대단한 고민거리도 아니다. 아니, 그렇게 나와준다면야 이쪽은 더 좋다.
“무슨 생각이 있어?”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벨리아의 이도 저도 아닌 대처방식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상당히 많으니까요.”
움직일 거였다면 진작에 움직였어야 했다. 지금 벨리아 왕국이 보이고 있는 움직임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제국군이 벨리아 왕국을 공략할 방법이라면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몇 가지나 있었다. 이를테면 노러츠와 바트레인을 정리한 뒤, ‘대수림’을 통해서 벨리아로 곧장 진격해 들어가 버린다든지.
“대수림?”
“그들은 제국과 엘프의 왕국이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까진 알지 못하니까요.”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벨리아 왕국의 주의가 서북부의 대밀림과 동북부의 토우런트에 몰려 있는 사이에 동남부의 대수림에서 치고 올라가 버린다니.
문득, 그녀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이번 사국 동맹을 상대하는 작전도 그렇고, 적의 뒤를 치는 작전을 유난히 좋아하는구나, 너는.”
“그게 상대가 가장 싫어할 것 같은 작전이니까요.”
“…….”
엘리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가늘게 만들었다.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눈앞의 이 사내는 성격이 상당히 나쁘다.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부드러운 겉모습과는 다르게.
“왜 그런 눈으로 보시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로엘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엘리제가 고개를 저었다.
하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딱히 무슨 연인 사이도 아니고, 이쪽이 상대의 성격까지 신경 써야 할 이유는 없겠지.
* * *
노러츠의 수도를 정리한 제국군은 그대로 바트레인으로 진격했다.
수도와 왕실을 모두 털어버린 이후론 노러츠 왕국군의 기세가 크게 수그러들었다. 길을 막아서는 병력은 그다지 없었고, 그나마 막아서는 이들도 금세 분쇄해 버렸다.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온 바트레인의 국경.
“와, 왔다! 제국군이다!”
“여기서 저들을 막아야 한다! 밀리면 우리의 가족 친지들이 위협받는다! 죽기 살기로 막아라!”
성벽 위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음. 미리 공중 병단으로 저들의 규모를 가늠해 뒀던 로엘은 주저 없이 말했다.
“그대로 공격합니다.”
“조금 휴식을 취하고 나서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급하게 주변 영지에서 병력을 끌어모은 터라 적측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게다가 오합지졸이지요. 별다른 무리는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두두두두두두!
멈추지 않고 돌진하는 제국군. 오래지 않아 충돌이 일어났다.
그 시작을 알린 것은 바로 로엘이 특별히 제작한 언데드. ‘마충’.
쿠르르르르르! 콰아아아아앙!
“언데드의 등을 타고 올라가라!”
“단숨에 성벽을 넘는다!”
항마 장벽을 그대로 들이받고 멈춘 마충. 곧바로 말을 버리고 마충들의 등을 타고 올라가는 전투팀과 로열 나이츠.
그들을 제지하려는 바트레인 군을, 공중 병단이 허공을 선회하며 방해했다.
푸화학! 쐐액!
“크악!”
“아아악!”
본 와이번들이 내쏘는 브레스에, 하늘 위에서 날아드는 저격에 픽픽 쓰러져 나가는 바트레인 군.
그 구성원 전원이 초인 이상의 실력자인 전투팀 트레이터스를 선두로, 제국군이 빠르게 성벽을 장악해 나갔다.
“성문을 장악해라!”
“기병들이 통과할 수 있도록 성문을 열어라!”
사국 동맹을 믿고 노러츠를 견제할 후방의 병력을 대거 긁어모아 전방으로 보낸 바트레인이다. 노러츠와 맞닿은 국경지대에 배치된 병력은 턱없이 빈약했다.
오래지 않아 성문이 제국군에 장악되고, 기병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무하리만치 빠르게 결판이 났다.
제국군은 단 한 번의 전투로 국경을 돌파, 짧은 휴식을 취한 뒤 곧바로 바트레인의 수도를 향해 달려 나갔다.
* * *
한편 연합군을 이끌고 회군하던 이나벨 펠 부르클린 공작은, 집요하리만치 발목을 붙드는 제국군 탓에 스트레스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총사령관님. 지난밤 습격으로 인한 피해 보고입니다.”
“그쪽에다 두고 가도록.”
“예.”
부관이 경례를 붙이고 막사 바깥으로 나가자, 이나벨이 피로에 절은 눈을 비비며 의자에 파묻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
그녀는 보고서를 손에 쥐고 그 내용을 꼼꼼히 확인했다.
보나 마나 복장 터지는 내용이 적혀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성격이 그것을 용납지 않았다.
“후우.”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난 이나벨이 막사를 나섰다.
그녀가 진군할 것을 명했다. 병사들이 곧바로 임시 진영을 정리하고 명령을 수행했다.
이제는 토우런트와 르페인의 군대가 빠져나간 연합군이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나벨은 머리를 꾹꾹 누르며 앞으로의 일을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국이 제국군에 털리면서 멘탈도 함께 털려버린 노러츠의 지휘관을 어떻게든 설득할 수 있었다. 이마저도 먼저 수도에 입성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겠지만.
일단 강행군을 거듭하더라도 어떻게든 수도에 한발 빠르게 입성해야 했다. 그리고…….
“총사령관님!”
안타깝게도, 그녀의 상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를 전해오는 부관 때문에.
“무슨 일이지?”
“기습입니다! 아군의 선두를 제국군의 별동대가 좌측에서 기습해 왔습니다! ‘천검제’가 포함된 별동대라고 합니다!”
“빌어먹을 공중 병단.”
이나벨이 이를 갈면서도 곧바로 부관에게 모종의 명령을 내렸다. 부관이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급히 신형을 날렸다.
제국군 별동대는 그야말로 시도 때도 없이, 온갖 방향에서 기습해 오고 있었다.
다름 아닌 공중 병단의 활약이었다. 걸핏하면 별동대가 비행형 몬스터를 타고 이동, 연합군이 지나갈 경로에 미리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해 오는 것이었다.
그놈의 공중 병단만 아니었더라도 진작에 제국군을 뿌리쳤을 터였다. 연합군 입장에선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심지어 별동대에 툭하면 초월자가 끼어 있기까지 했다. 당장 지금만 해도 대륙 최강급 전력인 천검제가 모습을 드러냈다지 않은가.
“별동대가 물러났습니다.”
오래지 않아 전방의 소식이 전해져 왔다. 애초에 큰 피해를 입히는 것보단 시간을 끄는 게 목적인 별동대인 만큼, 허무하게 물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 그럼 곧바로 다시 진군한다.”
“예.”
부관은 부상병들에 대한 보고를 올리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지금의 연합군에는 부상병까지 챙겨갈 여유가 없었다. 버리고 가야 했다.
방금 전 총사령관의 지시에는 그런 의미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 * *
연합군은 계속된 제국군의 견제를 뚫고 결국 수도에 다다랐다.
국내로 깊숙이 진입할수록 제국군을 따돌리기가 수월해졌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
“늦었군.”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수도를 둘러싼 성벽 위에 수없이 내걸린, 제국을 상징하는 깃발을.
결국 연합군보다 제국군이 한발 빠르게 수도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이제 연합군은 오갈 곳이 없어졌다. 앞쪽으로는 이미 점령당한 수도가, 뒤쪽으로는 막아서는 병력을 분쇄하며 진격해오고 있는 제국군의 본대가.
무슨 수를 써도 상황을 호전시킬 방법이 없었다.
남은 길은 오로지 두 가지뿐. 결사 항전하느냐, 아니면 항복하느냐.
이나벨은 어딘가 힘이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항복해야 하는가.”
주위 부관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독한 성정대로라면 결사 항전을 택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일 줄이야.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 규모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지만, 어찌 됐든 그들은 ‘연합군’이니까. 현재 이곳엔 바트레인 군뿐만 아니라 노러츠 군도 있으니까.
노러츠 군은 이나벨 공작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바트레인 군과는 다르다. 그들에게 결사 항전을 권한다고 수긍해줄 턱이 없었다. 내분이나 일으키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계속된 강행군에 지친 연합군은 결국 수도를 눈앞에 두고 진영을 구축했다. 그리곤 며칠간 무의미한 시간을 축냈다.
오래지 않아 제국군의 본대가 그들의 후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체크메이트를 선언하듯.
결국, 연합군 진영에 항복을 선언하는 백기가 올랐다.
* * *
로엘은 바트레인의 공작, 이나벨 펠 부르클린이 수감된 독방을 찾아가 그녀와 독대했다. 항상 착용하고 다니던 가면을 벗어둔 채였다.
“반갑습니다. 부르클린 공작님.”
“…….”
직접 보니 상당한 미인이었다.
연갈색 웨이브진 머리와 시원스런 이목구비가 잘 어울렸다.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무예를 갈고 닦아 초일류의 경지에 오른 실력자답게 몸매도 군더더기 없이 쫙 빠졌다.
다만, 어쩐지 아름답다기보단 늠름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여인이기도 했다.
“제 소개를 해야겠군요. 저는 제국의 이면을 관장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케르티아 남작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무료함에 찌들어 있던 이나벨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그녀가 로엘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너인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곳에 갇힌 채 생각을 정리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지.”
“……?”
“그동안 제국이 상대해온 것은 ‘연합군’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나’였지.”
그녀는 본인의 가슴 위쪽에 손을 얹은 채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도록 만든 인물이, 너인지를 묻고 있는 거다.”
그동안 제국이 상대해온 것이 ‘연합군’이 아닌 ‘이나벨 펠 부르클린’이었다니. 오만하기 그지없는 발언이었다.
그렇지만, 그 말이 틀린 것만도 아니었다. 그녀의 발언은 사태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흥미로운 질문이군요.”
로엘은 빙긋, 하고 웃으며 답변했다.
내심으론 살짝 놀라고 있었다. 단편적인 정보와 직감만으로 여기까지 추론해낼 줄이야. 과연 인재는 인재였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로엘이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 자그마하게 아공간의 입구가 생성되었다.
툭.
그 입구로부터 튀어나온 ‘주사기’를, 그가 한 손으로 받아들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