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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화. 바트레인의 여공작(4) (219/249)
  •  220화. 바트레인의 여공작(4)

     어째서 대륙 남쪽 끝자락인 대수림 바로 위, 팔로스 산맥 근방 영지에 제국군이 모습을 드러냈느냐?

     해답은 플뢰비르 자작령의 주인, 제이슨 발드 플뢰비르가 로엘의 충실한 수족이라는 데에 있다. 지금의 자작은, 로엘의 명령이라면 아무런 주저도 없이 자국의 왕실을 배신할 수 있을 정도로 그에게 감화되어있는 상태였다.

     그동안 제국군은 공간 마법을 통해 자작령으로 조금씩 조금씩 넘어왔다. 공간 마법에도 엄연한 한계가 있다 보니 긴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그런 긴 시간에 걸친 작업임에도 제국군이 들키지 않고 무사히 자작령에 집결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집결지가 플뢰비르라는 점.

     플뢰비르는 국가 상층부가 썩었기로는 메르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악명이 높은 노러츠의 영지다. 애초에 왕실은 변방의 영지인데다 교류도 적은 플뢰비르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플뢰비르와 국가 상층부와의 관계는 굉장히 나빴다.

     노러츠의 왕실은 거듭된 내전으로 여력이 없는 탓에 당연히 플뢰비르 영지로 보냈어야 할 중앙군을 오히려 수도에 묶어뒀다. 그 탓에 플뢰비르의 영주와 휘하 가신들은 왕국 상층부를 싫어했다.

     그런 만큼 양측의 관계는 데면데면했다. 말하자면 소 닭 보듯 한 관계.

     그렇기에 제국군이 몰래 집결하기에 플뢰비르만큼 적합한 영지가 없었다.

     물론 앞서 점령당한 국가들을 보고 노러츠도 부랴부랴 자국을 정비한다며 분주하게 움직이긴 했지만, 그뿐이다.

     안 그래도 국내 상황이 개판이라 감찰관이 제대로 활동하기가 힘든 것이 노러츠 왕국의 실정.

     국가 상층부의 영향력이 잘 미치지 않는 플뢰비르에서 영주와 가신들이 한통속이 되어 움직이면 감찰관 몇 사람쯤 바보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 외에 전선에 한참 이목이 쏠려 있기도 했다.

     게다가 제국군과 연합군 사이에 직접적인 충돌이 그리 없었던 탓에, 로엘과 르우벤, 그리고 그 휘하 세력 일부의 부재가 연합군 측에 알려지지 않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플뢰비르로 야금야금 넘어온 제국군은 이제는 충분히 ‘빈집털이’를 나서도 좋을 정도로 규모가 불어나 있었다.

     목표는 후방의 교란과 같은 시시한 전과 같은 게 아니었다. 최대한 빠르게 노러츠 왕국을 관통하고 북쪽으로 진군, 바트레인의 수도로 향한다!

     요점은 연합군, 혹은 바트레인군이 되돌아오기 전에 노러츠와 바트레인의 왕성을 깨부수고 왕족들을 확보하는 것.

     노러츠의 왕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날로 먹는 수준이다. 다만 바트레인 왕성을 점령하는 건 시간 싸움이 될 터였다.

     현재 연합군은 구 이비츠 왕국령 북부에 위치해 있다. 바트레인의 수도는 병합 전 왕국령의 남쪽에 위치해 있으니 양측이 수도에 다다르기 위해 이동해야 할 거리는 대충 비등했다.

     다만 이쪽은 막아서는 병력이 있을 테고, 저쪽은 ‘연합군’ 내부의 의견 조율과 충돌 직전까지 온 제국군의 견제가 문제가 될 터였다. 과연 어느 쪽이 먼저 도착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사실 여기까지 온 시점에서 수도를 점령하든 못하든 질 수가 없는 싸움이 되긴 했지만.’

     로엘은 피식, 하고 웃었다.

     그 말 그대로였다. 설사 바트레인의 수도 점령에 실패해도 이미 그 시점엔 사국 동맹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고 말 터였다.

     로엘이 굳이 시간 싸움을 벌이려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일 뿐.

     딱.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공간이 열리고, 안쪽에서부터 다수의 언데드가 튀어나왔다.

     로엘이 부릴 수 있게 된 고위 언데드의 숫자는 무려 이백. 그동안 같은 게르반의 전인인 제파스와 함께 절차탁마한 덕분에, 더욱 많은 언데드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제파스가 다루는 언데드 이백이 추가되었다. 제파스는 현재 로엘이 이끌고 온 전투팀, ‘트레이터스’에 포함되어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커르르르르릉!]

     200개체에 달하는 헬 하운드가.

    [퀴이이이이익!]

     100개체에 달하는 마충이.

    [캬아아아악!]

     97개체에 달하는 본 와이번이.

     제국군의 선두에 자리 잡은 언데드들이 내지르는 소음에 르우벤이 일순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어후. 장난이 아니네. 근데 너 이렇게 전면에서 힘을 사용하는 일은 지금까지 없지 않았나?”

    “지금은 가진 전력을 아낄 때가 아니지.”

     로엘이 여유로운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일전에 굳이 그가 직접 나서 별동대를 처리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어차피 금세 자신의 힘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게 될 테니까!

    “자, 그럼.”

     로엘이 마충 중 가장 거대한 개체의 등 위에 올라앉으며 말했다. 목소리에 내력을 실어서.

    “전군, 진격하라.”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터져 나오는 포효,

     어느새 본 드래곤 위에 탑승한 르우벤이 밀리아와 함께 진형의 최선두를 맡았다. 플로라와 적룡대가 적의 주요 타깃이 될 수밖에 없는 로엘을 호위했다.

     전투팀 트레이터스는 그들을 보조할 다른 전투팀들과 함께 별동대로 활약하게 되어 있었다. 르우벤 휘하 로열 나이츠는 제국군 전체를 통제하고 그들의 선두에 서기로 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속도전을 대비해 제국군 전원에게 말이 보급되어 있었다. 제국군이 흙먼지와 소음을 일으키며 단숨에 정비된 도로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사국 동맹을 뿌리부터 뒤흔들 재앙이 플뢰비르 영지에서 뛰쳐나와 그 모습을 드러냈다.

     * * *

    “방금 뭐라고 했지?”

    “팔로스 산맥 인근 영지로부터 제국군이 출현했습니다! 현재 노러츠 왕국이 쑥대밭이 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전서구로 전해져온 급보를 읊는 연합군 병사.

    “…….”

     연합군 총사령관, 이나벨 펠 부르클린은 이마를 짚었다. 순간적으로 치밀어오른 울화가 너무 커서, 도리어 무슨 말을 내뱉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 한 걸음. 계획된 회전을 치르기까지 한 걸음만이 남았는데!

    “아니, 대체 어떻게 하면 팔로스 산맥 근방에서 제국군이 갑자기 출현할 수 있단 말인가!”

    “혹시 노러츠가 제국과 내통했단 말인가!”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그런 사실 없소이다! 당신들도 노러츠 내부가 쑥대밭이 되어가고 있다는 보고를 전해 듣지 않았소!”

    “그렇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노러츠에서 갑자기 제국군이 튀어나온단 말입니까!”

     연합군의 중역들이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벌써부터 분열의 조짐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이나벨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신이 아닙니다. 아니, 배신은 맞지만 노러츠의 배신은 아닐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총사령관.”

    “팔로스 산맥 인근 영지 중 하나가 제국과 내통한 겁니다. 제국군은 공간 마법을 이용해 조금씩 이동한 것이겠지요.”

     과연 남다른 두뇌를 지닌 그녀는 단숨에 상황을 파악했다. 문제는 대처 방법까지 떠올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지만.

    “이럴 때가 아닙니다! 당장 회군해야 합니다!”

    “바로 코앞에 제국군이 있는데 회군하자고? 저들이 우릴 그냥 둘 성싶은가?”

    “지금 그게 문제요? 정작 후방의 왕국들이 점령당해버리면 저들과의 싸움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오!”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회군해야 합니다!”

    “안 됩니다! 이대로 회군했다간 전방의 제국군이 그대로 밀고 내려옵니다!”

     순식간에 불붙은 논쟁.

     주로 노러츠의 인사들과 노러츠와 국경을 마주한 바트레인의 인사들이 회군을 주장했다. 반면 르페인, 토우런트 왕국의 인사들은 당장 연합군이 입을 피해를 걱정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한동안 숙고하던 이나벨은 결단을 내렸다. 당장의 피해를 걱정해서 회군을 늦추면 더욱 큰 피해를 입게 된다.

    “회군합니다.”

    “총사령관!”

     곧바로 터져 나오는 고성을, 이나벨은 손을 들어 잠재웠다.

     그녀는 구구절절 회군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어차피 각국의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고,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것을 조율할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자신이 바트레인의 귀족이라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겠지. 딱히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틀린 것만도 아니니까.

     사국 동맹은, 사실상 깨어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는 분은 군사를 이끌고 남으셔도 좋습니다.”

     쉽게 말해 누가 뭐래도 일단 바트레인 왕국군은 되돌아가겠다는 뜻이었다. 사실상 동맹 파기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웅성웅성.

     순식간에 장내가 시장통처럼 시끄러워졌다.

    “…….”

     토우런트 왕국군을 이끄는 최고 지휘관, 니에라 필 빌헬름 공작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얼굴을 크게 일그러뜨렸다.

     * * *

     한참 노러츠 왕국 수도를 공략하고 있는 제국군에 추가로 지원군이 도착했다. 바로 본대에서부터 날아온 공중 병단.

     무려 전체 공중 병단의 절반이나 되는 숫자였다. 병단을 이끄는 인물은 로엘의 수행원인 카트리나.

     로엘은 자신의 옆에 내려선 카트리나를 돌아보며 곧바로 질문했다.

    “제때 맞춰서 오셨네요. 연합군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오면서 공중에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연합군은 분열된 듯싶습니다. 바트레인과 노러츠의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의 병력은 자국으로 되돌아가고 있더군요.”

    “흠. 역시 그렇게 됐나요.”

     로엘은 빙긋 웃었다. 그야말로 최상의 결과였다.

     혹시 이나벨 공작이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해 연합군의 실세들을 모조리 설득, 분열을 막았다면 조금 더 귀찮아졌을 터였다. 영웅적인 면모와는 거리가 먼 그녀의 성향상 그렇게 될 가능성은 낮을 거라 여기긴 했지만.

    “피곤하겠지만, 바로 전선에 가세해 주세요. 르우벤의 지시대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로엘의 지시에 카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르우벤은 한참 본 드래곤을 조종하며 날뛰고 있는 터라 쉽게 눈에 띄었다.

     노러츠의 수도가 처한 상태?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르우벤이 조종하는 본 드래곤, 그리고 로엘이 조종하는 본 와이번 때문에 성벽은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캬아아아아아아아!]

     본 드래곤이 상대의 심령을 얼어붙게 만드는 포효를 내질렀다.

     푸확!

     푸화학!

     본 와이번의 무리가 허공을 선회하며 지상을 향해 화염 브레스를 내뿜었다. 정확히는 과거 ‘자이언트 플랜츠’ 유적의 가디언을 흉내 낸 가연성 가스 브레스였지만, 아무튼 그게 그거였다.

    “이대로 왕성까지 돌입한다!”

    “약탈을 엄금한다! 시민들에겐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해라!”

     로열 나이츠가 이끄는 제국군은 기세를 죽이지 않고 밀려갔다. 그들의 선두에 서서 달리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밀리아.

    [커르르릉!]

     헬 하운드들이 도시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로열 나이츠와 그들을 뒤따르는 제국군을 보조했다.

    “네놈들은 뭐냐!”

    “찾았군. 명단에서 확인한 얼굴입니다. 왕국 유일의 초월자인 라파엘 공작이 맞습니다.”

    “좋아. 생포한다.”

     한편, 전투팀 트레이터스의 구성원을 앞세운 몇 개의 별동대가 수도의 초강자들을 생포, 혹은 사살하고 다녔다.

     연합군에 휘하 병력을 보내놓고 수도에 와 있던 왕국 유일의 초월자에겐, 특별히 트레이터스의 리더인 리메라, 용인족 로칼트 가르시아, 그리고 언령 마법사 뤼바르 아덴바인이 한꺼번에 달라붙었다.

     전황은 제국군의 압도적인 우세.

     아니 우세라고 하기도 뭣했다. 사실상 유린이나 마찬가지였다.

     성벽 위에 세워진 첨탑 지붕에 앉아 그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던 로엘은, 지금쯤 입술을 짓씹으며 자국으로 복귀하고 있을 이나벨 공작을 떠올리며 큭큭 웃었다.

     본대를 이끌고 있을 바르바젠에게 미리 요청해 두었다. 연합군이 분열하더라도 끝까지 바르테인 왕국군만 쫓아다니며 괴롭혀줄 것을.

     아무리 냉철한 성격의 이나벨 공작일지라도 꽤나 속이 탈 터였다.

     문득, 로엘이 중얼거렸다. 굳어진 어깨를 제 손으로 풀어주듯 주무르며.

    “이젠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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