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바트레인의 여공작(2)
제국군이 집결했다. 집결 장소는 보르단 왕국의 남쪽 국경지대.
사국(四國) 동맹이 형성된 이상 제국도 전력을 한데 모아 그들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섣불리 전력을 분산시켰다간 각개격파 당할 위험성이 있었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보르단 점령전에 동원된 제국군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 르우벤과 휘하 용병대, 그리고 카트넬 가의 무력대가 포함된 군대였다.
다음으로는 오펜 왕국 점령전에 동원된 제국군이 도착했다. 바르바젠과 카트란, 로엘과 휘하 전투팀이 포함된 군대였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것은 물론 메르타 왕국 점령전에 동원된 제국군이었다. 레인과 휘하 무력대가 포함된 군대였다.
계절은 어느새 가을의 초입. 오래지 않아 겨울이 찾아올 터였다.
전쟁이 겨울까지 이어지는 것은 양측 모두가 바라지 않는 일.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미 바트레인 왕국령에는 연합군이 집결해 있는 상태. 언제 충돌이 벌어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 * *
“회전(會戰)을 벌이려 들 거야.”
모처럼 다섯 각성자가 모두 모인 자리. 로엘이 다른 각성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회전?”
“갑자기 웬 회전?”
카트란과 르우벤이 고개를 기울였다.
회전? 연합군 측에서 회전을 벌이려 한다고? 제국군을 상대로?
“연합군 측에서 왜 회전을 노려? 전력적으로 제국군 측이 우세인데. 그쪽은 군대의 통일성도 낮잖아?”
“그렇지.”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한 이유라면 여러 가지 있긴 한데, 가장 큰 이유는 이거지. ‘나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
바르바젠이 흥미를 보였다.
르우벤과는 달리, 그는 전생에 ‘이나벨’이라는 인물과 여러 차례 충돌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런 만큼 그녀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돼. 연합군이 제국에게서 승리를 따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연합군을 이끄는 ‘이나벨 펠 부르클린’은, 대체 어디에서 돌파구를 찾아냈을까.”
“흠.”
“성벽 안에 틀어박혀 수성전을 벌인다? 그런 뻔한 방식을 택할 리가 없지. 앞서 그 방식을 택한 국가들을 제국이 어떻게 깨부쉈는지 전해 들었을 테니까.”
단순히 버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수성전은 ‘방어 측이 공격 측보다 유리해야만’ 의미가 있는 전략이다.
그런데 제국군은 공성전을 대비해 초대형 골렘을 비롯한 특수전력을 수없이 보유하고 있다. 앞서 제국과 충돌한 국가들이 그렇게 빠르게 무너진 것이 괜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게다가 제국 측엔 ‘공간의 현자’가 있다. 그것도 둘이나. 방어 측의 이점인 ‘원활한 보급’을 무의미하게 하는 조커가 둘이나 존재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나벨이 왜 굳이 사국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결성했겠는가. 수성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당연히 아닐 터였다.
“그렇다고 겨울까지 버틸 생각을 했을 리도 없고.”
물론 제국군은 되도록 빠르게 전쟁을 마무리 짓고 싶어 한다. 겨울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
그렇지만, 그것이 겨울이 오면 제국군이 크게 불리해진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추위를 대비하기 위한 보급이야 공간의 현자가 있으면 해결될뿐더러, 애초에 북쪽 출신인 제국의 병사들은 추위에 비교적 강한 편이다.
“그녀가 찾아낸 ‘돌파구’는 크게 네 가지 정도일 거야.”
첫째. 제국군이 연속된 전쟁으로 지쳐 있다는 것.
둘째. 물자의 원활한 수급이라는 이점은 ‘공간의 현자’에 의해 의미가 없어졌더라도, 병력의 원활한 수급이라는 이점은 그대로라는 것.
셋째. 제국군보다 연합군이 전쟁의 무대가 되는 장소에 더 익숙하다는 것.
넷째. 대규모 회전이야말로 이나벨 본인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라는 것.
“회전을 통해 어떻게 일발역전만 할 수 있다면, 그때부턴 전황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다는 생각이겠지. 그동안 제국이 점령한 왕국들이 단숨에 무주공산이 될 테니까.”
말했듯, 병력의 원활한 수급이라는 측면에서만큼은 제국군이 연합군에 비해 뒤처진다. 제국은 북쪽 끝 제도에서부터 다시 병력을 몰고 와야 하니까.
한차례 제국군을 크게 격파하고 무주공산이 된 구(舊) 왕국령들을 최대한 집어삼킨다. 그런 뒤 굳히기에 들어간다면?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를 극복할 토대가 마련되지 않을까. 이후 제국과 제대로 자웅을 겨뤄볼 기반이 마련되지 않을까.
르우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럴듯하네. 그렇지만, 아무리 제국군이 지쳐 있다고 해도 당장 연합군과 회전으로 맞붙어서 질 거라는 생각이 안 드는데.”
“아마 그냥 바로 들이받으려 하진 않겠지. 연합군이 전장에 더 익숙하다는 이점을 내세워 게릴라를 펼치던지, 아니면 다른 수를 내던지.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제국군을 지치게 만들 생각일 거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가 회전 다음으로 자신 있어 하는 게 ‘그런’ 종류의 전술이었지.”
바르바젠이 턱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그가 전생에 경험한 그녀의 전략 전술은 그 본인의 성정이 그대로 반영된 것처럼 악독하기 그지없었다.
레인이 로엘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별다른 정보도 없건만, 그런 걸 잘도 유추해내는군.”
“단순한 역산(逆算)이지. 전에도 말했잖아. 이 전쟁은 공평하지 않다고.”
로엘이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제국이, 아니 각성자들이 가진 패는 이나벨이 가진 패에 비해 월등히 많다. 그렇기에 그녀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제한되어 있다.
자신은 그저 그녀에게 주어진 제한된 선택지 중 최선을 유추한 것뿐. 단지 그뿐이다. 로엘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레인의 입장에선 ‘그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닐 텐데?’라는 감상이 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서, 우리 측은 거기에 어떻게 대응하면 돼?”
카트란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로엘이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대응법이라고 할지, 작전의 큰 줄기는 두 가지야. 첫째로는 연합군의 게릴라 전술에 의한 피해를 최소화할 것. 둘째는 저들이 회전을 펼치려 하는 무대로 모르는 척 유인당할 것.”
“……뭔가 이상한 대응법이군.”
“일단 게릴라 전술에 의한 피해를 최소화할 구체적인 방법이 뭔지를 알고 싶은데.”
“별로 대단한 건 아니고.”
로엘이 씩, 하고 웃었다.
“슬슬 써먹어야지. 공중 병단.”
제공권을 장악해 정보전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그것만으로도 부르클린 공작의 의도를 상당 부분 무력화시킬 수 있으리라.
지금껏 전장에서 활용하지 않고 아껴둔 비장의 전력이다. 여기에는 아무리 이나벨이라고 해도 당황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미리 알았다면 어떻게든 대응책을 마련했겠지만, 당장 상황이 닥치고 나서 대응책을 마련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그러고 보니 공중 병단이 있었지.”
“그보다, 나는 일부러 유인당해줘야 한다는 게 의문인데. 정말로 회전을 치르기라도 할 생각이냐?”
레인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상대는 회전을 바라고 있다. 그런 상대와 정면으로 부딪치기라도 할 생각이란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로엘은 고개를 저었다.
“회전은 치르지 않아. 그 직전까지만 가면 돼.”
“무슨 소리야?”
“양측의 명운을 건 승부가 코앞에 다가왔다는 느낌이 들도록, 그런 ‘연출’만 해주면 된다는 말이야. 저들의 이목이 완전히 그쪽으로 집중될 수 있게.”
레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뭘 하려는 거야, 너?”
“그런 게 있어.”
로엘은 묘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 * *
제국군이 국경지대를 벗어나 진격했다. 기다렸다는 듯 연합군이 제국군을 막아섰다.
가벼운 충돌이 벌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력상 우위에 있는 제국이 밀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연합군 측은 미련을 두지 않고 물러났다. 실상 그들이 입은 피해는 그리 대단치 않았다. 애초에 소극적으로 움직였기에.
제국군은 연합군이 물러난 만큼 앞으로 진군했다. 그런데, 그런 제국군의 눈앞에 썩 보기 좋지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싹 불태워버리고 갔군.”
“곡식과 가축을 비롯한 식량은 그렇다 치고, 거주지가 하나도 안 남았네.”
피곤함이 축적된 제국군을 맞이한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허허벌판이었다.
“…….”
바르바젠이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초장부터 이런 강수를 두다니, 역시 그녀답다고 해야 할까. 어쩐지 픽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편, 로엘은 레인에게 한 가지 일을 지시했다.
“레인.”
“왜.”
“저쪽 개울가에 가서 물 한 모금 마셔봐.”
“……?”
레인이 병사 한 사람이 건네는 물컵을 들고 개울가로 이동, 물을 한 컵 떠서 마셔보았다.
“독 들었네, 이거. 꽤 지독한 종류인 것 같은데.”
“역시.”
레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수원(水源)에 강력한 독을 풀어둔 모양이었다.
“청야전술(淸野戰術)인가.”
청야전술.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거주지 등을 없애버리는 전술이다. 적군이 지칠 수밖에 없도록.
말하자면 방어 측이 고의적으로 사용하는 초토화 전술. 한 번 시행하고 나면 오랜 시간 그 땅을 써먹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크나큰 국가적 손실이 발생한다.
아무래도 쉽게 써먹을 만한 전술은 절대 아니었다.
“역시 최대한 빠르게 전쟁을 종결시켜야겠어.”
로엘이 혀를 차며 그렇게 말했다.
이전에도 말했듯, 로엘이 이나벨 펠 부르클린 공작을 경계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녀가 뛰어난 인재여서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세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벌일 수 있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르우벤도 살짝 질린 기색이었다.
“지독하구만.”
“성녀와 연줄을 만들어 두길 잘했지.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초빙해야겠어.”
그동안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서 꾸준히 ‘교단’에 막대한 금전을 기부해온 로엘이다. 그녀의 대범위 정화 마법이라면 이 죽어버린 땅을 어떻게든 되살릴 수 있으리라.
“일단 진영을 구축하자. 병사들에겐 개울물이나 우물물을 이용하지 말라고 전해 두고.”
“그러지.”
바르바젠이 고개를 끄덕이곤 현재 명목상 군의 총사령관 역할을 맡고 있는 꼭두각시 대귀족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곳에 진영을 구축한다!”
총사령관의 외침. 부관들이 빠르게 그것을 주위로 전달했다.
병사들은 능숙하게 아공간에서 쏟아져 나온 목재로 목책을 만들어 주위에 두르고, 천막을 가져다 펼쳤다. 뒤이어 물과 식량, 솥을 꺼내 요리를 시작했다.
구수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이내 완성된 뜨끈한 스튜. 여기저기 한 줄로 서서 스튜를 배급받은 병사들이 사전에 배급된 빵 한 덩이를 꺼내 들고 식사에 돌입했다.
* * *
그리고 제국군이 갖춘 진영 위, 상공.
키에에엑!
캬아아아아!
비행형 몬스터에 탑승해 진영 주위를 경계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바로 제국의 비장의 수, ‘공중 병단’.
공중 병단을 이끄는 것은 두 여인이었다. 로엘의 수행원인 카트리나, 그리고 카트란의 수행원인 이레닐.
일단은 그렇지만, 이후 그들이 본격적인 ‘작전’에 투입되게 되면 총지휘관이 교체될 예정이었다. ‘사룡(死龍)’을 다루는 르우벤으로.
그들은 네 팀으로 나뉘어 번갈아 휴식을 취하며 주위를 살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연합군의 별동대를 발견해 미리 진영에 알리는 것이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였다.
병사들이 진영을 갖추고 식사를 마칠 때까지 별동대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병사들이 잠자리에 들 시간이 가까워져 갔다.
그리고 불침번을 제외한 모두가 잠자리에 든 새벽.
마침 차례가 돌아와 와이번에 탑승한 채 주위를 살피던 카트리나의 눈에, 제국군이 위치한 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 나가고 있는 궁기병대가 들어왔다.
그녀는 곧바로 귀걸이를 조작, 로엘에게 통신을 넣었다.
“로엘 님. 별동대를 발견했습니다. 병과는 궁기병. 숫자는 대략 이백 남짓. 방향은 남서쪽입니다.”
마침 잠자리에 들지 않고 성형공을 운용하고 있던 로엘이, 통신을 전해 듣고 눈을 떴다.
“걸려들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