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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화. 바트레인의 여공작(1) (216/249)
  •  217화. 바트레인의 여공작(1)

     메르타 왕국 소속 영지, 카르테리온.

     제국군이 진입해 들어오며 확인한 이 영지의 실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야말로 개판 5분 전이었다. 사실 메르타 전역이 심각한 상태이긴 했지만, 이곳은 경우가 심했다.

     과거 레인은 이곳 영지에 찾아와 전염병자들을 돌봐 주고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주었다. 구호 물품도 상당량 배분해 주었고.

     분명 그 덕분에 영지의 사정은 한동안 호전되었다. 그렇지만, 그게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근본적으로 카르테리온의 임시영주는 왕국 상층부에 미움을 사고 있었다. 위험지역이라는 일반인들의 인식도 그대로였다. 영주에겐 정통성이 부족했고, 상주하는 병력의 숫자는 처참했다.

     국가의 병력 지원은 없고, 외부와의 교류는 쉽지 않고, 범죄자들은 판을 치고, 영지를 운영할 자금은 턱없이 부족하고. 지난 수년간 영지 사정은 극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 영지가 지금 이 순간, 거대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하.”

     전(前) 영주, 비앙카 카르테리온이 복잡한 심경이 담긴 웃음을 토해냈다.

     그녀의 눈앞에는, 끝없이 늘어선 영지민의 행렬이 있었다. 제국의 행정관이 나눠주는 각종 보급품을 배급받기 위한.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영지민들의 얼굴이 저렇게 밝아 보이는 것은.

    “뭔가 미안하군. 이런 형태로 다시 만나게 돼서.”

    “아닙니다. 저는 충분히 만족합니다.”

     옆에서 레인이 볼을 긁적이며 말하자 비앙카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제국이 메르타를 ‘청소’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귀족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동안 본인이 다스려온 영지의 통치권까지 인정받지는 못했다.

     현 카르테리온의 실정이 심각한 만큼 영지의 정비를 위해선 많은 시간과 노력, 자금이 필요한데, 그녀는 그것을 감당할 역량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대신 그녀에게는 새로운 작위와 비교적 풍요로운(어디까지나 메르타 기준에서) 소영지가 하사되었다. 그 자신이 작위만 받고 영지는 거절하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어째서 영지를 거절한 거지? 네게 나쁘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그동안 많이 지쳤습니다. 이젠 조금 쉬고 싶네요.”

     비앙카는 그렇게 말하며 힘없이 웃었다.

    “…….”

     레인이 슬쩍 그녀를 곁눈질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눈가는 거뭇했고, 피부는 푸석했다. 필시 그동안 많은 고생을 한 것이겠지.

    “솔직히 얼떨떨하더군요.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제국에서 영지까지 하사하려 하는 건지.”

    “그럴 수밖에.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이 썩어빠진 왕국에 제정신 박힌 귀족은 정말로 몇 되지 않더군. 너 정도면 정말로 준수한 수준이지.”

     제국은 기본적으로 점령한 국가의 귀족 일부는 그대로 작위를 보전하게 해주고 있었다. 주로 능력 있고 성품이 뛰어나며 제국의 통치에 반감이 없는 이들 위주로.

     물론 그렇다 해도 대다수 귀족들은 물갈이되었다. 이후 그 빈자리는 이번 대륙통합 전쟁에서 높은 전공을 세운 자들에게, 그리고 그동안 제국이 아카데미 제도를 통해 육성한 고급 인력들에게 배분될 예정이었다.

     아무튼, 점령국의 모든 귀족을 내칠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얽혀 있었으니까.

     적어도 현장 분위기를 전혀 모르는 제국의 인재들로 그들을 모조리 대체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제국은 엄격한 ‘선별’의 과정을 거쳐 몇몇 귀족들을 회유했다.

     작위가 높고 낮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제국이 내세우는 ‘기준’에 부합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뿐. 심한 경우엔 일개 명예 귀족이 정식 작위를 받고, 영지까지 하사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제국의 ‘기준’에 빗대어 보았을 때, 비앙카 정도면 그야말로 최상의 인재 중 하나였다. 특히나 귀족 대부분이 썩어빠진 메르타의 인물인지라 더더욱.

    “그런가요.”

    “생각이 바뀌면 얼마든지 이야기해도 좋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흔들리네요. 하하.”

     비앙카가 짐짓 쾌활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입으로 내뱉은 말과는 달리 정말로 그러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아쉽군.’

     레인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혹시 카르테리온 영지에 애착이 남아 있다면 휘하로 들어올 생각이 없느냐고 권해볼 생각이었는데, 물어보나 마나일 듯했다. 영지와 민생에 대해 빠삭한 부관이 필요한 시점이거늘, 정말로 아쉽게 되었다.

    ‘어쩔 수 없지. 대신 그녀 휘하에서 일하던 가신들 일부를 끌어들이는 수밖에.’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비앙카와 달리 그들 중에는 자신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자도 많았다. 어찌 됐든 자신은 영지를 빼앗은 외적이 아니던가.

    ‘이후에 그녀가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나면, 그때 한 번 권해보기는 해야겠지.’

     어딘가 아련한 눈빛으로 영지민들을 바라보는 비앙카. 그런 그녀를 뒤로하며, 레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 * *

     현재는 제국의 영토가 된, 구(舊) 키사란 왕국에서 대기하고 있던 인력이 일제히 투입되었다.

     카르테리온 영지의 중심에 위치한 영주 저택이 무너지고, 그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 걸친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바로 ‘검가’의 구축.

     그 부지만 해도 엄청난데 들어서는 건축물 하나하나가 고급스럽기까지 했다. 비단 외견뿐만 아니라 내부 구조까지도.

     뚝딱뚝딱 지어지는 건물들과 그 방대한 부지를 둘러싸는 외벽. 그 대공사를 목격한 영지민들이 탄성을 토해냈다.

     민심은 최고조였다. 새롭게 영지의 주인 될 인물이 과거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성자’라는 사실이 전해졌기에.

     그 이유만도 아니었다. 넉넉한 보급이 전해져 왔고, 본격적으로 영지가 부흥할 기미를 보이고 있었으며, 지난 몇 년간 증식해온 몬스터에 대한 걱정마저 없어졌다. 영지민들이 들뜨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도착했습니다. 스승님.”

    “오랜만이야, 사부.”

     오래지 않아 ‘천검대’까지 도착했다.

     레인은 우선 그날 밤 레이나와 진하게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영지의 치안을 위협하던 무법자들을 소탕해 나갔다.

     진작 제국군을 동원해 소탕할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들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방식이 선전 효과가 높기 때문.

     레인은 치안이 안정화된 이후론 정식으로 무대를 마련하고 영지민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 마치 이제 막 작위를 받은 영주의 취임식처럼.

     레인 본인은 그것을 귀찮아했지만,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다.

     그나마 이번 행사는 약식에 불과했다. 차후 검가가 제대로 출범하게 되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질 않는 규모의 행사가 벌어질 예정이었다. ‘천검제’의 가문을 대륙 전역에 대대적으로 선전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물론 레인은 그 예정된 미래를 굉장히 달갑지 않게 여겼다. 벌써부터 위가 쓰리다며 불평을 토해내기도 했다.

     그 행사엔 무려 ‘황제’가 직접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었다. 그가 정식으로 검가의 출범을 선언하고 가문의 이름을 정해주는 모습을 대륙 최고위 인사들이 목격하게 되겠지.

    “그건 그렇고, 셀린이 이번에 경지가 올랐다면서.”

     행사 후, 자신의 거처로 되돌아와 예복을 훌훌 벗어 던지던 레인이 레이나에게 물었다.

    “네. 전쟁의 와중에 깨달음을 얻은 건지 초인의 대열에 들어섰죠.”

     물끄러미 레인을 지켜보던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변했다.

     셀린이 성장해준 덕분에 ‘원로원’이 구성될 최소한의 요건이 충족되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할 수 있었다.

    “말해두겠지만, 안주해서는 안 돼. 너도, 셀린도.”

    “알고 있답니다. 스승님.”

     레인이 짐짓 엄하게 경고하자 레이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도 알았다. 자신과 셀린이 가진 재능은, 결코 여기서 멈출 정도로 가벼운 것이 아님을.

     적어도 초월자, 혹은 그 이상의 경지에 이르러야 했다. 쉬지 않고 정진해 스승의 뒤를 쫓아가야 했다.

    “어머.”

     레인의 예복을 받아들고 그것을 정리하던 레이나는, 등 뒤에서부터 어깨를 감싸오는 손길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마저 옷을 정리한 후, 뒤돌아 레인의 목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왜 그러시나요? 스승님.”

    “그냥.”

     레인이 가볍게 대꾸한 뒤,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내 두 사람의 육신이 완전히 밀착되었다.

     대륙통합 전쟁이 시작되고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던 두 사람이다. 그동안 서로 쌓인 것이 많았다.

     지난 며칠간 매일같이 서로를 탐닉한 두 사람이지만, 갈증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아마 이 뒤로도 한동안은 그 갈증이 유지되리라.

     마침 경지의 수습을 위해 레인에게 대련을 요청하러 오던 셀린이, 기감으로 두 사람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알아채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는 그대로 자신의 거처로 되돌아가 홀로 조용히 호리병을 기울였다.

     * * *

     보르단 왕국으로 진격한 제국군이 수도를 점령했다. 결국 제국을 제외하면 대륙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닌 대국이었던 보르단마저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제 대륙에 제국을 제외한 국가는 단 다섯만이 남았다.

     벨리아 왕국. 토우런트 왕국. 바트레인 왕국. 르페인 왕국. 그리고 노러츠 왕국.

     이 다섯 국가 중 벨리아 왕국을 제외한 네 국가는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을 맺었다. 지리상 중심에 위치한 바트레인을 맹주국으로 삼아 연합군을 편성했다.

     바트레인의 여공작 ‘이나벨 펠 부르클린’은, 본래 서남쪽 구석에 위치한 벨리아에도 동맹을 요청하려 했다. 그들 왕국의 군세도 연합군에 합류하도록.

     그러나 그 시도는 좌절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제국이 한 가지 소식을 퍼뜨렸기 때문에.

    [제국과 대밀림이 정식으로 동맹을 맺었다!]

     막연히 최후방 국가라고 안심하고 있던 벨리아 왕국에 순식간에 비상이 걸렸다.

     대밀림과 국경을 인접하고 있는 벨리아 왕국이다. 그들 왕국의 입장에선, 대체 언제 제국군이 대밀림을 경유해 자국을 들이칠지 알 수가 없는 상황!

     사실, 제국은 대밀림을 통해 군대를 진군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저 동맹군을 상대하는 데에만 전력을 집중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벨리아 왕국이 그걸 알 도리가 있나.

     설사 제국이 군세를 보내지 않더라도 벨리아 왕국은 자국의 군대를 함부로 국외로 내보낼 수 없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단지 제국과 대밀림이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만으로, 그들의 군대는 자국에 ‘묶여버리고’만 것이다.

    “겁쟁이들 같으니!”

     소식을 전해 들은 바트레인의 여공작, 이나벨은 분통을 터뜨렸다. 안 그래도 제국에 맞설 전력이 부족한 판국이건만, 제 몸 사리겠다고 저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니!

     마음 같아선 당장 사신단을 꾸리고 그들에게 ‘벨리아 국왕을 찾아가 욕을 바가지로 퍼부어주고 오라’고 지시하고 싶었다. 그럴 수가 없다는 게 심히 유감이었다.

    “이런 뻔한 술수에 당하다니!”

     그녀의 말마따나 뻔한 술수였다.

     제국이 왜 굳이 이 시점에 대밀림과의 동맹에 관한 소식을 퍼뜨렸겠는가. 벨리아 왕국을 견제하기 위한 술책임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 뻔하기 짝이 없는 술수에 벨리아 왕국이 정통으로 걸려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타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 누가 벨리아 왕국이 지금 보이고 있는 태도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치들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거늘.

     정말로, 만에 하나라도. 제국군이 대밀림을 통해 진군해 왔는데 정작 벨리아 왕국군이 국내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대체 그것을 누가 책임진다는 말인가.

    “어쩔 수 없지. 사(四)국 동맹만으로 어떻게든 놈들을 막아내는 수밖에.”

     그녀는 금세 미련을 떨치고 앞으로의 전쟁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가 없다. 그녀는 지나간 일에 그리 오래 미련을 두지 않는 성격이었다.

    “점령한 왕국들을 정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은 들이겠지만, 제국군은 금세 다시 진격을 시작할 게 분명해. 겨울이 되기 전에 전쟁을 끝마치고 싶을 테니.”

     그녀가 거침없이 펜으로 종이 위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승기는 거기에 있다. 제국군은 그동안 쉼 없이 계속해서 전쟁을 치러 왔지. 아무리 강력한 군대일지라도 연속된 전쟁에는 지칠 수밖에 없는 법.”

     그녀가 옆에 놓인 지도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지도를 응시하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두들겼다.

    “연합군이 기본적으로 취할 전략은 게릴라전. 최대한 제국군의 진을 빼놓는 방식의 전쟁을 치른다.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고, 제국군의 진군은 최대한 지연시킨다.”

     그렇게 제국군의 피로도를 한계까지 끌어올린다.

     웬만큼 뛰어난 전쟁 수행 능력이 아니라면 그것이 불가능하겠지만, 이나벨은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지도 한쪽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정확한 위치는 구(舊) 이비츠 왕국령 북부에 위치한 거대한 평야 지대.

     그녀가 탁자를 두들기던 손가락을 쫙 펴고, 손바닥으로 지도 한가운데를 탕! 하고 내리쳤다.

    “그리고 그렇게 제국군이 한계에 다다르면, 이곳으로 끌어들여 대회전을 벌인다. 그로써 단숨에 그들을 격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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