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야만 민족(4)
야만 민족이 백작령에서 물러난 것은, 침략일로부터 정확히 한 달하고 보름이 지난 시점이었다.
“어, 어!”
“놈들이 물러난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성벽 위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더불어 바르센 백작의 얼굴도 활짝 펴졌다.
‘정말로 막아냈군! 한때는 끝장이라고 생각했는데.’
믿어지지가 않았다. 정말로 끝까지 저들을 막아냈다는 것이. 지금까지 입은 피해가 크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전적으로 저 두 사람 덕분이지. 괴물이야, 괴물.’
그가 한쪽에서 서로 수고했다며 잡담을 주고받는 레인과 카트란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사실 레인과 카트란의 조합 상성은 이미 진작에 검증된 것이었다. 카르테리온 영지의 몬스터 웨이브를 사실상 두 사람이서 막아내지 않았던가. 끝에 튀어나온 언데드만 제외하고.
이번엔 조금 부족해도 제대로 뒤를 받쳐주는 군세마저 있었다. 거기에 두 사람이 지난 시간 동안 큰 폭으로 성장하기까지 했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무사히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을 버텨냈다.
“물러난 걸 보니까 제국군이 오펜 왕국을 정리하고 진격했나 보네. 생각보다 빠른데?”
“더 늦었으면 이쪽이 위험할 뻔했지.”
카트란이 쓴웃음을 흘리며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야만 민족의 호전성이 상상 이상이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죽기 살기로 덤벼들 줄은 몰랐다.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전(前) 공주, 이레닐이 다가와 카트란에게 말을 걸었다. 카트란이 살짝 웃으며 그에 화답했다.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레인은 알아보았다. 그가 하품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
세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백작이 발걸음을 옮겼다.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이후 귀빈으로 대접할 생각이었다. 며칠이 되었든, 몇 달이 되었든.
지금까지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거기다 천검제 쪽은 전쟁 중 무리해서 대접하려 들었다간 역풍을 맞게 될 성격으로 보였다. 그래서 운을 띄워보지조차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다르잖은가.
‘저만한 거물들과는 가능한 한 친분을 다져둬야 한다. 지금처럼 내 입지가 불안한 때라면 더더욱.’
저 두 사람은 제국 최중요 인사임이 분명했다. 천검제 쪽이 이후 검가를 세울 예정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고, 저 카트란이란 사내도 그만한 실력이라면 이후에 어떤 식으로든 제국의 실세로 거듭날 터.
현재의 백작은, 원래 소속되어 있던 왕국을 배신하고 제국에 붙어 그 자신의 권력을 보전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막 제국 권력계에 발을 들인지라 연줄도, 뒷배도 부족했다.
그렇기에 눈앞의 두 사람과 친분을 다져둬야 했다. 그들에게 잘 보여 두면 이후에 그것이 큰 힘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백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백작의 시야에 이질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우우웅!
갑작스레 허공에 검고 둥근 ‘문’ 열리더니, 그 안쪽에서부터 웬 가면인과 은발의 미녀가 튀어나온 것이다.
“레인.”
가면인이 말했다.
“뭐야. 왜.”
“바로 이동하자. 지금 야만 민족의 영토로 진입하고 있는 제국군에 합세해.”
백작이 눈을 부릅떴다.
뭐? 이동한다고? 아직 제대로 대접 한 번 못 했는데?!
“나 바로 전까지 전쟁 치르던 사람이다. 인간적으로 휴식 기간을 좀 줘야 하지 않냐.”
레인의 불평에 가면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인간적? 그게 뭐야. 먹는 거냐?”
“너 어째 요즘 날 취급하는 방식이 점점 험해지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은 바로 하자. 먼저 막 나가기 시작한 건 너지.”
“…….”
레인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 전적이 좀 많긴 했다. 그 뒷수습은 항상 로엘이 해왔고.
특히 비무행을 다니는 동안엔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기행을 다 벌이고 다녔다. 로엘도 차마 예상치 못한 스케일의 돌발행동을.
생각해 보니 로엘이 본격적으로 자신을 험하게 대하기 시작한 게 그즈음부터였던 것도 같다.
“군말 말고 따라와.”
“그런데 굳이 우리까지 가야 할 정도로 전력이 부족한 거야? 그쪽을 뭐 아예 점령할 것도 아니잖아.”
카트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야만 민족은 이종족이 아닌 인간의 집단이다. 하지만 제국은 그들을 통합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각 이종족들과 같이 동맹의 대상으로 정했을 뿐.
이유야 여럿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을 제국에 융화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날 잡음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이종족 이상으로.
그들 황인종과 백인종 사이의 갈등의 골은 굉장히 깊었다. 그나마 제국법은 그들을 차별의 대상으로 삼지 않지만, 그 법이 제정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마족의 대륙 침공만 아니었더라도 다른 방식을 취했을지도 모른다. 일단 점령 후에 수십 년에 걸쳐 국민들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교화시키는 것과 같은. 그러나 지금은 동맹이 최선이었다.
“점령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이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경고는 해둬야 하니까. 이후에도 그들이 제국군이 전선에서 활동하는 동안 뒤를 치려 들면 곤란하잖아?”
“그것도 그런가.”
“대충 대족장과 족장들, 그리고 대전사들의 자제들을 모조리 인질로 잡는 정도면 그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겠지.”
“그건 좀 심하지 않냐.”
“전쟁에 심하고 말고가 어딨어. 어쨌든 바로 가야 돼. 움직여.”
카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인이 무언가를 조그맣게 구시렁거렸지만, 로엘은 그것을 못 들은 체했다.
이내 다섯 사람이 공간문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
“자, 잠깐!”
우웅!
공간문이 소멸했다. 바르센 백작은 오른손을 내뻗은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휘이잉.
성벽 너머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바르센 백작의 머리칼을 휘젓고 지나갔다. 그가 푹, 한숨을 내쉬며 내뻗은 오른손을 거두어들였다.
* * *
그로부터 정확히 한 달 뒤.
레인과 로엘은 이쪽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대족장과 마주하는 자리를 가졌다.
장소는 밀림지대 내 넓은 공터. 야만 민족 대표로 나온 대족장과 이르단의 뒤쪽엔 휘하 전사들이 늘어서 있었고, 제국 대표로 나온 레인과 로엘의 뒤쪽엔 제국군이 늘어서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뵙게 되어 유감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그쯤하고 넘어가지. 붙잡은 인질들을 어쩔 작정이지?”
“무사히 되돌려 보내드릴 겁니다. 제국이 모든 전쟁을 마무리한 뒤에. 그분들의 안위에 대해서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는다는 말이냐!”
대족장이 쾅! 하고 진각을 밟았다. 바닥이 움푹, 패여 들어가고 대지가 크게 진동했다.
그에 호응하듯, 뒤편에 늘어선 대전사들과 전사들이 흉흉한 기세를 뿜어냈다. 레인과 로엘을 압박하려는 것처럼.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레인이 한 차례 주위를 쓸어보았다. 그리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지. 먼저 제국의 영토를 침범해 들어온 건 너희들이다.”
쿠우웅!
그가 진각을 밟았다. 막대한 원형의 파장이 주위를 휩쓸었다.
“크윽.”
“으으으.”
전사들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옷자락이 펄럭였다.
자신들을 훑고 지나간 바람에 담긴 ‘무언가’. 그것을 느낀 그들이 일순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일방적으로 피해 입은 자들인 척,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을 뿐인 척하지 마라. 너희는 그럴 입장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되지요. 현재 제국에서 인질을 보호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더더욱.”
로엘이 레인의 말을 이어받았다. 방금까지와는 다른, 한없이 가라앉은 어조로.
쩌적, 하고 공기가 얼어붙었다.
마지막 로엘의 말은 분명한 협박성 발언이었다. 과연 그 발언에는 효과가 있었는지, 전사들의 기세가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이제야 대화가 통할 만한 분위기가 형성되었군요.”
금세 목소리를 되돌린 로엘이 한 차례 짝, 하고 손바닥을 부딪쳤다.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듯.
말이 대화를 나누자는 것이지, 실상은 이제부터 제국이 건네는 제안을 닥치고 받아들이라는 뜻이었다.
로엘의 태도와 발언에는 거침이 없었다. 지금은 비정해야 할 때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도 인질을 그리 오래 붙잡아두고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믿느냐는 말이다.”
“믿지 못하시면 어쩌시겠습니까. 전면전이라도 치르시겠습니까?”
“크으.”
대족장이 이를 갈았다.
안타깝게도, 인질을 떼어놓고 봐도 그들은 전력상 열세였다. 그들로선 영토에 진군해 들어온 제국군조차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이해합니다. 불안감이 드시겠죠.”
“…….”
“제국이 약조를 지키려 들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막상 시기가 되니 변심해 버릴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만약의 경우’는 넘쳐나니까.”
“그렇다. 우리에겐 확신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이렇게는 생각해 보지 못하셨습니까? 왜 제국이 지금 당장 인질을 앞세워 이쪽의 영토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들지 않는 것일까. 전력도, 사기도, 명분도, 전황도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데.”
“……그건.”
“직설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유는 제국이 그쪽의 영토를 통합의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괜히 자국으로 받아들여 봤자 득보다 실이 많으니까.”
로엘이 마치 상대를 깔보듯 내뱉었다.
애초에 제국은 너희 따위 안중에도 없다. 너희는 그저 설레발을 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가 전해지도록.
마족의 대륙 침공에 대한 것을 설명한다면 이보다 쉽게, 온건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로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족에 관한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운명의 현자가 남긴 아티펙트를 이용해야 하는데,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이제 1번밖에 남지 않았다. 그 사용처가 정해져 있기까지 했다.
그러니 지금은 강압적인 방식으로. 철저한 갑(甲)의 입장으로. 당장은 힘으로 눌러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저들을 아군으로 만드는 일?
추후 시간을 들여 그들과 교류하며 천천히 진행하면 될 일이었다. 외교적인 관계만큼 쉽게 뒤집히는 것이 없는 법. 로엘은 자신이 있었다.
“이것은 알아두십시오. 제국은 지금, 그쪽에 많은 것을 양보해주고 있습니다.”
“양보라고?”
“무력적으로 아예 짓눌러 버릴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있습니다. 그쪽에서 제국을 먼저 침공해 온 죄를 묻지 않고 있습니다. 인질을 돌려받고 싶으면 상응하는 무언가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
“그저 당신네들의 영토에 얌전히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차후 인질들을 되돌려주겠다는, 지극히 신사적인 제안을 건네고 있을 뿐이지요.”
정적이 흘렀다. 로엘은 그 정적을 음미하듯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이상 제국에 무언가를 바라지 마시길 바랍니다. 제국은 관대하지만, 당신들의 억지를 모두 수용해줄 만큼 호구이진 않습니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이 이상 ‘선’을 넘지 마라. 로엘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대족장은 자신들에게 남은 선택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한참을 고뇌하던 그가, 결국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제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
“대족장님!”
“그럴 수가!”
뒤쪽에서 전사들이 경악에 찬 외침을 토해내는 가운데, 그가 무섭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인질들의 신변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긴다면. 그들이 너희의 부주의로, 혹은 약속 불이행으로 인해 해를 입는다면.”
“…….”
“반드시, 그 피 값을 받아낼 것이다.”
피부를 저릿저릿하게 자극하는 기파에도 로엘과 레인은 태연한 신색을 유지했다.
로엘은 얼굴에 씌워진 가면을 추켜 올리며,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하시길.”
* * *
이후, 제국군은 순조롭게 전쟁을 수행해 나갔다. 오펜 왕국 정복에 이어 야만 민족과의 분쟁까지 마무리 지은 제국군은, 그대로 보르단 왕국을 공략하고 있는 군대를 지원하러 나섰다.
오펜 왕국의 남쪽에는 토우런트 왕국이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가운데에 펠라키 산맥이 놓여 있는 덕분에, 토우런트 왕국의 침략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마음껏 지원을 나갈 수 있었다.
좁은 지형적 특성을 살려 최소한의 병력으로 서쪽의 제국군을 막아내고 있던 보르단은, 갑작스럽게 추가된 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왕국의 전력 대부분은 르우벤이 이끄는 북쪽의 제국군을 막기 위해 발이 묶인 상태. 서쪽 관문을 격파한 제국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왕국 전역을 헤집기 시작했다.
한편, 메르타 왕국은 이미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만 상태였다.
국가의 암 덩어리인 고위 귀족들은 모두 숙청당했고, 굶주린 백성들에겐 구호물자가 배분되었다.
그나마 제 본분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던 귀족들은 대체로 회유되어 제국의 귀족으로 거듭났다. 형평성을 맞추기 위한 작위의 하락이 있긴 했지만.
그동안 내부적으로 곪다 못해 썩어들어가고 있던 국가인 만큼, ‘청소’를 끝마치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래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었기에 제국이 그것을 게을리하는 일은 없었다.
적당히 청소가 마무리되었다는 통신이 들어오자, 로엘은 곧바로 레인을 찾아갔다.
“넌 이제 바로 카르테리온 영지로 가라.”
로엘의 지시에, 레인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드디어 이날이 왔군.”
“그래.”
로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여 레인의 말을 긍정했다.
“이젠 검가를 세울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