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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화. 야만 민족(3) (214/249)
  •  215화. 야만 민족(3)

     에파른 요새를 둘러싼 제국군의 움직임에 변화가 일었다.

    “아니, 잘 공격하다 말고 왜 갑자기 군대를 물리라는 거랍니까?”

    “모르겠군. 왜 이런 지시가 하달된 건지.”

     하급 지휘관들이 의아해하면서도 병사들을 물렸다. 요새 공략을 잠시 멈추고, 일대를 죽 포위하는 형태로 늘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요새 내부에 식량이 다 떨어질 때까지 가둬둘 생각인가? 알아서 괴사하도록?”

    “정말로 그런 거라면 총사령관님의 머릿속을 헤집어봐야지요. 웬 흑마법에 잠식되어서 지능이 퇴화되기라도 한 건지.”

     한 지휘관의 중얼거림에 부관이 고개를 저었다.

     실로 그 말대로였다.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린다? 언뜻 괜찮은 전략인 듯싶지만, 실상은 허점이 차고 넘쳤다.

     우선 저들이 축적하고 있는 식량만 해도 5개월 치다. 그 시간을 여기서 죽치고 있으라고? 그게 말이 되는가. 전쟁의 장기화는 제국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게다가 에파른 요새는 토질이 비옥하고 수량이 풍부해 어느 정도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군대를 유지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들이 비축한 5개월 치 식량이 바닥나기 전에 가을이 올 테니까.

     심지어 요새 방어군 이외에 수도의 왕국군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들에게 시간을 오래 주면 군대를 정비하고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혹시 특공대를 투입해 요새 내부의 식량을 불사르기라도 할 생각인 걸까요?”

    “설마. 그런 게 가능했으면 우리가 이 고생을 안 하지.”

    “그렇지만 지금 제국군이 이동하는 것을 보면, 그런 계획을 세운 것이라도 아니고서야…….”

    “그렇다면 더 이해가 안 되지. 지금 제국군이 갖추고 있는 포위망은 외부의 보급을 차단하는 데엔 적합해도, 내부의 적이 전력을 집중해 단숨에 꿰뚫고 나가려 들면 속수무책일 정도로 빈약하니까.”

    “그렇습니까?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요.”

     지휘관의 말대로였다. 포위망이 넓어질수록 병력의 밀집도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니까.

    “그럼 대체 뭘까요.”

     부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각 길목부터 강줄기까지. 보급이 올 만한 위치를 전부 틀어막고 있는 제국군. 그러나 그 의도는 불분명. 의문이 일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뭐 윗선들 생각 이해할 수 없는 게 하루 이틀이냐. 그냥 까라면 까야지.”

     지휘관이 소리 나게 목을 꺾으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내 그가 크게 소리쳤다.

    “빨리빨리 움직인다! 오늘 내로 지정받은 포인트에 도착해야 하니 서두르도록!”

     * * *

     병력이 움직이고 있는 동안, 로엘은 엘리제와 함께 보르단 왕국을 공략하고 있는 르우벤을 찾아갔다.

    “무슨 일이야?”

    “별건 아니고, 너희 용병 대원 한 사람 좀 빌리자.”

    “누구를?”

     로엘이 손가락으로 한 여인을 가리켰다. 여인이 갑작스러운 지목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스스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녀는 왜?”

    “에파른 요새 공략전을 조금 빠르게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거든.”

    “뭘 하려는지 대충 알겠네. 확실히 그녀는 아직 대륙에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드러내 보인 적이 없으니 적의 의표를 찌를 수단으로는 제격이지.”

     르우벤은 눈짓으로 여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데려가.”

    “고맙다.”

     이내 여인과 로엘, 엘리제 세 사람이 다시 공간문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 * *

     우우웅!

     에파른 요새의 중심. 영주관.

     그 지붕 위로 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사람은 엘리제 파르테인,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럼, 지금부터 한동안 제 안전을 부탁드릴게요.”

     땋아서 정리한 연갈색 머리칼. 온몸을 감싼 헐렁한 로브. 수수하면서 지적으로 보이는 얼굴. 그리고 조그마한 외눈 안경.

     곤충과 벌레의 현자, 릴리스 레비아틴.

     그녀가 르우벤에게 받은 아티펙트, ‘악몽의 요람’을 열었다. 그러자 그 내부로부터 수많은 메뚜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웅!

     단숨에 창공을 새까맣게 뒤덮는 메뚜기의 무리.

     평범한 메뚜기떼가 아니었다. 고대의 현자가 남긴 유산을 지난 시간 동안 크게 번식시켜 만들어낸, 곤충의 군세였다.

     그녀가 20년이라는 기간이나 르우벤의 아래서 일할 결심을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 키메라에 가까운 흑색 메뚜기가 내부에 보존된 아티펙트. 이것이 미치도록 탐이 나서지.

     일반적으로 아공간은 그 내부에 생명체가 기거할 수 없다. 그런데 대체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이 '악몽의 요람' 내부에는 메뚜기들이 생존해 있었다.

     다른 곤충을 넣어 보았으나, 그치들의 생존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아공간 내부의 생태계를 이 이상 변화시키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긴 곤충의 현자가 아예 곤충을 개량시킨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막대한 보존 식량과 함께 동면하고 있던 단 네 마리의 메뚜기는, 지금에 이르러선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증식한 상태였다. 번식률이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유지비용이 보통이 아니었지만, 그 전략적 가치가 굉장히 높음을 아는 르우벤은 그녀를 충분히 지원해주었다. 현재 모습을 드러낸 메뚜기 군단의 탄생 배경은 그러했다.

     릴리스가 말했다.

    “자아, 얘들아.”

     더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이곳의 모든 식량을 먹어 치워 버리렴.”

     치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마치 그녀의 말에 화답하듯, 메뚜기 떼가 일제히 크게 울었다. 단숨에 요새 곳곳을 헤집기 시작하는 검은 물결.

    “뭐, 뭐야!”

    “크악! 가, 갑자기 이 무슨?!”

     메뚜기 떼가 게걸스럽게 요새 내 모든 것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거의 검지만 한 메뚜기들의 향연에 요새 내 병사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키메라에 가까운 메뚜기들은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 제대로 잡식성이었다.

     푸줏간의 고기도, 막 병사들이 배급받은 식량도, 심지어 길거리에 버려진 음식물쓰레기조차도. 메뚜기떼가 휩쓸고 지나간 곳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 막아!”

    “대체 이걸 무슨 수로!”

     식량이 보관된 창고들은 이중 삼중으로 마법적인 방비가 되어 있었다. 특공대의 침입을 대비해 언제든 고위 전력이 뛰쳐나올 준비를 해두고 있었고.

     그러나 메뚜기 대군의 앞에선 그 모든 게 무용지물이었다.

     쾅! 콰르릉! 콰과광!

     화염 계열 마법의 폭발이 일었다. 강대한 전격 계열 마법이 사위를 휩쓸었다. 바람 계열 마법이 주위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휘몰아쳤다.

     수백, 수천의 메뚜기들이 그에 휘말려 단숨에 목숨을 잃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대지로 떨어져 내리고, 단숨에 잿더미로 화해 흩날리고, 폭풍에 휘말려 갈가리 찢겨 나갔다.

     그러나, 메뚜기의 물결엔 끝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릴리스 레비아틴의 손에 들린 주머니로부터 계속해서 메뚜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메뚜기들이 몸을 날려 철문을 들이받았다.

     쿵! 쿵! 쿵! 쿵!

     문은 열리지 않았다. 충돌로 인한 충격에 메뚜기들이 기절해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다음 메뚜기가, 또 그다음 메뚜기가 계속해서 철문을 들이받았다.

     철문이 조금씩 조금씩 우그러들었다. 힘도, 내구력도 통상의 메뚜기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이 흑색 메뚜기들은, 정말로 그렇게 무식한 방식으로 단단한 철문을 뚫어내 버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

     단숨에 창고 내부를 휘젓는 메뚜기떼. 뒤늦게 나타나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된 요새의 고위 전력들이 당황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마법사! 마법사는 빨리 화염 마법이라도 날려! 저것들 태워 버리라고!”

    “화염 마법 갖고 저 끔찍한 놈들은 모조리 처리하라고? 그게 가능할 것 같소?! 게다가 식량에 불이라도 붙으면…….”

    “지금 그 식량이 다 없어져 버릴 위기이지 않소!”

     차라리 상대가 인간이었다면, 그저 뛰어난 실력자의 무리였다면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건 도저히 답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요새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분산된 식량창고들이 죄다 털려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 * *

     원래 역사에서 릴리스 레비아틴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이러했다.

    [사용하기에 따라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 힘을 지닌 여인.]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 자신의 진가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지닌 바 힘의 강점이 뚜렷한 만큼 약점도 뚜렷했다. 바로 술사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영 부실하다는 것.

     현재 그런 그녀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 바로 엘리제 파르테인이었다.

    “저 여자다! 저 여자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다!”

    “저 여자만 제압하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

     몰려드는 초일류, 초인급 전력들. 그들을 향해 엘리제 파르테인이 강력한 공간 마법을 뿌렸다. 동시에 릴리스를 공간의 저편에 밀어 넣어 보호했다.

     쾅! 콰드드드드드! 콰르릉!

     엘리제는 지난 3년간의 폐관 수련을 통해 전보다도 훨씬 강해졌다. 이제는 초월자의 초입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말이 초입이지 그녀가 익힌 것은 다름 아닌 대륙 최강의 마법 중 하나라 평가받는 ‘공간 마법’이다. 실질적인 무력 수위는 그보다도 위였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요새를 수호하는 검성 중 하나, ‘블리스 벨 카르론’이 이를 갈았다.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에도 요새에 비축된 식량은 시시각각 줄어들어 가고 있다. 최대한 빠르게 저들을 없애야만 그나마 남은 식량이라도 보존할 수 있건만!

     그가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한계까지 응축시킨 검강 십여 개를 단숨에 쏟아내며, 온몸에 두른 기막을 한계까지 강화시킨 채 돌진했다.

     그런데 그때.

     릴리스 레비아틴이 작게 말했다.

    “끝났습니다. 이제 돌아가죠.”

     끄덕.

     엘리제 파르테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목격한 블리스는 머리를 세게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두 눈에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담겼다.

    ‘버, 벌써? 벌써 요새의 식량이 모조리 거덜 났다고?’

     그런 그의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엘리제 파르테인이 무심하게 마법을 발현했다.

    <공간 이동(Space movement)>.

     허공에 생성된 공간문. 릴리스가 먼저 그 문을 통과해 모습을 감췄다.

     통과 직전,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한동안은 또 이 녀석들 번식시키는 데에만 집중해야겠네.”

     뒤이어 엘리제 파르테인까지 공간문 너머로 사라졌다. 사위에 정적이 감돌았다.

    “…….”

     블리스가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를 허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툭. 투툭.

     요새 내부를 떠돌던 메뚜기들이 하나둘 힘을 잃고 대지로 떨어져 내렸다. 이 메뚜기들은 다 좋은데 ‘악몽의 요람’을 벗어나면 오래지 않아 목숨을 잃는다는 결함이 있었다.

     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툭.

     이내, 마치 접시에서 콩이 쏟아지는 듯한 소음이 도시 전역에 울려 퍼졌다.

     * * *

     제국군 진영으로 무사 귀환한 두 여인을, 로엘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두 분.”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로엘이 두말 않고 그녀들을 보내주었다. 이어서 병사들에게 음식과 목욕, 침소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정말이지, 악랄한 전략이로군.”

    “어디까지나 릴리스 양이 있었기에 펼칠 수 있었던 전략이지. 매번 쓸 수 있는 전략은 아니다만.”

     바르바젠의 헛웃음에 로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곳 에파른 요새는, 실전에서 활용하기엔 여러모로 제약이 많은 릴리스의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특수한 지리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안 그래도 릴리스라는 ‘조커’를 대체 언제쯤 사용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떠나간 뒤엔 메뚜기떼의 시체가 요새에 남지 않나? 저들이 그걸 식량으로 삼으면 어쩔 생각이지?”

    “걱정 안 해도 돼. 독성이 있어서 식용으로 쓸 수는 없다는 모양이니까.”

    “끔찍하군.”

    “이제 요새에 남은 식량이래 봐야 기껏해야 몇 마리 남지 않은 가축이 전부겠지. 얼마나 버티려나.”

     로엘이 큭큭 웃었다.

     실로 마왕조차 울고 갈 사악한 웃음이었다. 다섯 마왕의 힘을 다루는 바르바젠조차 일순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을 정도였다.

     바르바젠이 손바닥으로 비스듬히 턱을 괴며 말했다.

    “아마 경우의 수는 두 가지겠지. 버티고 버티다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항복해 오거나.”

    “아직 병사들의 체력이 남아있을 때, 전력을 집중해서 포위망을 강행 돌파하려 하거나.”

     로엘이 크게 기지개를 켜며 뒷말을 이어받았다.

    “어쩌려나. 개인적으론 후자의 경우였으면 하는데. 그래야 상황이 더 빠르게 종결될 테니까.”

     사실 그것을 노리고 포위망을 느슨하게 만든 것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저들이 길을 뚫으려 들면 어쩔 생각이지? 현재 제국군이 갖추고 있는 포위망으로는…….”

    “그건 괜찮아. 내 직속 전투팀 한 팀에 통신기를 배부해서 각 포인트로 보내뒀거든. 연락이 오는 쪽으로 내가 직접 움직일 거야. 엘리제 파르테인과 함께.”

     그리고 그곳에 내려서자마자 아공간에 잠든 언데드 군단을 풀어놓을 생각이었다.

     다섯 각성자 중 ‘군단을 상대로 한 전투’에 가장 뛰어난 이를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로엘이었다. 그렇게 그가 적들의 발목을 붙잡아 놓으면, 그 사이에 제국군은 포위망을 좁히면 될 터였다.

    “이건 무슨 개미지옥도 아니고.”

     바르바젠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피식, 하고 웃었다.

     * * *

     그로부터 정확히 열흘 뒤, 요새에 백기가 올랐다. 안타깝게도 로엘이 원했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국군은 별다른 피해 없이 요새를 점령, 그대로 왕국의 수도를 향해 진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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