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야만 민족(2)
“제국!”
백작의 눈이 확 하고 뜨여졌다. 벌써 지원군이 왔다는 말인가!
“이곳을 지원하기 위해 제국에서 병력을 파견했다는 말이오?”
“아니, 병력은 아니고.”
“그럼?”
“일단은 나 혼자로군.”
“아! 먼저 와서 지원군의 존재를 알리려고 하신 것이오? 난 또 그런 것인 줄 모르고…….”
“한 명 더 올 거다.”
“…….”
백작이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대체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그러니까 눈앞의 젊은 청년이 지금, 제국에서 이곳으로 단 두 사람만을 지원군으로 파견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보다, 상황을 설명해…….”
“없는 것인가! 이 이르둔을 상대할 용기 있는 자는!”
“……줄 필요까지도 없나.”
레인이 고개를 돌렸다. 상황이 참 명쾌해서 좋았다.
저쪽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야만 종족 특유의 사슬 갑옷을 착용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깃털 장식이 잔뜩 달린 가면을 벗어 던지며 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레인이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이곳에 오기 전, 로엘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가서 최대한 시간 좀 끌어. 너와 카트란이 백작군에 가세하면 꽤 오래 버틸 수 있겠지.]
[나와 카트란만으론 언제까지고 버틸 수가 없을 텐데. 지원군은 언제 보내줄 생각이지?]
[아까도 말했지만, 여유가 없어. 전선에 나가 있는 군대를 회군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륙통합 전쟁은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되어야 하니까.]
[그래서? 지원은 없다고?]
[어. 대신 오펜 왕국을 정리하고 나면 그 군세 그대로 야만 민족의 영토에 진군시킬 거다. 그렇게 되면 놈들도 군세를 물리지 않을 수 없겠지. 그때까지만 버텨주면 돼.]
[말이 쉽지.]
[괜찮아. 내 일 아니야.]
[이딴 놈을 친구라고.]
다시 생각해 봐도 열 받았다. 이쪽도 그동안 전적이 많은 터라 결국 그 이상의 불평은 내뱉지 못하고 움직였지만.
‘아직 카트란이 안 왔으니, 그전까진 내가 시간을 벌어야 하겠군.’
마침 일기토를 벌이고 있는 듯하니 딱 좋았다. 시간도 벌고 놈들의 사기도 낮추고. 일석이조다.
‘아니, 아예 판을 조금 더 키울까.’
그러다 이내 생각을 살짝 수정하는 레인이었다. 이왕 하는 거 조금 더 스케일 크게, 놈들에게 더욱 압박감을 줄 수 있는 방식으로.
그가 성벽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곤 대전사 이르둔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더 도전할 자가 없다면······?”
이내 이르둔이 레인을 발견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다음 도전자인가? 꽤 젊군?”
적어도 레인은 겉보기로는 그 경지를 짐작할 방법이 없었다. 이르둔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도 당연했다.
레인이 이르둔의 바로 앞까지 와서 섰다.
이번에는 이르둔도 갑작스레 달려들어 기습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무슨 의도지?”
“뭐가.”
“내 실력을 보았을 텐데.”
“그래서.”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너처럼 젊은 검사가 날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진심으로?”
“말이 많아.”
레인은 곧바로 한 발을 내디뎠다. 곧바로 이르딘이 반응했다.
각자 내디딘 발을 축으로 중심을 고정하고, 일장을 내질렀다. 이르단은 마치 짐승의 발톱과도 같이 구부러진 손을, 레인은 쫙 펴진 손바닥을.
쿠우우우웅!
충돌의 순간, 이르단은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뭐야. 이 자식, 힘이?’
방심했다. 상대가 이쪽에 ‘맞춰준’ 것이 아니었다면 큰 낭패를 보았을 뻔했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이르단이 오라를 단숨에 끌어올렸다. 자신이 가능한 전력을 다했다. 그에 호응하듯 힘을 끌어올리는 레인.
쿠콰콰콰콰콰콱!
두 사람을 중심으로 거센 바람이 일었다. 주위 대지가 두 사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파에 마구 패여 나갔다.
“아!”
그리고 그즈음, 성벽 위의 한 기사가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경악한 얼굴로 백작에게 말했다.
“배, 백작님! 저 청년, 천검제입니다!”
“뭐?”
“요즈음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그 천검제라는 말입니다!”
백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천검제의 위명은 그도 그동안 숱하게 들어왔다.
“으아아아아!”
쿠콰아아앙!
그리고, 이르단이 끝내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의 신형이 대포처럼 튕겨 나가 대지에 충돌했다. 그러고도 여력이 해소되지 않아 몇 번을 더 튕겨 지고, 굴러갔다.
야만 민족의 진형 바로 앞까지.
“……!”
대족장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초월자인 이르둔을 이렇게 몰아붙일 수 있는 인물이라니? 그런 존재는 적어도 구 왕국령에는 존재하지 않을 텐데?
와아아아아아아아!
성벽 쪽에서 병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후유증이 큰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르둔. 그가 이를 갈며 레인 쪽을 노려보았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포효하며 재차 달려 드려는 그의 시야에, 이상한 광경이 잡혔다. 자신을 날려버린 청년의 그림자로부터 거대한 검 한 자루가 밀려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청년이 그 검을 양손으로 붙들고, 뒤로 크게 당겼다. 그러자 검 표면에 압도적인 기파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
“이 미친!”
이르둔의 등줄기에 쫙, 하고 소름이 돋았다. 대족장과 휘하 대전사들도 같은 감정을 느꼈는지 저마다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내, 청년이 거검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이르둔과 대족장을 포함한 민족 최강의 아홉 전사가 일제히 산개해 ‘그것’을 받아냈다. 이것을 막지 않으면, 대참사가 일어난다!
콰드드드드드드드드드!
그 크기만도 수백 미터에 달하는 규격 외의 검강. 아홉 전사가 괴성을 내지르며 각자의 병기로 그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썼다.
단순히 이 검강을 회피하는 건 쉽다.
반으로 갈라버리는 것도 쉽다.
아홉 전사 중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보다 밀집도가 높은 검강을 생성해 받아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러나 뒤쪽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날아드는 검강의 기세를 ‘억누르는’ 일은 아홉 전사가 동시에 달라붙어도 힘에 부쳤다!
“크아아아아아아!”
“우워어어어어!”
지난 수년간 쉬지 않고 영약을 섭취했음은 물론, 더욱 성장한 레인이다. 이전에 메르타 왕국에서 시전했던 검강과는 그 위력이 차원이 달랐다.
쿠르르릉!
결국, 힘을 다한 검강이 소멸했다. 아홉 전사가 저마다 숨을 몰아쉬며 신형을 휘청였다.
그리고 마치 그 순간을 노렸다는 듯. 가운데에 위치한 ‘대족장’을 향해, 레인이 크게 도약해 비스듬히 떨어져 내려갔다.
“크윽?!”
대족장이 급히 신형을 바로 세우고 레인의 공격을 맞받았다.
방금 전 이르단과 레인이 벌인 것과 같은 장력의 충돌. 차이점이 있다면 이번엔 레인 쪽이 갈퀴처럼 구부린 손이고, 대족장이 쫙 펼친 손이라는 점일까.
콰아아아앙!
손과 손의 맞부딪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폭음이 울려 퍼졌다. 충돌의 와중, 대족장과 레인의 시선이 잠시간 교차했다.
대족장이 크게 신형을 휘청이고, 레인이 멋스럽게 공중제비를 돌아 뒤로 물러났다.
“이놈!”
“감히 대족장님께!”
곧바로 몰려드는 대전사들. 레인이 미련 없이 신형을 물렸다. 그대로 성벽까지 되돌아가 자취를 감췄다.
대전사들도 무리하게 추격하지 않았다. 대신 대족장의 안위부터 챙겼다.
“괜찮으십니까!”
대족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축 늘어진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팔이 부러졌군. 제대로 허를 찔렸어.”
이 정도 외상쯤, 치료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건 부상 자체가 아닌 정신적인 충격이었다.
그가 성벽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저자가 제국 최강의 무인이라는 천검제인가.”
“그런 듯합니다.”
“명성에 걸맞은, 아니 그 이상의 실력이더군.”
“…….”
아무리 강한 상대더라도 제대로 붙으면 이기지 못할 것도 없다고, 이쪽이 질 리가 없다고. 가슴을 두드리며 외치고 싶었지만, 대전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호전적인 대전사들이라도 지금 이 상황에 그런 말을 꺼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감정은 감정이고, 현재 눈앞에 펼쳐진 결과는 결과였다.
“일단 물러난다. 지금 바로 공격을 감행하기엔 분위기가 영 좋지 않군.”
“알겠습니다.”
결국, 그들은 군대를 일시적으로 물리기로 했다. 지금 당장 감정대로 들이받아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하에.
그리고.
그렇게 그들이 물러나 대족장의 치료에 시간을 소모한 사이에, 카트란이 바르센 백작령에 도착했다.
* * *
한편, 로엘은 오펜 왕국으로 진격한 제국군에 합류했다. 바르바젠이 그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어둔 대귀족이 이끌고 있는 군세였다.
“네가 여기는 무슨 일이지? 한참 노러츠 쪽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되도록 오펜 왕국을 빨리 정리하려고. 힘을 좀 보탤게.”
“흠. 엘리제 파르테인을 데려왔더군.”
“어. 그녀라면 상당한 도움이 되겠지. 전황은 어때?”
“순조롭다. 차근차근 밀어붙이고 있지. 아무리 공격 측이라도 지금의 제국군이 일개 왕국에 고전할 턱이 없잖나.”
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오펜 왕국은 소국이었다. 안타깝게도 이웃이자 대국인 보르단에 지원을 요청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이번에 보르단 왕국은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제국군에 맞서게 되었다.
특히 구 칼투스 왕국령에서 쏟아져 나온 군세가 문제였다. 그 군대를 막아내기 위해, 보르단은 오펜과 인접한 국토를 일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는 네파림 산맥과 펠라키 산맥으로 이루어진 천연의 장벽 너머로 군세를 물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오펜 왕국에서 지원 요청을 보낸다고 뭘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즉, 오펜 왕국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제국군이 괜히 그렇게나 빠르게 아이렌과 칼투스를 점령한 것이 아니었다. 괜히 숨 고를 틈도 없이 곧바로 군대를 재진격시킨 것이 아니었다. 그 모두가 이와 같은 상황을 만들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대로만 밀고 나가도 충분하겠지만, 조금 서두를 필요가 있으니 한동안 내게 군사작전권을 넘겨줄 수 있겠어? 물론 전면으로 나설 생각은 아니고.”
“어렵지 않지. 현재 제국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이 내 꼭두각시니까. 다만 조급함에 일을 그르치지는 않았으면 싶군.”
“걱정 안 해도 돼. 그럴 일 없을 테니.”
로엘이 빙긋, 하고 웃었다. 바르바젠이 자연스럽게 잘난 체를 하는 로엘을 응시하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두 사람은 이내 자리를 옮겼다.
장소는 꼭두각시 총사령관의 막사. 로엘은 그곳에서 제국군의 현 상황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에파른 요새에 가로막혀서 진격이 늦어지고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주위가 강으로 둘러싸인 데다가 성문으로 향하는 길목도 좁아 대군의 진입이 힘든 요새입니다. 농성을 위한 준비도 잘 되어 있고, 식량도 최소 5개월은 버틸 분량을 쌓아두고 있는 듯합니다.”
꼭두각시 총사령관이 정중하게 말했다. 로엘이 탁자에 팔꿈치를 얹은 채 머리를 긁적였다.
“정공법으로 뚫는 수밖엔 달리 방법이 없더군. 공중 병단을 활용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건 비장의 수로 남겨둬야 하니까. 시간을 들이면 결국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만.”
바르바젠이 첨언했다.
로엘은 고민했다. 여기서 공중 병단이란 패를 꺼내 들어야 하는가?
확실히 공중 병단을 활용하면 에파른 요새의 지형적 특성을 무효화할 수 있다. 기습적인 침공으로 단숨에 요새를 점령할 수만 있다면, 오펜 왕국을 집어삼키는 데 들여야 할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겨우 시간 단축을 위해 활용하기엔 공중 병단이 아깝다. 이왕이면 최대한 아껴뒀다가 바트레인 공략전에 활용하고 싶다. 숨겨둔 비장의 수로.
“아.”
그런데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계책이 있었다.
로엘은 한동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진중한 얼굴로 총사령관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총사령관이 성심성의껏 답변했다.
모든 답변을 들은 로엘이 씩 웃으며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