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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화. 전쟁의 서막(2) (211/249)

 212화. 전쟁의 서막(2)

“자, 그럼.”

 로엘이 허리를 쭉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나도 움직여야지.”

“어디 갈 건데?”

“노러츠.”

 방을 나서는 로엘을 레인이 배웅했다.

 로엘은 건물 복도를 걸어가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목적지는 노러츠의 플뢰비르 영지. 오랜 시간에 걸쳐 완전히 이쪽 사람으로 회유해둔 영주와 접촉하고, 그 이후엔…….

 차칵.

 그 순간, 갑자기 귓가에 들려오는 이명. 마치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면서 나는 것과 같은 소음.

‘이건.’

 로엘이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곤 그 안에서 한 가지 아티펙트를 꺼내 들었다.

‘시간의 현자가 남긴 유산.’

 영웅과 악마의 유적. 그 공략의 끝에 획득한 회중시계의 형태를 띤 아티펙트.

 로엘은 확신했다. 이명은 분명 이 아티펙트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도 그럴 게, 이번이 벌써 ‘네 번째’였으니까.

“…….”

 로엘이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서서 아티펙트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떠오르는 룬 어.

[아티펙트 기동을 위한 조건 달성 - 4/5]

‘숫자가 늘었다.’

 로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처음 이명을 들은 것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공방에서 아티펙트를 작동시켜 보았을 때. 그때, 차칵 하는 이명과 함께 이런 글귀가 떠올랐었다.

[아티펙트 기동을 위한 모든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조건이 1가지 충족되었습니다]

[아티펙트 기동을 위한 조건 달성 - 1/5]

 그 당시엔 이명 자체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사실 이명이 눈앞에 떠오른 글귀와 연관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두 번째 이명을 들은 것은, 알테라 시 공방전 이후 프레퍼의 조직 거점을 정리했을 때였다. 각 거점을 정리했다는 동료들의 통신을 듣던 와중, 시곗바늘 움직이는 이명이 다시 들려왔다.

그때는 로엘도 이 이명이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임을 눈치챘다. 회중시계형 아티펙트를 꺼내서 조건이 2가지 충족되었다는 내용을 확인했음은 물론이다.

‘세 번째 이명을 들은 건 대협곡에서 드워프와의 동맹 협정을 완전히 끝마쳤을 때였지.’

 그리고 지금이 네 번째였다.

“흠.”

 로엘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생각을 정리하고 보니,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이 조건의 달성이라는 것, 소유주가 어떠한 행보를 보이느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건가?’

 첫 번째 이명은 아티펙트를 기동시켰을 때 들려왔다. 아마 아티펙트의 기동 그 자체, 혹은 유적 공략이 이명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두 번째 이명은 프레퍼를 실질적으로 괴멸시켰을 때 들려왔다. 세 번째 이명은 모든 아인종을 아군으로 끌어들였을 때 들려왔고.

 네 번째 이명이 들려온 원인 또한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대륙통합 전쟁.’

 언뜻 보기에, 이 네 가지 일에는 명확한 공통점이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사실 명확한 공통점이 한 가지. 딱 한 가지 존재했다. 바로 그 모든 일에 아티펙트의 소유주인 로엘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

“후.”

 로엘은 회중시계를 다시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이 물건에 관한 고민은 조금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어차피 이 이상의 정보가 없기에 더 이상 고민해 봐야 시간 낭비였다. 이후에 모든 조건이 충족된다면 자연스럽게 의문을 해소할 수 있게 되겠지.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겨 복도를 가로질렀다.

 * * *

 그 시각, 칼투스 왕국으로 진입한 제국군.

 그 군대의 최선두에 선 인물은 레인의 제자이자 이번에 초인의 경지에 오른 강자, ‘레이나’였다.

 오늘은 그녀와 그녀가 이끄는 무력대의 실력을 세상에 드러내는, 공식적인 데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레이나와 그녀를 뒤따르는 무력대의 앞을 가로막은 이들은 칼투스 왕국 소속 검가, ‘에카인’ 가문의 무력대.

 에카인 가문은 상당히 특이한 무기를 사용하기로 유명했다. 바로 ‘소드브레이커’라는 무기를.

 칼날에 깊게 홈이 패여 있는 이 검은, 사실 실용성이 굉장히 낮은 물건이었다. 적어도 일반인이 들었을 때는.

 그러나 에카인 가문 소속 무인이 이 검을 들게 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은 검에 패인 홈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상대의 공격에 제동을 걸고, 심한 경우엔 상대의 무구를 부숴버리기도 했다.

 그들 무력대의 선두에 선 인물은 가문의 원로원에 속한 초인. ‘브루셀’.

“그 천검제가 키워낸 무력대라고 들어서 긴장했다만, 설마 연령층마저 그와 같이 낮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군.”

 그가 스산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천검제에겐 빚이 있지. 오늘 그 빚을 갚겠다.”

 에카인 가의 가주는 레인의 도전을 받아들였다가 처참하게 깨진 이력이 있었다.

“…….”

 레이나가 혼자서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아군과 적군의 진형 중간 즈음에 선 뒤, 브루셀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일기토를 요청합니다. 받아들일 생각이 있으십니까?”

“뭐라?”

 브루셀이 안면을 실룩였다.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저렇게 새파랗게 어린 여인이, 이쪽에 도발을 걸어온다? 그렇게 자신이 얕보였다는 말인가?

“어린 계집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그가 커다란 호통과 함께 신형을 날렸다.

 거절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사실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현재 칼투스 왕국은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온 제국에 의해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에카인 가문은 제국군을 상대로 시간을 끌어야 하는 입장이었고.

 일기토라면 시간을 끌기 위한 수단으로 굉장히 적합했다. 게다가 안 그래도 아군의 사기가 낮은 판국에, 저렇게 젊은 여인의 도발마저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간 문제가 커진다.

 브루셀이 레이나를 마주 보고 섰다.

 가까이서 보니 살 떨리도록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순간적으로 평정심이 흐트러질 뻔했다.

 이쪽이 막대한 기파를 뿜어내며 압박하고 있음에도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는 여인. 그 모습에, 브루셀은 순간적으로 불안감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이 상황, 낯설지가 않다. 천검제도 그 어린 외견을 하고서 초월자의 영역에 이른 가주를 손쉽게 꺾지 않았던가?

‘설마.’

 브루셀은 불안감을 털어버렸다. 설마 그 같은 괴물이 세상에 또 있겠는가.

“오라. 선수를 양보하지.”

 이내 두 사람이 맞붙었다.

 선공을 취한 것은 레이나. 특유의 직선적이고 단조로운 검격으로 브루셀의 옆구리를 노렸다. 그 검격에 실린 무게감이 이전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윽.”

 브루셀이 검격을 걷어내며 살짝 신음을 흘렸다.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무겁다!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검격. 그 모두가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단순하기 그지없는 공격이었다. 브루셀이 기형 병기와 튼튼한 육신의 이점을 앞세워 그 모든 공격을 받아냈다.

 한참 공방을 주고받던 중, 그가 소드브레이커의 홈으로 레이나의 검을 맞받아 끼웠다.

“크윽!”

 단숨에 비틀어 검로를 틀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검격에 실린 힘이 심상치가 않았으며, 미묘하게 ‘타이밍’이 어긋났기 때문. 억지로 힘주어 버티다가는 오히려 검과 함께 통째로 들려버릴 판이었다.

 결국 이어진 연격을 기막으로 때우다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브루셀이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숨을 골랐다.

‘젠장. 정말로 괴물이었다니.’

 천검제처럼 대륙 최강을 논할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초인의 영역에 이르러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저 나이에 초인이라니. 아무리 봐도 이십 대 초반을 벗어나지 않은 얼굴로밖에 보이지 않거늘!

“실례인 건 알지만, 물어두고 싶군. 나이가 어떻게 되지?”

“스물넷입니다.”

 레이나는 딱히 숨길 것도 없다는 듯 시원스레 답변했다. 일부러 목소리에 내력까지 실어 가며.

 에카인 가문 측 무력대원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괜한 질문을 했군.”

 괜히 아군의 사기만 낮춰 버렸다. 브루셀이 입술을 짓씹으며 곧바로 레이나를 향해 짓쳐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싸움, 절대 질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브루셀이었으나, 원래 현실은 생각대로 풀리는 일이 좀체 없는 법이었다.

 과거 레인이 레이나를 데리고 빌헬름 공작가를 방문했을 때, 그는 공작과 함께 그녀의 대련을 지켜보며 이런 말을 했었다.

[그녀가 지금의 경지에서 한 단계만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이 나라의 초인들 중 그녀를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은 공작 전하 정도밖에 남지 않게 될 겁니다.]

 실로 그러했다. 아니, 그보다도 더했다.

 레이나의 압도적인 재능은 지난 3년 동안 완전히 개화하여, 지금에 이르러선 대륙의 그 누구라도 그녀를 쉽게 볼 수 없는 수준에,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브루셀의 실력은 그녀에게 미치지 못했다.

“커헉.”

 끝내 패배하고만 브루셀. 그가 차디찬 대지에 무릎 꿇려졌다.

 퍽!

 레이나가 검 손잡이로 그의 뒷목을 가격해 기절시켰다.

 곧바로 뒤쪽 진형에서 뛰쳐나온 주술 전사 한 사람이 브루셀을 들쳐메고 아군 진형으로 되돌아갔다.

“…….”

 모든 이들이 그 광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침을 삼켰다. 제국군 측은 얼굴에 화색이 만연했고, 칼투스 왕국 측에는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레이나는 제자리에 늠름하게 선 채로 호흡을 고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진군.”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우렁찬 함성과 함께 진격하는 군대. 선두의 무력대의 경우엔 아예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커허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수인족 주술 전사들이 일제히 내지르는 짐승의 포효가.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전원이 초일류의 영역에 이른 대륙 최강의 무력대가 내지르는 포효가.

 사기가 크게 저하된 에카인 가문의 무력대가 그들과 맞서 뒤엉켰다. 그러나 실력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밀리는 탓에 금세 전황이 기울어졌다.

 어떻게든 전황을 되돌리기 위함인지 뒤늦게 가주가 레이나를 노리고 달려들었으나, 어느새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낸 바르바젠이 그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전장은 오래지 않아 정리되었다.

 그리고 이날을 기점으로, 레인 휘하 무력대인 ‘천검대(天劍袋)’의 명성이 대륙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 *

 한편, 바르베룸 왕국에서 카트넬 가가 이끌고 온 전력과 합류한 제국군은 루벨트 왕국을 우선적으로 노리고 진군했다.

 키사란 왕국의 경우엔 북쪽으로는 제국, 남쪽으로는 메르타, 동쪽으로는 팔키온 대산맥, 그리고 서쪽으로는 현재 제국군이 점령한 바르베룸 왕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즉, 완벽히 고립된 상태. 여유롭게 처리해도 좋은 상대였다.

 반면 루벨트 왕국은 남쪽으로 보르단 왕국과 인접해 있었다. 빠르게 정리하지 않으면 제국을 경계한 보르단 왕국에서 지원군을 보낼지도 모르는 상황. 그렇기에 우선적인 타깃이 되었다.

 그 제국군의 선두에 선 르우벤이 루벨트 왕국군을 향해 거대한 포효를 터뜨렸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의 외견은 3년 전과 상당히 달라져 있는 상태였다.

 왼팔은 보기만 해도 그 박력이 느껴지는 철갑에 뒤덮여 있었다.

 오른쪽 눈에는 인간의 그것과는 명백히 다른, 복잡한 마법진이 새겨진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각각 ‘광전사의 철갑’과 ‘마안(魔眼)’이라 불리는 최상위 아티펙트들. 사용을 위해선 멀쩡한 팔 한쪽을, 눈알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비인간적인 물건들이었다.

‘마룡’과의 일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르우벤은 쓸 수 있는 수단을 모조리 활용했다. 현재의 그의 외견은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나마 게르반의 유산인 ‘마안’은 활용에 익숙해지면 시야에 문제를 주지는 않는 물건이었다. 반면 과거 ‘왕의 유적’에서 습득한 광전사의 철갑 같은 경우엔 사용 시 평생 왼팔의 감각을 느낄 수 없게 되는 괴악한 물건이었다.

 그 탓에 르우벤은 마룡과의 일전을 끝마치고 한동안 낙심해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선 많이 나아졌지만.

 휘하 용병대가 그의 뒤를 따라 눈앞의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 중 가장 앞줄에 선 여섯 ‘조장’의 경우엔 과거 르우벤이 사용하던 ‘최상위 아티펙트 세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뒤처지지 마라!”

 뒤따라 움직이는 카트넬 가의 무력대. 선두에 선 가주와 전대 가주가 그들을 독려했다.

 제국군의 전력은 압도적이었다.

 무려 초월자의 숫자만 해도 셋이나 되었다. 거기에 그들을 뒷받침하는 초인급 전력도 적지 않았고. 루벨트 왕국군은 성벽을 앞세워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전력의 차이가 커도 너무 컸다.

 안 그래도 전력이 부족한데 전략적인 측면에서 완전히 허를 찔려 제대로 힘을 집중시키지도 못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북쪽에 집중시켜뒀던 병력을 아직도 전부 되돌리지 못했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촤악!

“성주의 목을 베었다!”

 몇 날 며칠을 이어진 전쟁의 끝에, 결착이 났다.

 제국군은 순조롭게 루벨트 왕국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 * *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제국은 다섯 왕국을 완전히 평정해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곤 곧바로 ‘새롭게 정비된 국경’에 인접한 세 국가를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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