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1화. 전쟁의 서막(1) (210/249)

 211화. 전쟁의 서막(1)

 로엘은 말했다.

“대륙통합 전쟁이라. 내가 살면서 이런 정신 나간 짓을 벌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지구였다면 설사 이곳 대륙과 같은 문명 수준이었대도 대륙 통합 따윈 꿈도 꾸지 않았겠지.”

“뭔 소리야?”

 레인이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엘레노어 대륙이 마음껏 대륙통합 전쟁을 벌여도 좋을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런가?”

“그렇지. 지구였다면 가능 불가능 여부는 둘째치고, 통합 이후가 더 문제였을 테니까.”

 로엘은 그렇게 말하며 큭큭 웃었다.

 엘레노어 대륙과 지구의 차이점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되기에 이런 말을 하느냐고? 말하자면, 가히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우선 엘레노어 대륙 각 국가에는 ‘언어의 장벽’이 없다. 이것 한 가지만 놓고 봐도 이미 배경적인 측면에서 비교가 되질 않는다.

 그리고 엘레노어 대륙은 이미 몇 차례나 통합과 분단의 역사를 경험했다. 이것 또한 의외로 굉장히 중요한 요인이었다. 주로 피지배계층의 마인드적인 측면에서.

 심지어 인종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문제도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황인족에 가까운 야만 민족이나 아예 종족이 다른 아인종의 경우가 있긴 하지만…….

‘애초에 그래서 그들을 통합의 대상이 아닌 동맹의 대상으로 삼은 거고.’

 그 외의 문제라고 해봐야 여러 갈래로 분류되는 ‘민족’의 차이 정도일까. 지구의 그것에 비유하자면 같은 백인 사이에서도 게르만족, 라틴족, 슬라브족 등등으로 나뉘는 것과 같은.

 그 정도라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됐고.”

 레인은 하품을 내뱉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는 이런 쪽의 이야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실리적인 이야기로 넘어갔으면 하는데. 조금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얼마든지.”

 레인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왜 공격을 안 해?”

 그가 묻고자 하는 바는 간단했다.

 제국은 자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다섯 왕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곧바로 군대를 진군시켜 다섯 왕국에 압박도 가했다.

 다만 그뿐. 그 이상의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레인은 그것이 못내 의아하게 느껴진 것이었다.

“되도록 속전속결로 끝낼 생각이라 하지 않았어?”

“그거?”

 궁금한 게 그거였냐는 표정을 짓던 로엘이, 일순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봐. 곧 재미있는 소식이 전해져 올 테니까.”

“……?”

 또 뭘 꾸미고 있는 건지. 하여간 이 녀석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레인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건 그렇다 치고. 너무 답답해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 아마 오래지 않아 너도 거하게 날뛰어야 할 테니까.”

 순식간에 특유의 사람 좋은 얼굴로 돌아온 로엘이 레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현재 모든 각성자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레인만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슬슬 휘하 무력대도 명성을 얻게 해 줘야지.]

 로엘을 비롯한 다른 각성자들의 조언.

 레인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의 명성을 쌓아 올렸다. 무려 ‘천검제’라는 칭호를 얻었을 정도니 말 다 했다. (참고로 이 칭호로 인해 레인은 다른 각성자들에게 한동안 집요하게 놀림을 받았다)

 이제는 그가 아닌, 그 휘하 무력대가 명성을 얻어야 할 때였다. 아무래도 레인은 그 존재감이 너무 커진 탓에 무력대와 함께 움직였다간 그들의 활약상을 반감시킬 우려가 있었다.

 그뿐만도 아니었다. 레인은 이미 대륙 최강을 논할 수준의 강자. 이 정도 무력과 명성을 지닌 인물이라면 조금 유동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는 전선에 그를 떡하니 배치해 놓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이쪽엔 ‘공간의 현자’가 있는 만큼 더더욱.

 다만, 그런 특별 취급에도 레인 본인은 약간 불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지닌 성향이 성향인 만큼 당연한 반응이라고 해야 할까.

“왜, 걱정돼서 그래?”

“아니. 그렇게 약하게 키우지 않았으니까.”

 로엘의 능글맞은 질문에 레인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무력대와 그들의 선두에 선 제자들의 진경은 이미 레인이 일일이 걱정해야 할 수준을 넘어섰다. 그들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아예 걱정되지 않으냐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 * *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다섯 왕국. 서쪽의 왕국부터 차례대로 그 이름을 나열하자면 이러했다.

 아이렌, 칼투스, 루벨트, 바르베룸, 키사란.

 제국의 선전포고가 있고 나서, 다섯 왕국은 경악하면서도 빠르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본적으로 대륙 최강국인 제국과 국경을 마주한 나라들인지라 모두 나름대로 만약을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기사의 나라 칼투스. 호전적인 성향이 짙은 이 국가는 곧바로 군세를 끌어모아 북쪽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다섯 국가 중 가장 강대한 전력을 지닌 나라답게 그 위세가 굉장했다. 국내 주전론파들 사이에선 제국의 군세가 다섯 갈래로 쪼개진 지금이 기회라는 이야기까지 오간다는 모양이었다.

 이 왕국에만큼은 로엘도 별다른 공작을 펼쳐놓지 못했다. 워낙 내부 결속이 단단한 국가라 파고들 틈이 그다지 없기도 했고, 힘들여 파고드느니 차라리 주변 국가를 공략하는 쪽이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렌, 칼투스 왕국과는 대산맥으로 인해 지형적으로 분리된 세 국가.

 루벨트, 바르베룸, 키사란.

 이 세 국가는 서로 동맹을 맺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각국의 사절단이 빠르게 서로의 국가를 오가며 세부적인 사항을 논의했다. 마치 진작부터 이런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런데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금방이라도 진격해 공세를 퍼부으리라 생각한 제국이, 막상 각국의 코앞에 도달해서 뭉그적거리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각국이 혼란에 빠져들었다.

 대체 왜 진군해오지 않는 것일까? 시간을 끌어서 제국에 이득 될 것이 없을 텐데?

 당연한 말이지만 다섯 왕국에게 제국은 공통의 적이었다.

 다섯 왕국이 힘을 모을 시간을 주는 것은 제국의 입장에서 절대 좋은 선택이라 할 수 없었다. 딱히 연합군을 결성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이 전쟁을 충분히 대비하도록 해서 좋을 게 없었고.

 그런데 오래지 않아 제국이 어째서 그런 움직임을 보인 것인지, 그 이유가 드러났다. 다름 아닌 다섯 왕국 중 서쪽 끝에 위치한 나라, ‘아이렌’으로부터.

 * * *

“공격!”

“중앙군이 국경지대로 빠져나간 지금이 기회다! 수도를 점령해라!”

 아이렌 왕국에서는 때아닌 내전이 한창이었다.

 표면적으론 몇 년 전 반란을 일으켜 제멋대로 왕위를 찬탈한 ‘글루펜 공작’을 벌하기 위해 군벌 귀족인 바르센 후작이 일으킨 전쟁. 그러나 진실은 조금 달랐다.

 실상은 훨씬 추접하고 지저분한 밥그릇 싸움이었다. 3년 전 로엘과 밀약을 맺은 후작이, 모국을 통째로 제국에 가져다 바치기 위해 그동안 숨겨둔 발톱을 드러낸 것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후작의 옆에서 말을 몰고 있는 사내. ‘바르바젠’.

“정말로 그대가 나서면 왕국제일검사, ‘루벤트 톤 길리엄’ 백작을 제압할 수 있는 거겠지?”

“그렇다. 같은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게 하지 말도록.”

 후작이 제국의 힘을 빌려 지난 수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온 내전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신속하게 벌어지고, 종결되었다.

 바르바젠은 그 과정에서 왕국 유일의 초월자인 루벤트 백작에게 일기토를 신청, 압도적인 무위로 그를 고꾸라뜨렸다.

 현 아이렌 왕실의 구성원, 즉 권력욕이 넘쳐 반란으로 왕위를 찬탈한 전(前) 공작 일가는 한 사람도 남김없이 처형당했다. 제국과 바르센 후작의 이해가 일치한 결과였다.

 바르센 후작과 그를 따르는 귀족의 무리는 순식간에 왕도를 장악, 국경지대에 배치된 중앙군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생겨난 길로 제국군이 보무도 당당하게 입성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야말로 짜고 치는 도박판이라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모습. 제국군은 후작군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국내의 친 국왕파를 정리했다.

 그대로 동부 국경지대로 진군.

 북부 국경지대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던 기사의 나라, 칼투스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에 북부와 서부를 동시에 막아내야 하게 되었으니까!

[이것 때문이었던 건가!]

[어쩐지 좀처럼 진군해 오지 않고 뭉그적거리더라니! 시선을 북쪽에 묶어두고 옆구리를 치려는 계략이었던가!]

 칼투스 왕국 상층부뿐만 아니라, 칼투스와 아이렌을 방파제 삼아 제국을 견제하려던 후방의 왕국들에도 비상이 걸렸다.

 우왕좌왕하고 있는 주변 국가들을 비웃듯 제국은 여유롭게 굳히기에 들어갔다.

 군세를 둘로 나눠 그중 절반은 칼투스 왕국의 국경을 침범해 들어갔다. 후작군이 여기에 합세했다.

 나머지 절반은 후방의 왕국들이 섣불리 지원을 보내지 못하도록 아이렌의 국경지대에 배치되었다. 공성 병기와 대형 골렘이 뒤이어 추가로 국경에 배치됨으로써, 그야말로 완벽한 방어 태세가 갖춰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각 왕국의 이목이 아이렌으로 쏠린 사이, 제국은 이번엔 동쪽의 세 왕국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전력을 한데 집결한 제국군이 최소한의 방어 병력만 남겨 두고 단숨에 바르베룸 왕국을 향해 진군해 들어갔다. 양옆의 루벨트 왕국과 키사란 왕국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루벨트 왕국과 키사란 왕국이 분개했다.

[우리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건가!]

[제국이 무리수를 뒀다! 그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그러나 제국이 정말로 무리수를 둔 것일 턱이 있겠는가. 이번엔 또 다른 대형 변수가 출현해 주변 왕국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그 변수란, 바로 바르베룸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메르타 왕국 소속 명문 검가, ‘카트넬 가(家)’!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 영향력을 발휘에 군세를 끌어모은 그 가문이, 바르베룸 왕국의 뒤를 친 것이다!

 * * *

로엘은 각 전장에서 날아드는 보고를 취합해 간단하게 정리한 서류를 레인에게 내밀었다. 레인이 가만히 서류를 읽어내리는가 싶더니- 

“개판이네, 이거.”

 -짤막한 감상을 내뱉었다.

“칼투스 왕국은 아주 깔끔하게 고립됐고.”

 아이렌 왕국이 너무 순식간에 제국에 집어삼켜져 버렸다. 칼투스 왕국 입장에선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겠지.

 후방의 왕국들은 제대로 준비도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 제대로 된 지원을 보내줄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아이렌 왕국 남부 국경에 배치된 제국군이 언제 침범해 들어올지 모르니 섣불리 움직이기도 힘들 테고.

“바르베룸 왕국은 깔끔하게 반으로 갈려 버렸군.”

 르우벤이 이끄는 용병대를 선두로 한 제국군이 위에서 아래로 밀고 내려왔다.

 카트넬 가의 무력대가 선두에 선 군세가 아래서 위로 밀고 올라왔다.

 게다가 바르베룸 왕국의 국력은 상당히 약화 되어 있는 상태였다. 다름 아닌 로엘의 뒷공작으로 인해. (그 와중에 로엘이 프레퍼의 간부인 로칼트 가르시아를 생포하기도 했다) 바르베룸 왕국으로선 도저히 양쪽에서 밀어닥치는 군세를 전부 감당할 수가 없었던 모양. 결국 국가 상층부는 수도를 버리고 도망쳤고, 병력은 동서로 나뉘어 버리고 말았다.

 르우벤과 크레필만 카트넬은 그런 왕국군을 약 올리듯 순조롭게 합류해 군세를 하나로 합쳤다. 실로 골 때리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루벨트 왕국과 키사란 왕국은 힘을 합쳐 보기도 전에 분단돼서 각개격파 당하게 생겼고.”

“이야. 이젠 너도 먹물 좀 먹었다 이거구나. 전황도 읽을 줄 알고.”

 로엘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가 괜히 바르베룸 왕국에 그렇게 공작을 벌인 게 아니었다. 바르베룸 왕국이 동쪽의 세 왕국 중 가운데에 위치한 왕국이기 때문이었지.

“대체 그동안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레인이 살짝 질린 표정으로 로엘을 응시하며 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레인을 비롯한 각성자들은 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로엘의 ‘준비’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그 정도 결과는 나와줘야지.”

 로엘은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레인의 물음에 그렇게 답했다.

“그동안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마치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