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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화. 전사의 시험(3) (205/249)
  •  206화. 전사의 시험(3)

     전사의 시험이 마무리되었다.

     결국 대족장은 레인의 도발에 응했다. 레인과 대족장은 수많은 관중 앞에서 격돌, 보는 사람이 다 움츠러들 박력 넘치는 전투를 선보였다.

     결론만 놓고 말하자면, 레인의 승리였다. 대족장이 중간에 자진해서 패배를 선언했다.

     분명 두 사람의 전투는 호각세였다. 그렇지만 한쪽의 컨디션이 온전치 못했다는 점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사실상 격차가 드러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조한 컨디션으로 인한 빈틈을 노리면 충분히 승리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대족장은 깔끔하게 실력 차를 인정했다. 그 자신의 자존심이 그런 식의 승리를 용납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많은 전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족장이 레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작 레인 본인은 조금 맥빠지는 결말이라는 생각에 표정이 미묘했다.

     대족장이 그런 레인을 응시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겪어보니 어떻던가.”

    “?”

    “아직도 우리 수인족에 대한 평가는 그대로인가?”

     오라가 실린 목소리. 주위 모든 전사들이 대족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레인이 핫, 하고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마찬가지로 내력이 실린 발언인지라 주위 모든 전사들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즐거운 시간이었던지라 잊어버리고 있었다만.”

     전사들의 얼굴에 열기가 떠올랐다. 그 말인즉슨…….

    “인정하지. 그때의 발언은 실언이었다.”

     그들의 생각을 긍정하듯 이어진 레인의 발언.

     와아아아아아!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 * *

     이후 레인은 대족장과 따로 자리를 가졌다. 장소는 대족장이 거주하는 대형 막사 내부.

     본래라면 대족장이 상석에 위치해야 했으나, 그는 그러는 대신 적당한 탁자를 구해다 두고 레인과 마주 앉았다. 로난을 포함한 백호족 주요 인물들이 동석했다.

    “우선, 고맙다고 해두지.”

    “뭐가.”

    “마지막의 결투 신청. 그건 나를 배려한 행동이 아니었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대족장의 물음에 레인이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나 대족장, 칼투바란은 이미 속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언뜻 충동적인 행동으로만 보였던 레인의 대결 신청. 그에 모종의 계산이 섞여 있었음을.

    ‘아마 전사들 사이에서 나에 대한 평가가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신경 써준 것이겠지.’

     흔히 있는 일이다. 모종의 이유로 어느 집단의 수장이 평가절하당하는 건.

     그 대표적인 피해자가 바로 카트넬 가문의 가주다. 그는 객관적인 실력에 비해 대중에게 박한 평가를 받고 있는 비운의 사내였다. 오로지 가문의 소속 국가가 메르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번 ‘전사의 시험’의 경우엔 레인이 대족장조차 끝까지 통과하지 못한 시험을 모조리 격파해버렸다. 그로 인해 전사들 사이에서 대족장이 평가절하당할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의 그 대결로 그 여지를 없애버릴 수 있었다. 일단 아무리 레인이 지쳤다고 해도 대등한 전투를 치렀으며, 그 전투 자체가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기에.

    “모른다라. 일단 그런 걸로 해 둘까.”

    “…….”

    “그래, 그럼 이제 슬슬 본제로 넘어가도록 하지. 제국이 대밀림에 원하는 것은 뭐지?”

     대족장의 물음. 처음 레인의 입에서 ‘동맹’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었을 때부터 그가 가졌던 의문이었다. 대체 제국이 뭐가 아쉬워서 이런 오지의 이종족에 동맹을 요청하는 것일까.

    “우선, 제국이 대륙통합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해 들었겠지.”

    “그래. 로난이 그 이야기를 전해왔었지. 설마 그 전쟁에 도움을 주라는 말을 하려는 건가?”

    “아니. 그 전쟁은 제국의 힘만으로 치른다.”

     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현재 제국이 보유한 힘은 단순히 대륙 최강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수준이다. 각성자들의 개입으로 인해 이미 제국 역사상 최고 수준의 전력이 모였고, 그마저도 앞으로 더욱 강화될 예정이었다.

     단순히 강한 것만도 아니었다. 지난 시간 동안 대륙통합 전쟁을 염두에 두고 수많은 포석을 깔아 왔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성공 가능성을 높게 쳐주기 힘들었던 그 계획은, 지금에 와선 충분한 현실성을 갖췄다. 지금은 그 어느 각성자도 대륙 통합에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이 전쟁에 수인족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 아니, 끌어들여선 안 되었다.

     그들이 보유한 특수한 전력은 이후 인간의 다양한 병과와 조합되어 마족의 대군을 막아내는 데에 쓰여야 했다. 사실 그들을 대륙통합 전쟁에 끌어들이고자 해도 여러모로 현실적인 제약이 많기도 했고.

    “아니라니 다행이군.”

     대족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인족 주술 전사의 힘은 분명 강력하다. 그렇지만 대규모 전쟁은 단순히 전력이 강하다고 승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이 모든 아인종을 오지로 몰아넣고 대륙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게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보유한 수많은 병과. 그 조합으로 인한 파괴력이 그만큼 압도적이기 때문이지.

     엘프의 정령 병단도. 수인족의 주술 전사 부족도. 드워프의 철기 병단도. 용인족의 강인한 전사들도.

     그들의 힘은 너무나도 편향되어 있다. 개개인의 능력으론 인간을 넘어서는 이들이 많지만, 그뿐.

    “그렇다면 동맹의 목적은 뭐지?”

    “제국이 대륙통합 전쟁을 계획한 근본적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레인은 대족장의 질문에 되레 질문으로 답변했다.

    “?”

    “마족이다.”

    “뭐라?”

     대족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마족이라니, 웬 동화 속에서나 등장할 명칭이 갑자기 튀어나온단 말인가.

    “말로 설명해 봐야 믿지 못할 테지. 이걸 받아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림자로부터 하나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이번에 프레퍼의 수장이 기거하던 유적을 털면서 부가적으로 얻어낸 소득 중 하나. ‘운명의 현자’가 남긴, 안타깝게도 이제는 사용 횟수가 세 번밖에 남지 않은 소모성 아티펙트.

     즉, 프레퍼의 수장과 최고 간부들이 마족의 대륙 침공에 대해 알 수 있게 해 준 바로 그 물건이었다.

     * * *

     아티펙트의 사용 횟수가 1회 차감되었다.

     대족장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껌벅였다.

    “지금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 이 정보가, 정말로 사실인가?”

    “어.”

    “대족장님? 대체 왜 그러십니까.”

     몇몇 백호족들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티펙트의 효과를 받을 수 있는 한계 인원 ‘5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이었다.

    “…….”

     대족장과 로난을 포함한 다섯 백호족은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것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좋다는 말인가.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해 주도록 하지.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결국 대족장이 이야기를 일단락시켰다. 그가 레인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제국이 원하는 동맹은 단순히 병력지원 요청이나 불가침조약 같은 종류의 협약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군.”

    “세세한 조항에 관해선 이후에 제국이 대륙통합 전쟁을 마무리 짓고 정식으로 사자를 파견했을 때 논의하면 될 거다. 일단 지금 시점에서 제국이 대밀림에 원하는 것은 세 가지 정도뿐이다.”

     첫 번째는 마족이 대륙을 침공해 오는 미래를 제대로 인지하고, 차후 제국과 연수하게 될 것을 상정하고 있을 것.

     두 번째는 미래를 대비해 최대한 전력을 끌어모으고 육성할 것.

     세 번째는 시간을 들여 마족의 대륙 침공에 관한 내용을 수인족 사회 전체에 퍼뜨려줄 것.

     모든 설명을 전해 들은 대족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좋아. 그럼 이제 내기의 대가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흠칫.

    ‘내기’라는 말에 주위 백호족들이 반응을 보였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워낙 강렬했던 터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본래 이 자리는 그것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했다.

    “한 가지 부탁을 하겠다 했었지.”

     대족장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원하지?”

    “젊은 전사들.”

    “……?”

    “이곳 대밀림의 젊은 주술 전사들. 그들 중 지원자를 받아 이백여 명을 추려서 제국으로 데려가고 싶다.”

    “의도를 물어도 되겠나?”

    “그들에게 내가 익히고 있는 무술을 전수할 생각이다. 잘 키워내면 상당한 전력이 될 거라는 판단이 들어서.”

     그렇다. 레인은 이참에 두 번째 무력대를 확충할 생각이었다.

     원래는 당장 추가로 무력대를 창설할 생각이 없었다. 영약의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는 조건에 부합하는 인재를 모으기가 힘들었기에.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로엘의 힘을 빌려 인재를 모집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이미 레인과 로엘이 한차례 인재를 긁어모은 적이 있는 제국에는 그들의 기준에 부합하는 인재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레인이 창설할 무력대는 반드시 ‘대륙 최강’으로 거듭나야 했다. 어정쩡한 인재를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레인은 추가적인 무력대의 창설을 검가를 세운 뒤의 일로 미뤄두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데 이곳의 주술 전사들을 접하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들이라면 충분히 키워봄 직했다.

     첫 번째 무력대를 그 구성원 전체가 초일류 좌공 무인인 집단으로 만들 생각이라면, 두 번째 무력대는 주술 문신과 무공을 병행 활용하는 특수전력이 그 구성원인 집단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물론 강제로 끌고 가겠다는 말은 아니야. 어디까지나 자진해서 나서는 이들만 데리고 가겠다는 거지. 지원자가 없다면 그냥 깔끔하게 포기할 거다.”

    “허.”

     대족장이 저도 모르게 짧은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그랬던 것인가. 그 때문이었던가.

     이제야 알겠다. 눈앞의 사내가 대체 어째서 전사의 시험까지 치러가며 그 자신의 존재감을 수인 전사들에게 각인시켰는지.

     그 모든 게 지금 이 순간을 위한 포석이었을 줄이야!

     * * *

     같은 시각. 이종족, ‘엘프’의 터전. ‘대수림’.

     이 땅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나무 ‘세계수’ 앞에서, 르우벤이 엘프의 왕족인 ‘가르데인 루바렌’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동맹 제의가 받아들여져서 기쁘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가르데인이 냉막한 얼굴로 르우벤의 말을 정정했다.

    “아직은 아니지. 엘븐하임과 제국의 협약은 제국이 전쟁을 마무리하고 이종족 차별을 대륙에서 완전히 몰아낸 뒤에야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약속이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르우벤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그가 밀리아와 함께 대기시켜뒀던 본 드래곤의 등 위에 올랐다. 본 드래곤이 기성을 내지르며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본 드래곤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가르데인 루바렌은 생각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군.’

     이렇게 인간의 국가와 정식으로 동맹을 맺는 날이 올 줄이야. 아무리 그 대상이 제국이라지만, 그렇다고 해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괴짜인 자신이야 인간이라는 종족에 별다른 악감정이 없지만, 대다수의 엘프는 인간을 싫어한다. 아니, 혐오한다고 봐도 좋으리라.

     마족이라는 공동의 적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어머니, 즉 엘븐하임의 여왕께서도 절대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으셨겠지.

    ‘이래서 사람 일은 모른다는 말이 있는 거겠지.’

     그가 시선을 내렸다. 그리곤 자신의 손에 들린,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백색의 활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이제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고대의 활. 그러나 그 성능만큼은 아직까지도 건재한 최상위 아티펙트.

     바로 ‘요정 여왕’의 유산이었다.

     * * *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 이종족, ‘드워프’의 터전. ‘대협곡’.

     카트란은 멍한 눈길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크하하! 또 오게나! 그대의 방문이라면 언제든 환영할 테니!”

     대협곡의 지배자, 모든 드워프의 존경을 받는 그들의 왕. 그가 로엘의 손을 양손으로 붙들고 악수하며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주위에 늘어선 드워프들의 얼굴에도 호의적인 기색이 가득했다. 카트란은 그로부터 극심한 괴리감을 느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적의를 팍팍 표출하던 드워프들이…….’

     카트란이 질린 표정으로 로엘을 돌아보았다. 로엘은 입가에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드워프 왕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

     이제는 저 미소가 살짝 무섭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카트란은 한 차례 고개를 내저으며 상념을 털어버렸다.

     아무튼 이제 이곳 대협곡을 방문한 목적은 모두 이뤘다. 성공적으로 동맹을 성사시켰다.

    ‘이것으로 모든 이종족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군.’

     얼마 전 레인과 르우벤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각각 대밀림, 대수림과의 동맹을 성사시켰다는.

     용인족과의 동맹은 진작에 바르바젠이 성사시켜둔 상황. 가장 큰 난관으로 여겼던 드워프들과의 동맹조차 마무리 지었으니, 이제 이종족과 관련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고 보아도 되리라.

     문득. 카트란이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처음 다른 각성자들에게 마족의 대륙 침공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지금은 제법 그럴듯하게 미래를 대비해나가고 있는 자신들의,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스스로 떠올린 생각임에도 바보 같다는 감상이 들지만.

    ‘이제는…….’

     이 상황이 꽤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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